어린아이로 살고 싶어요.
소녀라면 한 번쯤 가져봤을 그 소원.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는 꿈을 꾼 적 있다. 20살이 되어 서울에 막 독립했을 때, 내가 있었던 곳은 누우면 꽉 차는 작디작은 다세대 주택의 방이었다. 다른 또래 친구 같았으면 부모님이 자취방 정도는 마련해 주었겠지만, 우리 집은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지금의 집도, 앞으로 살아갈 생활비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이런 방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미성숙했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상상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가정의 가난을 증명하고 장학금을 타는 일이었다. 그 돈을 받게 되면 한 해의 학원비와 생활비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나는 매년 이 장학금을 받았고, 이러한 생활력과 책임감이 20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대학생 때는 더 집착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무리해 일했기 때문이다.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 일하지 않아도 됐는데, 여유자금을 마련해놓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나도 한 번쯤 삶에서 '여유'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다고 여렴풋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달리기만 한 사람은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잊게 된다. 대학생 때 2년간 아득바득 500만 원을 모았을 때도 나는 부족하다 느꼈고 쉬지 못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느낀 것은 7살 때다. 그때부터 나는 남 눈치를 많이 살펴야 했다. 무언가 할 때 돈을 많이 써서 엄마가 힘들어하지 않는지 눈치를 살펴야 했고, 학교에서는 혹여나 내가 이혼 가정이거나 가난하기 때문에 왕따를 당하게 되지 않을지 우려했다. 어쩌다 비싼 물건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우리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이런 좋은 물건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학교 선생님 앞에서 설명해야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눈치를 살펴야 했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예의 바르게 격식을 차려야 했고, 언제나 '을'의 입장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눈칫밥을 계속 먹고살다 보니 삶이 조금 갑갑했다.
어릴 적부터 투정 부려서, 가만히 있어서 해결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법을 찾아야 했고 그렇게 해왔다. 일찍부터 큰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고 살았기에 처음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고민이 나보다 너무 작고 하찮아서 내 삶이 더 비참하고 가엾다고 느꼈다. 아마도 7살 때 엄마, 아빠가 집에서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싸우던 소리를 듣던 밤에 나는 어린아이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 같다.
20살의 나는 그 방에 누워 백마 탄 왕자가 이왕이면 돈도 많고 마음씨도 좋은 사람이길 바랐다. 금전적인 문제가 해결되어 일에서 해방되게 해 주고, 어린아이의 모습을 잃어버린 내게 천진난만한 모습을 되찾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지금 이 삶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사실 나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 것이다.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남 눈치 보고 싶지 않아요." 이런 말. 평범한 또래 친구들이 경험했던 딱 그 정도의 보호가 받고 싶었다.
이런 소원도 나의 고민도 결국 다 쓸모없다고 느끼는 순간,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일도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내일이 오지 않길 바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나일 거라며 신을 탓하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