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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Jun 22. 2020

18. 둘이서 라면 하나 - 멸치칼국수

멸치칼국수

박형서 단편집 <자정의 픽션>은 냉동실에 넣어둔 멸치가 감쪽같이 사라지며 시작된다. 수제비를 해 먹으려던 가난한 남자와 여자는 배고픈 상태로 침대에 눕고 여자가 묻는다.


“멸치가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그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육수용으로 끓여지던 죽방멸치들이 서로 힘을 합쳐 고향인 남해로 되돌아가 버렸다고. 작품에서 멸치의 리더격인 성범수(멸치 이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죽방멸치는 오로지 국물만 우린 뒤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진다. 사람들은 국물을 내기 전에 우리의 머리와 내장을 떼어낸다. 머리와 내장은 지성과 영혼이 담긴 그릇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푸대접을 참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체념과 묵상으로 도망칠 바에야 어떻게든 힘을 합쳐 고향 남해로 돌아가야 한다.”


 우정이 깊은 멸치들은 힘을 합쳐 비닐을 찢고 냉동실 밖으로 탈출한다. 변기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결국 시궁창 하수도에 도착한다. 멸치들이 남해로 향하는 여정을 막 시작한 것처럼 남자와 여자도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멸치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남쪽 바다로 향하듯 그들도 삶의 여유를 꿈꾸며 잠이 든다.


 농심에서 나온 멸치 칼국수는 이름에도 멸치가 들어가 있는데 라면 표지에는 멸치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바지락 몇 마리가 입을 벌리고 라면 위에 올려져 있다. 원재료명을 샅샅이 살펴봐도 조개 분말은 없는데 이건 뭔가요? 소설 속 멸치들이 국물만 우려내고 버려진다고 울분을 토할 만하다. 멸치야 미안해. 라면을 끓여본다. 멸치 칼국수는 기름에 튀기지 않은 면이라 느끼하지 않고 개운하다고 라면 뒷면에 적혀 있다. 정말? 스프에 멸치가 5.9% 들어있어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가 난다. 라면이 다 끓었다. 


 면발은 뽀글 뽀글 파마보다 굵은 웨이브 느낌이다. 표지에 그려진 면발 그대로이다. 호로록. 한 입 먹어본다. 면발은 쫄깃하고 국물은 짭짤하다. 얼추 밖에서 사 먹는 칼국수 맛이 난다. 아련히 매운 맛과 시원한 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먹다보니 조금 느끼해진다. 튀기지 않은 면이라 깔끔할 줄 알았는데 스프 때문에 그런가 싶다. 라면에 노란 달걀 지단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어 인상적인데 표지 그림에는 지단이 하나도 올라가 있지 않다. 아무래도 표지 디자인 팀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반짝 반짝 은빛으로 빛나는 멸치는 청어목의 바닷물고기이다. 몸은 긴 유선형이며 얇은 비늘로 싸여 있다. 아가미로 작은 플랑크톤을 걸러 먹는다고 한다. 위턱이 길게 돌출되어 아래턱을 덮고 있고 머리가 몸통보다 더 커서 인간의 시각으로 봤을 때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외모이다. 게다가 눈동자까지 크기 때문에 조금 큰 멸치를 볶아놓으면 멸치가 째려보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멸치볶음은 눈알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멸치로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먹을 때마다 무서우니까.


 국물을 낼 때 멸치처럼 사랑받는 품목이 또 있을까? 대부분의 한국 국물 요리는 멸치 육수만 있으면 반은 성공이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끓인다면 국물에 깍둑썰기 한 온갖 야채를 넣고 보글보글 끓인 후 된장을 풀어주면 된다. 잔치국수라면 국수를 삶아 찬물에 씻은 후 면기에 담고 잘게 썬 김치, 김가루, 간장을 넣은 후 뜨거운 국물을 부으면 된다. 멸치를 우릴 때 풍기는 냄새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렸을 때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가 생각나고, 주일마다 교회에서 다 같이 먹던 국수가 생각난다. 길을 지나다 식당에서 멸치 육수 냄새가 나면 왠지 그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싶다. 멸치 육수는 고기 육수와는 다른 구수함과 정겨움이 느껴진다.


인간을 위해 뼛속까지 희생하는 멸치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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