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창, 족발, 장어. 회.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들 중 일부이다. 생김새가 이상하거나 익히지 않은 음식은 먹기 힘들다. 하지만 양념게장은 무척 좋아했는데 바보같이 게를 한 번 익힌 후 양념을 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게에 양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한동안 안 먹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은 양념게장에 가 있으니 이를 어쩌랴. 결심은 흐지부지되고 식당에서 양념게장이 나오면 다시 맛있게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안도현 시인의 시 ‘스며드는 것’을 읽게 되었다.
꽃게가 간장 속에/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중략)/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저런 시는 한번 읽고 나면 머릿속에 평생 남는다. 난 이미 읽어버렸으니 끝장 난거다. 그 후로 꽃게만 보면 이 시가 떠오른다. 오뚜기에서 만든 진짬뽕 표지 중앙에 큼지막한 꽃게 다리 두 개가 보인다. 꽃게 다리를 보니 알을 보호하기 위해 간장 통 안에서 버둥거리는 꽃게가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떨쳐내야 한다. 라면에 집중해야 한다.
표지에 그려진 라면 사진엔 온갖 재료가 다 올라가 있다. 오징어, 바지락, 홍합, 꽃게 다리, 청경채가 화려한 면모를 뽐내고 있다. 게다가 대파는 살짝 그을리기까지 했다. 표지만 봐서는 진짜 짬뽕처럼 그럴듯해 보인다. 진짬뽕 글자는 시뻘건 붓글씨체로 적혀 있는데 자신이 진짜짬뽕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면을 뜯어보니 스프가 세 개다. 건더기 스프, 액체스프, 유성스프. 건더기 스프에는 청경채, 양배추, 오징어, 당근, 게맛살, 파, 미역, 목이버섯이 들어 있다. 한번 끓여 보자. 물을 끓일 때 건더기스프를 같이 넣으라고 되어 있다. 물이 끓으면 면과 액체스프를 넣고 다 끓인 후 유성스프를 넣는다. 유성스프는 고추기름 같이 생겼다. 면발은 멸치칼국수처럼 굵고 납작한 면발이다. 요즘 이런 면발이 유행인가? 난 라면은 얇은 면이 좋은데.
다 끓었다. 남편이 먼저 한 입 먹는다.
호로록.
"무슨 맛이 나니?"
"불에 구운 오징어 맛."
"진짜?"
나도 한 입 먹어본다.
호로록.
"난 그런 맛 안 나는데."
"그래?"
국물을 한 수저 떠먹는다. 짬뽕국물을 가장한 라면국물로 생각보다 맵지는 않다. 진한 불 맛이 느껴진다. 면발만 먹을 때는 잘 모르겠다. 맛있긴 한데 불에 구운 오징어 맛은 절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은 나보다 미각이 예민하니 남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쨌든 맛있다. 비싼 라면이니 비싼 값을 하는 거겠지. 인터넷에 찾아보니 유성스프가 불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고추기름을 넣지 않으면 맛이 없다는 후기들이 있다. 오호. 안 넣고 한 번 먹어볼걸.
고추기름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 중 하나는 순두부찌개다. 고추기름이 빠진 순두부찌개를 상상해 보시라. 밖에서 파는 고추기름은 맛과 향이 부족하기에 집에서 순두부찌개를 끓일 땐 고추기름을 만들어 넣으면 좋다. 엄청 쉽다. 재료는 고춧가루, 다진 마늘, 식용유만 있으면 된다(대파나 생강을 넣으면 더 좋고). 세 개를 동일한 분량으로 섞은 후 후라이팬에 넣고 약불에 5분 저어가며 볶아준다. 식힌 후 거름망에 따라내면 완성. 쓰고 남은 고추기름은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면 된다. 남은 건 어디에 쓰냐고? 진짬뽕에 넣으면 되죠!
볶음 요리에 고추기름을 한 수저 넣으면 중화풍으로 변신한다. 어묵 볶음에도 넣고 버섯볶음에도 넣어 보시라. 국물 떡볶이 대신 고추기름을 넣은 기름 떡볶이를 해도 맛있다. 그러고 보니 효자동 통인시장 안에 있는 기름 떡볶이가 먹고 싶다. 고춧가루와 기름만으로 버무렸을 뿐인데 참 맛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