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서울 한낮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갔다. 이런 날은 가스 불을 켜는 게 내키지 않지만 내 사랑 너구리라면 기꺼이 뜨거움을 참을 수 있다. 남편이 회사에 간 평일이라 라면을 반 개만 끓여야 하지만 특별히 한 개를 다 먹기로 한다. 내 사랑 너구리 순한 맛이니까.
농심에서 나온 너구리는 1982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다. 통통한 면발 때문에 2000년대 중반까지 공식 명칭은 너구리 우동이었다고 한다. 면발이 굵기 때문에 조리시간은 5분이나 되고 따라서 라면봉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면을 익혀 먹는 뽀글이용으로 적절하지 않다. 너구리 하면 다시마를 빼놓을 수 없다. 다시마는 82년부터 현재까지 전남 완도군에 있는 금일도에서 주로 생산된다고 하는데 그 양이 금일도의 연간 건다시마 생산량의 15%에 달한다고 한다. 지역 어민들은 너구리 때문에 마음이 든든하겠구나. 라면 봉지에서 가끔 랜덤으로 다시마가 여러 장 나올 수도 있다. 알려진 최다 기록은 9장이라고 한다. 중복으로 다시마가 들어가는 이유는 다시마를 넣는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름이 왜 너구리일까? 이름은 신춘호 회장이 지었다고 하는데 너구리의 오동통한 이미지를 연상해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개과에 속하는 너구리는 주둥이가 쫑긋 나오고 볼은 쏙 들어간 모양새라 오통통하기보다는 귀여워 보인다. 라면 표지에 그려져 있는 너구리의 각진 턱을 보시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타누키 우동에서 유래했을 거라는 설이 퍼져 있다. 어찌되었든 진짜 너구리가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야. 쇠고기면은 진짜 한우가 들어가거든.
라면을 끓여볼까? 보통 라면은 네모난 모양인데 너구리는 둥글게 형태가 잡혀 있다. 모양도 예쁘구나. 지우개만한 다시마가 하나 들어 있다. 후레이크에는 너구리모양 어묵이 7개 들어 있는데 달걀 후라이 어묵만큼 귀엽다. 그런데 얘네가 얼굴밖에 없어 물 위에 얼굴만 둥둥둥둥 떠오르니 갑자기 무서워진다. 이런 반전이 있나!
라면이 끓는 동안 표지를 살펴보자. 순한 너구리답게 표지는 전체적으로 온화한 주황색이다. 표지 맨 위쪽에는 나무로 된 봉이 가로질러 있고 하얀 천이 달려 있다. 천에는 검은색으로 너구리 라고 적혀있다. 봉에 천을 걸어놓은 걸 보니 일본 상점이나 주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노렌이 연상된다. 일본에서 노렌은 상품의 품질을 보증한다는 의미로서 가게 이름이나 문양을 새겨 입구에 걸어놓는다. 표지 우측 아래쪽에는 흰색 앞치마를 두른 너구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머리에는 파란 리본을 꽂았다. 그 옆에는 파란 리본을 꽂고 눈을 동그랗게 뜬 다시마가 점프하듯 뛰어오르고 있다. 왜 둘 다 파란 리본을 했을까? 귀여워 보이라고? 근데 너구리 왼손에 들려있는 동그란 원통형의 물건은 뭐지? 처음엔 머스타드가 들어있는 소스통인 줄 알았다. 밀대인가?
라면이 다 끓었다. 호로록 한 입 먹어본다. 통통하면서도 쫄깃쫄깃한 면발. 짭짤하면서 맵지 않은 국물. 풍성한 미역 건더기. 역시 너구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하지만 국물에 떠 있는 너구리 얼굴 어묵은 여전히 신경 쓰인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면 어쩌라는 거니. 눈 주위에 둘러진 테두리를 보니 눈 밑까지 검은 가면을 쓴 쾌걸 조로가 떠오르기도 한다. 애써 너구리 어묵을 외면하며 라면을 먹는다.
너구리를 소재로 한 노래도 있다. 가수 생각의 여름이 부른 ‘오늘 밤엔 너구리’ 가사는 이렇다.
‘밤에 먹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날 일을 알지만. 어쩔 수 없어. 오늘밤에 너구리~~’
노랫말과 선율이 착착 감긴다. 어쩔 수 없지. 너구리라면 밤에도 낮에도 아침에도 먹을 수 있는 걸. 얼굴이 오동 통통하게 부을지라도 너구리를 거부하긴 쉽지 않지. 모처럼 라면 하나를 혼자 다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