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뜨거워.’ 남편의 비명소리. 놀라 돌아보니 남편이 목과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아침마다 수동 커피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는데 갑자기 플라스틱으로 된 피스톤 부분이 부러져 뜨거운 물이 남편 몸에 튀어 버린 거다. 남편은 급히 목과 가슴을 찬물로 씻어냈지만 이미 피부가 벌겋고 가슴 두 군데는 살짝 벗겨졌다. 우리는 대충 아침을 먹고(그 와중에 남편이 내려준 커피도 마셨다) 집 앞 내과를 방문했다. 의사는 상태를 보더니 잘못하면 흉터가 생길 수도 있다며 큰 병원 응급실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응급실이라고? 사람들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로 가라고?
우리는 겁에 질려 의사 소견서를 움켜진 채 택시를 잡아타고 급히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달려간다. 방문자 명찰을 목에 걸고 응급실에 들어가 남편은 침상에 눕고 나는 그 옆에 앉는다. 누군가 와서 남편의 목과 가슴을 살펴보고 2도 화상이네요 하며 패치를 붙이더니 한 시간 동안 누워 있으세요 하고 가버린다. 남편은 목과 가슴이 시원하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반대 쪽 침상에서는 허리를 삐끗해서 온 청년이 비스듬히 누워있고, 옆 쪽 침상에서는 새우 알러지가 있는 여성이 새우가 첨가된 무언가를 먹어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데 간호사에게 출근해야 되니 빨리 주사를 놔달라고 재촉중이다. ‘이게 응급실이야? 내가 상상했던 거랑 많이 다른걸.’ ‘그러게. 한적하고 조용하네.’ 우리는 소곤대며 주변을 관찰한다. 한 시간 후 간호사가 메디폼을 붙여 준 후 내일부터 근처 병원에서 소독하라며 집에 가도 된다고 한다.
병원을 나서니 오전 11시. 남편은 하루 휴가를 냈지만 목에 붕대를 덕지덕지 붙인 상태이니 가긴 어딜 가나. 천천히 걸어 집으로 오며 우리는 만장일치로 점심 메뉴를 정한다. 몸에 화상을 입어 열 받을 땐 열라면이지. 오뚜기에서 나온 열라면은 표지에서부터 ‘열’이라는 글자가 내 마음처럼 활활 타오른다. 표지 오른쪽에는 거대한 청양고추 두 개가 그려져 있고 아래쪽엔 ‘열나게 화끈한 라면’이라고 적혀 있다. 라면을 넣고 팔팔 끓인다. 고춧가루 향이 확 난다. 다 끓인 라면을 그릇에 붓는다. 국물이 시뻘겋다. 호로록 한 입 먹어본다. 맵긴 한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안 맵다. 지금 열 받은 상태라 그런가? 남편에게 무슨 맛이 나는지 물어보니 그냥 매운 맛만 난다고 한다. 매운 걸 먹으면 상대적으로 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라면 국물을 한 입 먹어본다. 매운 라면 국물 맛이 난다.
왜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날 땐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생각날까? 우리가 맵다고 느끼는 건 매운 맛이 아니라 우리 몸의 통각세포가 자극되는 통증이다.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매운 음식을 먹으면 아픔을 줄이기 위해 똑똑한 뇌는 엔도르핀 호르몬을 분비하라고 명령한다. 엔도르핀은 통증이나 불안을 감소시키는 호르몬이기에 우리는 매운 음식을 먹으며 고통 받는 동시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맵지 않았지만 일반 라면보다는 훨씬 매운 열라면을 먹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얼굴이 아닌 목과 가슴에 화상을 입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 병원이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이고 응급 환자가 적어 평화롭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과 불을 다룰 때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도 들고 별일 없이 살아가는 하루가 얼마나 행운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라면을 먹다보니 속상한 마음이 가라앉고 감사한 마음이 생겨난다. 이런 저런 생각하는 사이 라면을 국물까지 싹싹 다 먹어버린 남편은 배가 부르다며 소파에 누워 명상에 잠긴다. 이런. 남편 뇌가 엔도르핀을 너무 과하게 분비시켰나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