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발리를 다녀온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당부한 건 물을 조심하라는 거였다.
반드시 생수를 마셔라, 양치할 때도 생수를 사용해라, 샤워 필터기를 가져가라, 식당에서 주는 물은 절대 먹지 마라. 수돗물도 마시면 안 된다.
처음엔 웃으며 넘겼는데 발리 여행 책에서도 빠짐없이 물에 관한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발리는 화산섬이라 물에 석회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외여행 20년 만에 처음으로 샤워 필터기를 캐리어에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묵었던 숙소들은 수질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4성급에 해당하지만 우기 때는 하루에 4만원이면 숙박이 가능한 저렴한 호텔들이었다.
물은 생수만 마셨다. 매일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생수만으로는 부족했다. 양치도 해야 하니까.
편의점에서 가장 저렴한 생수를 사서 양치용으로 사용했다.
장이 예민한 남편은 빠짐없이 생수를 사용했지만 나는 가끔 수돗물로도 입을 헹궜다. 별 탈은 없었다.
식당에서는 아예 물을 주지 않았다. 목이 마르면 생수를 사서 마셔야 했다.
발리에 머무는 동안 적어도 40군데의 카페와 레스토랑을 이용했지만 물병을 제공한 곳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길거리나 노점상에서 파는 음료는 사지 않았다.
음료에 넣는 얼음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물을 얼렸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허름한 식당도 피했다. 정화된 물로 밥을 지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발리 벨리’(bali belly) 라는 표현이 있다.
발리에서 깨끗하지 않은 물이나 음식을 먹고 탈이 나는 경우를 일컫는다.
발리에서 장염에 걸리는 경우가 워낙 많아 관련 단어가 생겼을 정도다.
발리 벨리의 주요 증상은 복통, 설사, 고열이다.
‘델리 벨리’라는 표현도 있는 걸 보면 인도 물도 만만치 않은가보다.
인터넷에는 발리 벨리에 걸려 며칠 동안 죽다 살아났다는 사연이 넘쳐났다.
설사하고 열나고 토하는 걸 며칠 간 반복한다고 생각해보라.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발리를 방문했던 친구의 남편은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주는 조식을 먹고 발리 벨리에 걸렸다.
필터를 끼웠는데 하루 만에 필터가 갈색으로 변했다는 하소연도 많았다.
숙소 물은 괜찮았지만 문제는 다른데서 발생했다.
아융 강 래프팅을 한 다음날 목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래프팅을 하며 옷이 흠뻑 젖었기에 강물 영향일 수도 있다.
래프팅을 끝내고 업체에서 제공한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씻었는데 그때 사용한 물이 문제가 됐을 수도 있다. 벌게진 목은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간지럽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물갈이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황당했다.
며칠간 고생은 했지만 목에서 더 번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를 지켜본 남편은 편의점에서 더 많은 생수를 사왔다.
저러다 생수로 샤워를 하겠다고 나설지도 몰랐다.
발리를 떠나기 전날 프라이빗 택시 투어를 신청했다.
남부를 둘러 본 후 저녁 6시가 넘어 숙소가 있는 스미냑으로 돌아왔다.
길가에 있는 상점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택시 안에서 밖을 구경하며 오늘따라 쉬는 가게가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가만보니 거리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테러라도 일어난 걸까? 녜삐 데이도 아닌데 무슨 일이지?
게다가 우리 숙소 근처는 경찰이 차량 통제를 하고 있어 택시가 진입할 수도 없었다.
기사님은 핸드폰을 보며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구글 지도를 보니 숙소까지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여기서 내리겠다고 한 후 기사님께 왜 상점 불이 꺼져 있는지 물어 보았다.
“녜삐 데이에요. 스미냑에서만 하는 스몰 녜삐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발리는 매해 3월 경 새해 축제를 연다.
힌두교식 축제인데 이를 녜삐 데이(Nyepi day)라 한다.
‘녜삐’는 침묵과 고요를 뜻한다. 침묵 속에서 사색하는 날이다.
녜삐 당일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도 중단된다.
발리 국제공항의 항공편 이착륙이 멈추고 공항은 폐쇄된다.
섬에 있는 모든 조명이 차단되고 식당과 상점은 문을 닫는다.
도로에는 차량이 통제된다. 오락 활동도 금지다.
다만 관광객들을 위해 호텔이나 리조트 식당은 운영된다.
이때 호텔은 커튼을 닫아 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투숙객들은 밖에 나갈 수 없다.
그 유명한 녜삐 데이를 겪게 되다니.
발리 여행 책 어디에서도 스미냑 녜삐에 관한 글은 보지 못했었다.
우리 숙소는 스미냑 경계선인 르기안에 위치했다.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은 르기안 오른쪽은 스미냑에 속했는데 스미냑 쪽 상가는 모조리 문을 닫았고 르기안 쪽은 불이 환했다.
해변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술과 음악으로 찬란했던 스미냑 해변가는 전멸이었다.
꾸따 쪽 해변은 빛나고 있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난감했다.
숙소 주변 식당은 대부분 문을 닫았거나 먹고 싶지 않은 메뉴만 팔았다.
스미냑에 속하는 거리에 호텔이 하나 있었다.
어두컴컴한 길가에 직원 몇 명이 서서 우리 레스토랑은 영업 중이라며 호객행위를 하는 중이었는데 힐끗 보니 통유리 너머로 희미한 불만 켜져 있을 뿐이었다.
골목을 돌다 불이 켜진 허름한 와룽에 들어갔다.
유리 가림막 안에 여러 반찬이 진열되어 있었다(파당 푸드). 사테, 커리, 밥도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손으로 원하는 걸 가리키면 직원이 한 접시에 적당히 담아 주는 방식이었다.
휴게소의 카페테리아와 비슷했지만 반찬마다 가격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고르니 뷔페 접시 두 그릇이 완성되었다.
음료까지 시켜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만원이 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배가 아파 고생을 좀 했다.
음료에 들어있던 얼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맥주를 시켰어야 했다.
귀국하는 날 발리 벨리에 걸리는 운 나쁜 사람까지는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