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임을 마치고 여유로운 느낌으로 자리에 앉아 있으니 퇴근 시간 근처만 되면 괴롭히러 왔던 옆팀 팀장이 생각났다. 그 팀장은 왜 항상 그 시간에 왔을까라는 고민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대화하기 바빴다. 퇴근 시간에 와서 급하다고 요청을 하고 나니 '일부러 나를 괴롭히나!'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분도 얼마나 어쩔 수 없었으면 그 시간에 나에게 일을 주러 왔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의 기억 하나하나를 좋게 만들어보려고 생각을 하는데 현재 팀장이 옆팀 팀장이 자주 짓던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급한 작업을 도와달라고 한다. 아! 여기는 이런 곳이었다. 내가 잠시 나와 회사를 위하여 좋은 합리화를 하려 할 때마다 나를 시험하듯이 회사의 더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다. 굉장히 찝찝하고 기분이 나쁘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숨을 한번 돌리고 신입의 옆에 앉았다. 팀장이 말한 급한 업무는 신입이 보고 있었다. 침착하게 앉아서 신입의 키보드와 모니터를 같이 공유하며 급한 문제를 본다. 여기서는 항상 급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급한 일을 항상 신입이 하는 것을 보니 '급한 일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처럼 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업무 내용을 나에게 전달하고 신입은 굉장히 화장실이 급한 표정으로 앉아 있지만 8년 노하우로 살짝 보니 5분이면 고치는 문제다. 이런 신입을 보니 과거의 내가 생각난다. 이 회사는 항상 이렇게 업무를 진행해왔다. 다짜고짜 신입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를 전달한다. 나도 그랬지만 시니어들은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고생을 해야 실력이 늘어난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시니어들은 신입이 자라기도 전에 회사를 떠난다. 신입들 주변에는 입으로만 업무를 진행하는 시니어들만 남게 된다. 신입들은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시니어들은 쉽게 입으로 추상적인 해결법을 던지고 간다. 그러면 신입들은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겪고 나서 똑같은 시니어가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개발자가 되는 과정도 그랬다.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어려운 책을 봐야 한다. 코딩을 자주 해야 한다. 아주 쉽게 주변에서 조언을 하고 개발자가 되는 과정은 너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책임한 소리인데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정신없이 시킨 대로 따라 하고 수많은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 그 말이 맞았음을 증명한다. 여기서 더 웃긴 부분은 이렇게 험난하게 사람들을 다룬 후에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을 뽑거나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개발자를 승진시킨다는 것이다. 혼자 야생에 떨어져서 독하게 험난한 길을 발톱을 길러가면서 생존해 왔는데 실력이 쌓이고 나니 무기인 발톱을 숨기고 모두를 챙겨서 가라고 한다. 물론 나는 나의 고생을 다른 사람이 굳이 겪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회사에서 그런 사람이 당연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말을 강요할 자격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의 상황을 한 번이라도 이해하고 말을 전달하는 걸까? 야생에 던질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구차한 변명이라도 전달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소름이 돋지는 않았겠지.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라고 조언을 하고 그 조언이 그 사람에게는 업무 성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과거 회상을 그만두고 5분 만에 고치는 문제에 집중한다. 5분 만에 고치는 문제지만 5분 만에 고치면 안 된다. 신입에게 이 노하우를 가르쳐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될 예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둔다. 남는 시간 동안 신입을 챙겨주려고 고쳐야 하는 코드는 고치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문제가 있는 부분을 같이 고민하면서 보는 척을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으면 여기랑 여기를 보는 게 좋아.”
“음.. 여기 변수의 값이 얼마인지 확인해볼까?”
“엇.. 이 값이 이렇게 나온 거 보면 좀 이상한데 어디가 문제 있을까?”
둘이서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나만 주저리주저리 열심히 말을 한다. 신입은 내가 일부러 답을 알고 있어도 신경 써서 이렇게 말을 해준다는 점을 모르겠지.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혼자 야생에서 살아남아 실력을 쌓았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야생에 떨어져 있던 시절 나를 챙겨줬던 형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형들이 하면 쉽게 고치는 문제를 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괴롭히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험난한 야생에서 그 형들만큼 도움 되었던 조언이 없었다는 것을 퇴사하는 날 깨닫는다. 그 형들이 없었다면 평균적으로 1년, 2년 다니는 이 회사에서 내가 8년을 버텼을까? 그 형들뿐만 아니라 나를 거쳐 갔던 수많은 파도와 쓰나미들이 없었다면 내가 8년을 여기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신입이 감을 잡았는지 열심히 말을 한다.
“여기가 이렇게 문제니까 이 모듈을 고쳐야겠네요. 여기에 예외처리 하나만 추가하면 해결되는 거죠? 제가 이제 고칠게요.”
그 부분이라도 알게 된 신입이 뿌듯해 보이지만 괜히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재밌고 더 고민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져서 짧게 대답한다.
“아니야. 더 자세히 봐.”
15분쯤 지나서 이제 나를 의심하면서 자기는 자기의 방식이 맞아 보인다고 말을 한다. 지금이 내가 기다려온 알려줄 타이밍이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어필하는 순간에 그게 아님을 알려주면 자신의 시행착오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순순히 알려주고 고쳐주면 실수 한번 없이 해당 문제를 손쉽게 고친 게 되어서 다음 문제를 마주쳤을 때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방식을 의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게 최선이었음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문제점과 고쳐야 하는 방향을 수정해준다.
“그렇게 고치면 이런 문제가 또 발생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렇게 고칠 거야? 나라면 이쪽을 고치겠어.”
문제는 이해했지만 다른 쪽을 고쳐야 한다는 말에 긴 침묵을 가진다.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단순한 조언에 고칠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오지도 않았겠지.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가 코드를 고쳐준다. 신입은 뭐가 신기한지 옆에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3년만 지나도 아무것도 아닌 모습인데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직을 결정한 나인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신입을 보니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