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티타임 - 낙오된 개발자

by crtlife noah

오전 티타임 - 낙오된 개발자

개발자는 늦은 출근, 늦은 퇴근, 많은 커피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직업과 유사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유로움, 차분함, 각성효과가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런 개발자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난 단순히 사람이 거의 없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느낌이 좋아서 일찍 출근한다. 오늘도 역시 사무실은 조용하다. 20분 정도 지나 9시가 되니 사무실에 들어오기 위해서 사원증 찍히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내 위치에서 왼쪽 방향으로 멀어진다. 이 시간에 출근하여 왼쪽으로 멀어지는 사람은 일환이다. 일환이는 병특을 하고 있어서 일찍 오는 친구다. 일환이와 단둘이 커피를 마신 적은 거의 없어서 조금 더 기다려본다. 30분 정도 있으니 익숙한 발걸음 소리들이 많이 들린다. 그중 내가 기다렸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여기저기 일찍 출근한 동료들에게 장난을 치면서 동생인 태섭이가 커피를 마시자고 소리치면서 내가 있는 자리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태섭이는 항상 외투와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사무실을 횡단하면서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한다. 태섭이가 몰고 가는 아침 티타임 열차의 종착점은 가장 멀리 있는 내 자리다. 그러다 보니 앉아만 있어도 대략적으로 누가 커피를 마시러 가는지 알 수가 있다. 나는 항상 태섭이가 도착하면 같이 커피 마시러 갈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민하는 척을 한다. 고민하는 척을 하면 태섭이는 섭섭한 시늉을 하면서 얼른 가자고 하는데 그 반응이 너무 재밌다. 태섭이와 같이 자리에 일어나서 당연히 같이 갈 일환이에게 커피 마시러 갈 거냐고 다시 한번 물어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출근하는 용권이형을 마주쳐서 용권이형도 바로 티타임 열차에 탑승한다. 용권이형은 회사를 가장 오래 다녔는데 높은 확률로 아침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주쳐서 커피 마시러 가는 것도 노하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출근길의 조용한 엘리베이터에서 태섭이가 시끌시끌 떠들기 시작한다. 내가 출근할 때는 이런 시끌시끌한 사람들이 싫은데 왜 이럴 때는 시끌시끌한 게 좋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태섭이 보고 목소리 좀 낮추라고 가벼운 조언을 해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오늘 커피는 내가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 카페 앞에 서서 잠시 눈치를 보는 사이 사람들이 어색하지 않도록 내가 계산대 앞에 서서 커피를 사겠다고 말한다. 평소에 자주 사줬던 커피이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고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다. 평소에는 내가 너무 자주 사서 못 사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늘은 내가 산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특별한 날이다. 바로 내가 개발자를 그만두며 회사를 퇴사하는 날이다. 동료들에게 나의 퇴사가 어색하지는 않아 보인다. 나만 해도 8년의 시간 동안 2-3번의 전체적인 동료의 변화가 있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나가고 들어왔었다. 너무 자주 나가고 들어오니 바다에 있는 흔한 파도의 느낌이었다. 가끔은 쓰나미가 있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문득, 팀 동료들에게 나는 파도일까 쓰나미일까 궁금해지지만 가벼운 파도가 아니길 바라면서 물어보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나가니까 좋지? 하면서 괜히 심술을 부려본다. 평소에는 카페인에 민감하여 마시지 않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마셔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느낌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어서 나의 시간만 천천히 가는 느낌이다. 한 모금 두 모금 마실 때마다 배가 살살 아파온다. 태현이에게 "너는 회사 안 옮기냐"라고 괜히 할 말이 없으니 과거에 물어봤던 말을 다시 물어본다. 나의 이직을 축하해주던 태현이의 표정 아래 복잡한 머릿속이 보인다. 나도 그랬었다. 한 명 한 명 내가 잘 따르던 형들이 나갈 때마다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는 나는 괜찮은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적응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불안했다. 개발자의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오히려 개발자의 시대는 개발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남들처럼 기술을 얻어서 현재의 일을 능숙하게 잘 처리하고 있는데 개발자의 시대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도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게으르게 현실에 적응한 낙오된 개발자로 만든다. 일만 부지런히 하고 있는 내가 잘못된 건지 그런 나를 낙오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일뿐이다.


과거에는 잘못된 게 가만히 있는 나와 회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를 바꾸려고 정말 부지런히 노력해봤다. 회사에 들어와서 아무런 가이드를 받지 못하는 신입을 위하여 교육 제도를 만들고 이상한 업무로 인하여 고통받는 직원들을 위해서 해당 업무를 효율화하는 방법을 찾자고 하고 해당 업무를 나눠서 책임지자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열정적인 감정과 다르게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변화는 반갑지 않다.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업무를 바꾸고 싶지 않고 충분히 바쁜 상태에서 추가적인 업무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부지런히 노력해 보았지만 혼자만 벽을 미는 느낌이 들고 회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회사와 그 회사의 관성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회사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 답답한 마음에 이미 이직한 과거의 팀 동료들과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다른 회사도 다 똑같다는 말을 자주 전해 들었다. 다른 회사도 다 똑같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이 다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문제라고 생각하니 역시 문제는 나였나라는 생각에 슬픔에 잠겼다. 이런 세상에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개발자의 시대에서는 조명이 쏟아지는 개발자가 따로 있다. 그러한 조명이 나를 잠시 비췄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조명은 정말 빠르게 비추는 곳이 변한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조명에 서 있는 개발자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개발자라고 말한다. 문득, 조명에 서있지 못한 수많은 부지런한 개발자들은 이유 없이 낙오된다. 커피를 같이 마시는 동료들에게 회사일만 열심히 하지 말고 부지런히 자기 공부를 하라고 조언한다. 조언을 하면서도 이게 올바른 조언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일반 직업에 비유하면 산부인과 의사보고 산부인과 일만 열심히 하면 인구가 줄어서 먹고살기 힘드니 정신과 일도 배워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 모습이다. 이런 이상한 조언을 다들 어렵다는 표정으로 수긍한다. 태섭이만 독특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 회사에 뼈를 묻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나의 조언을 가장 잘 받아들인 사람이 태섭이 일수도 있겠다. 잠시 걱정을 하던 모두가 걱정을 잊고 회사 험담을 하면서 같이 웃는다. 여기에 있는 모두는 국내의 유명한 대학을 졸업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세상의 틀에 자신의 몸을 잘 구겨 넣고 충실하게 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이런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조언을 했다. 늘 반복하던 회사 험담을 마지막 날까지 하려니 흥이 안 나서 내가 기억하는 회사의 좋은 점 위주로 사람들에게 말을 한다. 가장 좋았던 점은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던 이 시간이지만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전하지는 않았다. 시계를 보더니 다들 서둘러 내려가자고 한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