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는 마지막 날이라서 정시퇴근을 하고 싶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제까지 성실하게 다녀온 회사의 마무리를 하고 싶은 걸까? 난 항상 개근상을 받아왔다. 그래서 오늘도 정시퇴근을 하고 마지막 도장을 찍고 싶다. 그런데 컴퓨터를 반납하고 앉아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서 정시퇴근을 기다리는 것은 내가 생각한 성실함이 아니다. 특히, 잘 정리된 책상과 조용한 주변 분위기가 나를 빨리 퇴근하라고 독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로부터 더 강한 독촉이 오기 전에 괜히 쿨한 척 일어난다. 바빠 보이는 사람들에게 안 들키게 조용히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기고 계단으로 도망치듯 조심히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빨리 내려갈 수도 있지만 천천히 계단에 붙어 있는 명언들을 읽으면서 내려간다. 뻔한 말을 적어놨다고 생각했던 명언들이 오늘따라 재밌다. 다양한 명언들을 집중하면서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로비다. 평소에는 힘들어서 이용하지 않았던 계단이 마지막 날은 빨리도 끝난다. 경비 아저씨에게 사원증을 반납하고 정문으로 나가기 전에 로비를 뒤돌아본다. 8년이나 다니던 로비인데 오늘따라 낯설고 나를 서글프게 한다. 이 로비가 이렇게 화려하고 멋있었나! 8년 동안 다니면서 집중해서 로비를 쳐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회사 로비를 제대로 느끼려면 회사 소속이 아니어야 하는 걸까?
회사 건물을 나오는 순간 날씨는 너무 좋고 햇빛이 쨍쨍하지만 조명이 꺼진 느낌이 든다. 나의 무대가 끝났다.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는 다시 조명이 비추는 곳에 서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꺼져가는 조명이 너무 아쉬워서 좀 더 천천히 걷는다. 조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무대를 걷다 보니 열심히 챙겨줬던 동생들이 떠오른다. 챙겨준다고 구박을 엄청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동생들에게는 구박보다 칭찬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던 순간에는 철이 없었다. 내가 하는 행위에 의미만 옳으면 배려하지 않고 다짜고짜 그 행위를 강요했었다. 나중에라도 깨닫고 챙겨주려고 노력했지만 무대를 내려가면서 생각해보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생들에게 다음에 보자고 인사하고 나왔지만 다음에 보는 동생들은 내가 무대에서 보던 그 동생들이 아니고 동생들에게도 무대에 있던 형이 아니겠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소중한 개념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돈다. 성공적인 이직인데 도망치는 느낌이다.
회사에 불만이 많아서 맨날 불퉁거렸다. 일 대충 할 거라고 사방에 말하고 다녔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을 했다. 맨날 말하던 나의 불만조차 회사를 다니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을까? 이제 불만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다니기 좋았던 회사였다. 그런데 난 왜 좋았던 회사에서 늘 불만을 가지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개발자는 왜 늘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패턴으로 열심히 살면 인정받지 못할까? 이런 이유에서 선택한 개발자가 아니었지만 당장 개발자를 그만둘 수 없어서 나는 이직을 한다. 내가 쌓아 올린 견고한 모래성을 무너트리고 다른 모래성을 쌓으러 간다. 언젠가는 무너지지 않을 모래성을 기대하면서 부지런히 쌓아 올리겠지. 모래성이 무너지는 이유가 우리인지 외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도하며 피땀 흘려 쌓아 올리겠지. 앞으로 쌓아 올릴 모래성에 대한 걱정이 떠올라서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놀이터 모래를 한참 바라보다가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