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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tlife noah Nov 02. 2022

가끔은 계획적으로 아플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 심하게 아픈 게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는 기억을 못 하지만 힘이 하나도 없다가 힘이 생기는 기분이 기분을 전환시켜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코로나에 걸리고 이 느낌을 다시 느끼게 되어서 정리를 하려고 글을 적는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까?


나는 타협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털털한 척하지만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지만 속에서는 끝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어떻게 보면 솔직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느끼는 어려움을 난 쉽게 나의 어리광으로 인식하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허용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버틸 수 있는 힘듬이라도 내 안의 무엇인가가 지속해서 쌓이게 된다. 놀랍도록 육체는 금방 회복이 되고 아무리 정신적으로 힘들어도 튼튼한 나의 육체가 나를 움직이게 한다. 뭔가 피할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튼튼한 육체에서는 피할 수 없는 변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복잡하게 논리적으로 변명을 찾아봐도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한다. 사실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한다기보다는 내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도 그러겠지만 자신의 판단이나 행위는 온전한 자신을 위해 판단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도 복잡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결정을 하게 된다. 내가 하는 판단이 온전히 나만 결정하는 것이었다면 정말 속 편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나의 판단은 나의 가족, 지인들과 연결되어 단순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스스로가 아닌 책임은 그 책임을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 무게가 아니더라도 더 무겁게 느껴지고 그 크기가 아니더라도 더 크게 느껴진다. 


이런 복잡한 책임들은 아픔으로 가장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리 튼튼한 육체도 정신적으로 힘들면 갑자기 아프게 된다. 마치 정신을 챙기기 위한 육체의 방어 본능처럼 느껴진다. 일단 몸이 아프면 자기 자신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온갖 복잡함으로 가득 차 있던 내 안의 감정들은 아픈 곳 외에 신경 쓰지 못한다. 그동안 쌓여있던 모든 복잡한 생각들은 다 사라지고 아픈 나의 몸에만 집중하게 된다. 내 몸이 아플 때는 사소한 것에서도 만족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단순히 몸의 온도만 좀 내려가도 몸의 염증이 다소 완화만 되어도 쉽게 스스로를 느끼고 만족하게 된다. 


코로나에 걸린 최근에도 그런 경험을 했다. 나는 목의 염증과 열로 증상이 시작되었다. 물조차 넘기기 힘든 목의 염증에 괴로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느낌이었지만 회복을 위해서 억지로 참고 씹어서 삼키고 약을 먹었다. 약을 먹은 후에 증상이 완화되었을 때는 나아졌다는 만족감과 다음에 도전할 음식과 약만 떠올랐다. 그렇게 이틀쯤 버티고 나니 남아 있는 목의 염증과 심해진 기침이 새롭게 나를 괴롭혔다. 기침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정말 엄청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런 방법이 하나도 듣지 않을 때는 그냥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기침을 하게 두었다. 마음껏 기침을 하고 나면 몸은 힘들지만 뭔가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기침을 해도 괜찮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버텨내는 나 스스로를 보고 나면 정말 쉽게 만족감을 느꼈다. 아프지 않고 바깥에 있을 때도 목의 염증이나 기침 같은 많은 어려움이 우리를 시험하러 다가온다. 그런데 이런 증상들과 달리 그런 어려움들은 쉽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그런 어려움들은 나를 아프게 하지도 아프게 안 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바깥의 어려움이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은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몸에 느껴지는 아픔처럼 이만큼 아프고 이만큼 나아진 거야라고 느껴진다면 참 좋을 텐데 바깥의 어려움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나아진 건지 알 수가 없다. 간혹 내가 한 번쯤 아프기를 바랄 때가 있는데 그 이유도 충분히 아프다고 생각되는데 스스로가 그 아픔을 측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픔에 관해서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는데 그다음은 주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이야기하려는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의 변화 역시 아픔을 측정 가능하냐 안 하냐에 따라서 크게 변화한다. 바깥으로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 어려운 시련에서 흔들릴 때면 주변은 나를 방치하거나 지켜본다. 암묵적으로 다들 다 겪은 어려움이고 이건 누구든 해낼 수 있어야 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만화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힘든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크게 연기하지 않으면 다들 조용히 있고 그 상태를 서로 납득한다. 그런데 다들 알겠지만 힘들 때 표현까지 하게 되는 건 쉽지가 않다. 작게 힘들 때 표현하면 엄살이 되고 너무 많이 힘들 때는 표현할 힘이 없게 된다. 너무 많이 힘들 때는 그 표현에 오히려 내가 잡아먹혀버리기도 한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표현이 오히려 더 어려움을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잡아먹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내용이 실제로 아프면 정말 단순해진다. 실제로 아프다는 내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아는 공식적인 증상을 가지고 병원을 갔다 오기만 해도 주변의 반응은 달라진다. 주변은 모두 그 즉시 반응하게 된다. 챙겨주려고 하고 쉬라고 한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나의 어려움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나도 가벼운 어려움인데 모두가 진지한 표정으로 걱정을 하고 방치하거나 지켜보지 않는다. 마치 게임으로 치면 세상의 난이도가 너무 쉬워지는 느낌이다. 내가 주변에 해줘야 하는 기댓값이 낮아지고 나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해도 되게 된다. 아플 때는 그것이 허용된다.


그렇다고 아픈 게 장점만 있지는 않다. 아플 때 가장 힘든 순간은 적당히 회복되었을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세상의 난이도가 쉬워졌던 상태에서 다시 어려운 난이도로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완전히 회복하고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 어려움에 우리는 적당한 아픔이 남은 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럴 때는 여전히 육체가 아프지만 정상일 때와 똑같은 세상을 겪어야 한다. 많이 아플 때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더 섭섭하고 힘든 어려움을 마주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는 아니고 가끔은 계획적으로 아플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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