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보일러 줄까, 기름보일러 줄까..)
제주의 봄과 여름은 무지막지하게도 아름답다. 한국에 여름이 왔다하면, 눈앞에 떠오르는 바다는 단연 제주의 낭만 해변가. 반대로 가을 겨울은 무시무시하게도 시린 것이 제주다. 겨울철 제주 여행 중 꼭 며칠은 눈 속에 포옥 잠겨 있곤 했는데, 제주 살이를 맘먹을 땐 왜 이걸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건지. 초가을 며칠만 지나면 제주는 속을 모를 여인처럼 시퍼렇게 차가워져 얼른 보일러 틀 때가 되었음을 알린다. 제주의 집들은 가스 아님 기름보일러 둘 중 하나를 쓴다. 가스보일러는 이미 말 다 했고, 내가 일년살이 하던 주택 집은 그나마 낫다는 기름보일러를 썼는데도 기름 한 통 값이 (주유소 기름값에 따라, 즉 경기에 따라) 십삼만 원 내지 이십만 원을 넘어간 적도 있었다. 입주 때 주인아주머니께서는 "아가씨 혼자 사니까 이 한 통이면 석 달은 쓸 거야" 하셨는데 웬걸. 나란 사람 보일러 씀씀이가 헤픈 편인건지 석 달을 갈거라던 한통이 고작 한 달이면 잘도 뚝뚝 떨어지던 것이다.
겨울철 이 보일러 때문에 해프닝도 참 많았다. 어느 겨울비가 쏟아지던 아침은, (입주날 딱 한 번 뵌 적 있는) 일층 집 사는 작가님이 부랴부랴 올라 오셔서는 샤워를 좀 하고 가도 되겠느냐고 물으신다. 아침에 줌 미팅이 있는데 마침 기름이 뚝 떨어져 보일러가 꿈쩍을 않는다고, 이 꼴로는 카메라 앞이라도 도무지 설 수가 없다면서. 그렇게 작가님 샤워 한 회 내어드리고 보내는데 그 뿌듯함은 말로 다 못했다. 나 역시 아무 예고 없이 보일러 기름이 다 돼서 샤워는커녕 그 난감한 추위에 맞서야 했던 몇 번의 까만 밤들이 있었으니까. 보일러 기름통은 동네 주유소에서 출동해 채워주시는데, 해가 지면 얄짤없이 닫히는 제주의 주유소에겐 많이 바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제주살이란 정말이지 섬살이고, 섬살이란 수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을 말한다. 그 모든 걸 감당 하고도 지켜내고 싶은 가슴속 낭만 이랄까, 뜨거운 열망이란 것이 있는 이여야만 가능한 것이 제주살이. 그렇지만 낭만가들이여, 겨우 여기에서 지레 겁을 먹어선 아니 되오. 이제 겨우 일 번 마친걸요.
다음회에 계속..
with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