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하나가 닫히고, 새로운 문 하나가 열렸다
예정에 없던 한국에 떨어진 느낌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가족들은 괜찮다고 집으로 돌아오라 말해주었지만, 실제로 도착한 한국 부모님 댁에 다시 어린 시절처럼 한 집이 복작하게 들어차고 나니 내가 숨이 막혔다. 하필이면 가장 더운 여름을 찍은 해였다. 낭떠러지 끝에 몰려 머리가 새하얘져 있는 이를 그릴 수 있다면, 그 허연게 나였다.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지 한주 전 즈음에 한 언니와 연락이 닿았다. 오 년 만이었다. 가장 찬란하던 시절, 영어 스터디를 같이 했던 언니였다. 하필이면 그 따뜻한 사람이 내 생각이 많이 나곤 했다고, 보고 싶었노라 연락을 준거다. 밀란에서 그 메시지를 주고받은 뒤, 한 주 후에 그녀를 마주하고 있을 거라곤 전혀 알지 못한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지막으로 본 날로부터 흐른 지난 시간들을 나눴다. 이른 오후부터 만나 소맥과 지글지글 제주 흑돼지가 올라간 그릴이 지나고, 시원한 맥주 위에 감바스, 그리고 뚝배기 안에 가득 찬 선지와 먹음직한 파가 수북이 올려진 해장국이 안주로 곁들여진 소맥이 흘렀다.
언니는 내 사정을 듣더니 자기 집에 와있으라고 몇 번을 말했다. 한두 번을 흘려 말했다면 난 염치없이 그 말을 잡지 못했을 거다. 너무 좋은 사람인 언니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내게 해줬다. 이건 너무 선명해 잡아야 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 옆에 있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 등 뒤를 돌아보면, 엄마의 잔소리와 가족들을 향한 염치없는 마음들이 덕지덕지 내게 붙으려 손을 뻗고 있었다. 귀한 언니가 내려준 이 동아줄을 잡고 난 어떻게 서든 이 구렁텅이를 얼른 벗어나야 했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 희망이던 집 뒷산 도서관을 찾아가 그곳에도 구원의 길은 없단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남은 것은 오직 가족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던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염치없지만, 그렇게 이주 동안 언니의 집에서 보내게 된 하루하루는 온 마음 다해 벅찬 행복과 감동 그 자체였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반짝이며 자신 있었던 언니는 결국 중학교 정교사가 돼있었고, 그녀는 우리가 같이 영어와 연애하듯 만났던 도시에서 조금 더 그린 존에 떨어져 있는 한 학교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녹음과 반듯한 논밭 뷰, 시원한 에어컨이 솔솔 감도는 방 안에 포근히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아침마다 콩을 갈아 내려 먹던 커피잔들. 언니가 몇 번이고 와있으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일하러 집 앞 학교로 출근하면 이 사랑스러운 공간은 종일 비어 있었고, 그녀는 내가 이걸 즐겨주길 바랐을 거라. 세상 푸르고 늠름한 산 위로 뜬 광채가 쏘는 햇살을 눈앞에 초록 논밭이 가득히 받아 반짝일 때면, "언니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예요.." 하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힘없는 말을 뱉어내곤 했다. 그러면 언니는 그 마음을 안다는 듯 쑥스럽게 웃었다. 이곳에 이사 와서 뷰 앞에 가만히 멍을 때릴 때면 그녀에게도 역시 그런 생각들이 올라오곤 했노라 고백하면서.
내가 처한 상황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을 때, 난 늘 항복하고 그저 모든 걸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내, 내게 너무도 필요한 것들이 우연처럼 주어지고, 언젠가 내가 간절히 원했을 법한 것들이 적절한 타이밍을 만나 결국 펼쳐지는 걸 보게 됐다. 달리 이를 설명해 낼 방법이 없어, 금빛 발리를 당신에게 보낸다.
뺑소니 사고처럼 일어난 한국행 때문에 한 떨기 천사 같은 언니와 재회하고, 그녀의 집에서 본 논밭 뷰가 이어지는 발리까지 어느새 난 닿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