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드 Jan 13. 2019

통증을 통해 보다

두려움을 안고 보다

 나는 통증을 통해 본다. 온 몸의 근육이 당기고 아프면서 십여년 이상을 지냈다. 그러다 보니 눈을 감고 누워있으면 통증을 따라 연결된  근육이 지도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한의학이나 중의학 치료를 받으러 가서 한 곳에만 침을 꽂아도 이 근육이 어느 곳이랑 연결되어 있는지 맞출 수 있다. 치료하는 의사들은 놀라지만 그들이 암기해서 알게 된 것을 나는 오랜 통증을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불안정한 근육들은 여전히 수시로 덜컹거린다. 하지만 이전처럼 거울을 보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시간에 의해 단련된 것도 있지만, 통증을 통해 얼굴의 변화를 보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턱관절의 통증이 심할 때, 머리 근육이 경직되어 편두통이 있을 때, 코 주변의 근육이 당길 때, 목과 가슴이 딱딱해질 때, 입술이 마비된 듯 감각이 무뎌질 때 마다 이 통증과 함께 근육들이 수축되고 변형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보는 것이 두려웠다. 배 속에 있는 장기가 아픈 사람은 병을 진단받고서 그 병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얼굴이 아프다는 건 눈이 통증보다 앞서 현실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턱관절의 염증이 턱뼈를 흡수하는 통증의 흔적을 날마다 눈으로 확인했다. 병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언젠가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해 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보지 않기로 한건 거울과 사진뿐이 아니었다. 매일이 무의미해지자, 하늘도 올려다보지 않았다. 계절의 변화는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무심한 배경일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TV도, 영화도 보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다른 이들의 소식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본다는 것이 만드는 설움은 구석구석에 웅크리고 있어서 애써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평생 자기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다. 사진과 영상, 거울로 확인할 뿐이다. 렌즈나 거울을 통해 좌우가 뒤바뀐 모습을 ‘나’라고 인식하며 살아간다. 기대보다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흐뭇해하기도 하고, 못나게 나온 사진을 보며 실망하기도 한다. 실제로 볼 수 없는 내 모습의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내 모습은 각 사람이 가진 눈을 통해 다르게 비춰지고 해석된다. 어쩌면 내 얼굴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픈 얼굴을 대하는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얼굴이 많이 말랐네.” 수술 후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수술로 치아와 뼈의 위치를 바로 잡아 회복되는 중에, 갑작스런 근육경련이 얼굴에서 시작되어 온 몸으로 퍼졌다. 조금씩 회복되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 사연이 살이 찌고 빠지는 그런 문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턱관절과 턱뼈가 손상되고, 근육이 경직되고, 근막이 굳어서 세포들이 죽어가는 복잡한 문제가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살이 많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의사의 말이나 남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련되어 외부의 요인에 마음이 휘청거리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얼마나 잘못보고 살아왔는가를 되짚어본다. 내가 잘 보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피상적 이었는가를 돌아본다.           


 -‘본다’는 것은 이미 편견을 가지기를 택했다는 것이다-


 이성복 시인의 이 말처럼 보는 것은 불완전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영역 안에서, 내 시력의 범위에서, 내 머리로 해석된 것들 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시각은 보통 확신을 일으키는 감각이다. 정전 된 방에 불을 켜면 물체들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는 것은 선명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 사실 앞에서, 오랜 시간 동안 그저 보았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졌다. 이해하기 위해서 보았지만 수많은 오해들을 쌓아왔던 순간들이 내 머리 속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 때문에 보는 것이 두려워 졌다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서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얼마 전 ‘어둠속의 대화’에 참여했다. 빛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 100분 동안 일상을 여행하는 체험 전시다. 100분 동안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시각의 스위치가 꺼지자 다른 모든 감각이 살아났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똑같은 어둠뿐인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처음엔 두려웠다. 하지만 촉감을 통해, 냄새를 통해, 목소리를 통해, 미각을 통해 볼 수 없는 공간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확신의 감각이 사라지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더듬고 체험하며 상상할 수 있었다. 잡념 없이 모든 세포가 현재의 감각에 집중되었고, 사소한 부딪힘은 위안이 되었다. 눈빛이 줄 수 없는 포근한 위로가 존재했다. 빛의 고마움에 앞서 어둠 속에서의 자유로움이 스며들었다.     


 이 체험을 한 후, 내가 보지 않으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어쩌면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통증을 통해 시각이 아니라 다른 감각들이 살아났다. 불편함이 곧 불행은 아니었다. 눈앞이 보이는지 깜깜한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더딘 여정이었다.          


 나는 오늘도 통증을 통해 본다. 살려달라는 세포들의 아우성을 통해 내 몸을 보고, 그 힘겨운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간다. 지칠 때 마다, 보고 싶지 않은 두려움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끌어안으며 위로한다. 좀 더 좋은, 겸손한 관찰자가 되어가는 과정이겠지. 내 인생에도 다른 이의 인생에도.


이전 06화 고통 밖에서 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