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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Jan 13. 2019

존재 앞에 서는 시간

서글픈 행운

 거실에 틀어놓은 TV를 무심코 보고 있었다.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며 연예인들이 옛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에서 아는 사람이 나왔다. 고등학교 동창 중 아나운서가 된 친구였다. 그가 찾는 친구들이 앉아있는 화면 속에서 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친구가 얼마 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났다. 미래를 그려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비쩍 마른 모습으로 TV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그들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그들은 몇 년간 노력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노력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나의 몇 년이 더 큰 빈자리를 드러냈다. 그들의 화려함이 부각되고 막막한 내 처지는 더 초라해졌다.           


 구슬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실에 꿰어서 멋진 목걸이를 만들다가 실이 탁 하고 끊어져 버린 어린아이 심정이 이럴까. 알알이 빛나던 구슬들이 흩어져서 찾지 못할 어둠속으로 또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그 구슬들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의 목에 걸린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목걸이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고작 목걸이지만 잃어버린 사람에겐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힘든 상황이 되면, 나쁜 일을 위로하는 것보다 좋은 일을 축하하는 것이 더 힘들다더니, 내 처지가 그랬다. 고작 이정도 밖에 못되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나를 속 좁은 못난 사람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내 상황이라고 변명하고 싶기도 했다. 그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어도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늘 무엇을 하는가 보다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자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 다 부러웠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아프지 않은 모든 사람이 부러웠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질투가 났다. 나 말고 다른 인생은 다 괜찮아 보였다.       

   

 이전에는 스스로 안정적인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엔 경쟁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 아이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모난 성품들이 많이 다듬어졌다. 고등학교 때 부터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 삶에 집중하는데 가치를 두며 살았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누구에게나 있듯 이전의 내 삶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상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는 내 존재에 큰 상처를 내지 않고 힘든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상상하지도 못했던 불행의 주인공이 되자 내 안의 악마들이 꿈틀거렸다. 이전의 안정적인 자존감 이라는 것도 얄팍한 버팀목에 불과했다. 주변의 평균에서 아주 많이 벗어나지 않은, 감당할 수 있는 어려움 속에 있었기에 그 나약함을 몰랐다. 가혹하도록 특별한 불행의 파도 앞에서 그 버팀목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나와 다른 사람 모두를 대한 시선이 뾰족해졌다. 유쾌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유치한 사람이 되어있었고,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유별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의 바람은 나를 둘러싸던 모든 것을 하나둘씩 벗겨냈다. 그러자 ‘나’ 라는 존재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순간과 마주했다. 소속도 없어지고, 할 일도 없어지고, 얼굴까지 변해버리자 내가 다른 사람처럼 어색해졌다. 육체적인 고통도 힘들었지만, 채 이삼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든 것이 변해버린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나를 잘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과정 중에 올라오는 구정물 같은 복잡한 감정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나 자신을 공감하는 과정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열등감, 시기, 질투, 원망, 불안, 저주. 그런 감정들이 스쳐지나가거나 일정시간 머물다가 지나간 적은 많았지만 그것들이 삶을 이토록 오래도록 세차게 흔든 적은 없었다. 그 감정들을 다루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흔들리면서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감정들은 누구나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올라올 수 있는 감정이었다. 특별히 나쁘고 모자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되면 우리 안에서 살아날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그 감정들을 이해하면서 나를 받아들여갔다. 그 과정 중에 자연스레 이전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해졌다. 다른 사람의 모습에 보이는 못마땅한 모습도 결국 내 안에 숨어 있는 감정이었기에, 다른 사람은 비난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더 경계하게 되었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결혼 소식보다 취업 소식이 더 부러웠다. 나는 사회에서 무엇을 이루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많은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내가 성장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다. 인정받을만한 지위를 얻는 것만이 성취가 아니라면, 이 상황을 통해서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도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닌지 자문했다.          


 또 다른 물음이 이어졌다. 나 자신을 존재가 아니라 쓸모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인간이 존재로서 가치를 가진 다면 지금이 내 존재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벌거벗은 나와 대면하며 진짜 나를 알아가는 묵직한 ‘삶’ 그 자체였다.    

      

 ‘나’의 존재에 다가가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통증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육체의 아픔을 견딜만하게 만들었다.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라’는 성경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씩 이해되었다. 철저한 슬픔 속에서만 건져낼 수 있는 기쁨이 숨 쉬고 있었다. 고난이 하는 가장 큰 선물은 삶의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였다.      


 혹독한 시련의 바람은 마음 속 깊은 바닥을 처절하게 드러낸다. 잎이 떨어지고 꽃도 열매도 사라진 앙상한 나무는 그 뿌리가 어떤 가치 위에 서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겨울이 되어서야 본질을 드러내는 나무처럼, 나를 포장하던 잎사귀와 무겁게 지니던 열매를 다 털어냈다. 그리고 진짜 나와 대면했다. 사람을 진실로 빛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거센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을 유일한 버팀목은 어떤 것인가, 인생을 진정 푸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안고 벌거벗은 겨울나무처럼 오래도록 서 있었다.           


 나를 포장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존재만 남는 경험이 힘든 여정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를 쓰러트리고 다시 일으키는 이 시간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 난감했다. 불행이라고 하기엔 값진 경험이었고, 행복이라고 단언하기엔 서러움이 앞섰다. ‘서글픈 행운’ 정도로 부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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