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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Mar 30. 2020

콩트 작가 하면 잘하겠다.

인생을 바꾼 한마디 

어린아이에게 어른은 심심찮게 질문을 던진다.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이제 말문을 튼 아이라도 이런 질문을 들으면 번듯한 대답 하나 정도 (예를 들면 공무원이라든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든지) 던져줄 직업 하나쯤 품고 있어야 될 것만 같다. 어른들이 흐뭇해할 것만 같은 모범적인 답안을. 


아이가 다섯 살 때 어린이집 학부모 상담을 갔다가 알았다. 아들의 꿈은 ‘아빠’였다. 소방관, 경찰관, 의사, 가수 등 여러 가지 직업이 있었겠지만 아들은 강력하게 ‘아빠’를 밀어붙였다. 엄마보다 더 잘 놀아주는 아빠가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입꼬리가 우주까지 승천할 기세로 좋아하던 남편이 떠오른다. 


1993년, 열네 살 중학생이었다. 장래 희망 직업을 한창 탐색할 나이. 하지만 그때의 나는 뚜렷한 꿈도 막연한 목표도 없이 진로카드의 희망직업 란 앞에서 머뭇거리며 연필을 굴리고만 있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에 입학 후 그때까지만 해도 심장 떨릴 만큼 좋아하는 일이 없었던 거였다. 기계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의무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나마 즐거움을 줬던 것은 그때 유행하던 음악들이었는데. 특히 반장의 때깔 나는 소니 워크맨의 이어폰 한쪽을 빌려 들었던 음악들. 그 당시 10대들이면 누구나 흥얼거렸던 New Kids On The Block의 음악부터 수업 시간에 몰래 들었던 Michael Jackson, Sting, Queen 등 올드팝까지.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런 팝송들이었다. 첫 영어를 피아노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때 팝송으로 배운 덕분이 컸다. 



이름이 호명되던 순간 


중학교 2학년 새 학기, 국어 수업 첫 시간이었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30대의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어 과목과 친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여느 수업과 마찬가지로 무작위로 불리는 번호에 늘 긴장을 하며 맞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그때 당시에 참 파격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단원이 마무리될 때 무조건 50분 수업 중 20분을 할애해 주제와 관련된 글을 쓰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발표를 하게 했는데, 나 역시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름이 호명됐고 쑥스럽게 앞으로 나가 발표를 했다. 그렇게 몇 번의 호명을 받는 동안 글에 대한 평가를 덧붙여 주셨는데 그때마다 칭찬을 듬뿍 해주셨다. 선생님은 자주 수업시간에 나의 이름을 호명하셨다. 


그때부터였다. 누군가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 아, 관심을 받고 있구나, 라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호명해 주는 한 사람이 있구나, 라는 무언의 전달. 그것이 얼마나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지 그때 처음 느꼈다.  


관심받고 싶어 글을 쓴 아이


안도현 시인은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나 역시 그때부터 목표가 생겼다. 국어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 라는 각오. “우리 학교에 이렇게 뛰어난 인재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국어만 팠다. 그 마음 하나로 예습을 했고 매번 정답을 제대로 캐치하는 국어 우등 학생으로 자리 잡았고, 마무리는 만족하시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이후, 국어 수업만 손꼽아 기다리게 됐고, 누가 권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교내 백일장도 나갔다. 수필을 썼고 운이 좋았는지 장원까지 받았다. 전교 조례 시간에 교단에 나가 상을 탔다. 아름다운 미소는, 내친김에 교외 백일장도 나가게 했다. 역시나 상을 타 왔다. 선생님이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겠지, 또 칭찬해 주시겠지, 라는 생각이 더욱 가슴을 뛰게 했다. 칭찬에 왜 그리 목말랐을까. 그런 갈증을 선생님께서 해소시켜 주신 것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발표에도 자신감이 꽤 들었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쓴 글을 소개하고 아이들의 격한 공감을 얻으며 자리로 들어가려는 찰나, 선생님께서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셨다. 아직도 그 문장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새기고 있는데, 


"콩트 작가 하면 잘하겠다." 


그때는 콩트 작가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칭찬에 좋아서 싱글벙글했던 기억이 난다. “콩트? 방송 작가가 되면 쓰는 것 중 하나가 콩트 아냐?” 그런데 그 문장이,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마음에 한자리를 잡고 눌러앉았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줄곧 방송의 연을 놓지 않고 일을 하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문예부에 들어갔고 대학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예창작학과를 지원하고 취업 지원서에 방송작가를 쓰고. 그러다 어느 순간 방송에 몸을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마법처럼 그런 날이 왔다. 라디오 작가 경력을 쌓으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났지만 진행자들이 제일 재밌게 읽어 주는 원고가 바로 콩트 원고였다. 


후에 선생님을 수소문해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되레 제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30대 교사의 그 열정에 찬 수업을 누가 알아줄까, 생각하셨다는데 단 한 명이라도 그 시간을 값지게 수업받아줬다는 것, 그 사실에 굉장히 고맙다는 말씀을 선물로 주셨다. 그 말씀은 다시 또 훗날 나를 일으키는 문장이 되어 주었다. 감사히도.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흔들어 놓을 근사한 문장이 되곤 한다. 그래서 더욱, 함부로, 상대의 인생에 훼방 놓는 말은 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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