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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Mar 28. 2020

비범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꾸준함은 배신하지 않는다.

방송에 몸담은 이들의 생활이 당연히 그러하겠지만, 라디오 작가의 24시간은 특히나 편의점 같다. 생각이 밤새도록 켜져 있는 도시 곳곳의 편의점, 같은 일과. 하루 방송을 마치면 '오늘 장사도 잘 끝났구나'라는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스멀스멀 밀려오는 숙제. 내일은 또 무엇으로 쓸 것인가, 라는 고민이다. 


밥집 주인아주머니가 가져다주는 "비키소, 뜨거워예" 하며 테이블 위에 한자리 잡는 뚝배기. 김 펄펄 내며 성난 아저씨처럼 부글거리는 된장찌개를 보면서도 '요거 뭔가 글감이 되겠는데'라는 생각부터 한다. 신랑과 연애할 때도 만나면 입버릇처럼 물었다. "있잖아. 내일 오프닝, 뭐로 쓸까?” 숙제 부담을 얹어 주며 짐을 살짝 나눠 보고자 던진 앙큼한 질문. 물론,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작가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악몽. 원고 마감 시간까지 써내지 못해 쩔쩔매는 꿈은, 밀린 원고 앞에 두고 쪽잠을 청할 때도 방해하면서 괴롭히곤 했다. 심지어 꿈에서 오프닝을 만지작거린 게 꿈을 깨고 생각날 때도 있었고. 그래서 매번 문장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생활 덕분에 탁월한 문장을 만나면, 환장한다. 빛나는 글은 작가 세포에 자극을 준다. 


그러고 보니, 17년 가까이 쓴 오프닝만 해도 4천여 개가 넘는다. 그 모든 원고의 매일매일이 걸작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랑할 만큼의 고퀄리티라고 뻔뻔하게 자부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진심을 담고자 애를 썼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은 없다. 


식상하지 않게 쓰기. 매일 아침 갓 구워낸 빵처럼 맛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가 아니라 한정된 지역에 나가는 방송이지만 그날 아침, 혹은 그날 오후나 저녁, 나의 글을 듣고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아,,' 하며 고개 끄덕여 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싶었다. 덕분에 맡는 프로그램마다 지역의 많은 애청자들이 글에 공감해 주었고, 따뜻한 피드백을 받으며 예쁨을 받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사실, 익명의 수많은 청취자들에게서 내가 더 많이 위로를 받았던 게 아니었나, 뒤늦게 생각해 본다.  


라디오 작가라고 하면 곧잘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매일 써요?”라는 말이다. 하긴 그걸 다 어떻게 써냈을까, 생각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낸 일이 기특하다 싶다. 아니지. 누구든 매일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 이거 하난 분명하다. 


밥벌이를 위해서기도 했겠지만, 꾸준히 매일 ‘쓰는 일’을 루틴 삼아하고 있는 직업. 바로 작가다. 글쓰기 관련된 책들을 읽다 보면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꾸준하게 써라! 라디오 작가들은 특히나 그 꾸준함의 힘으로 매일 쓰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인생에 하루 2시간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작가들은 오늘도 꾸준하게 내일의 글감을 고르고 자판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

(매일 아침 써봤니?, 김민식 PD) 



김민식 피디는 꾸준히, 매일 아침마다 글을 쓰는 작가이다. 처음 그의 글을 접한 것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무심코 넣어본 검색어 하나 덕분이었다. (꽤 늦게, 그의 글을 접한 것을 후회한다.) 고정적으로 하던 라디오 일을 그만두고서였는데, 그날도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았던 날이다. 남는 아침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자료 검색란에 무작정 '아침'이라고 쳤다. 검색되어 나온 책 목록, 그중 하나가 김민식 피디의 <매일 아침 써봤니?>라는 책이었다. 그 책부터 찾아 읽고 신이 나서 연달아 다른 책도 찾아 읽었다. 지금은, 당연히 팬이 되었다.


대책 없는 긍정 


책도 맛있을 수 있구나, 느끼게 하는 그의 문장. 첫 장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싶었는데.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은 어쩌면 그의 지치지 않는 유머 감각이 아니었을까? 대처할 수 없는, 거침없는, 대책 없는 낙천적인 태도. 때때로 후줄근해지는 우리의 인생을 대하는.


그렇다고 후루룩 읽고 말 정도의 가벼운 필력이 아니다. 그의 글에는 오랜 시간 꾸준히 이어온 독서의 내공은 기본이고, 유머와 함께 결코 웃으며 넘길 수 없는 그의 길고 긴 파업 이야기는, 쉽게 삼킬 수 없는 목 메임을 동반한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고부터 지금껏 가슴에 품고 있는 화두가 있는데, 바로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불쑥 그런 생각이 튀어나올 때마다 느슨한 마음을 고쳐 먹게 되는 생각.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을 쓰자. 


비범한 삶이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록하니까 

비범한 삶이 되는 거라고 믿으며 

오늘도 달립니다. 

(매일 아침 써봤니? 중에서)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가 마음을 빼앗기고야 마는 글을 만나면 설렌다. 그의 글 역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감동이 있다. 포장되지 않은 감동. 덕분에 유난히 코가 매웠던 페이지들이 꽤 있었다. (며칠 전 읽은 그의 따끈한 신작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mbc 노조 활동을 하며 유배 생활에서 겪은 이야기를 신기하게도, 신나게 전하는 작가. ‘그들이 벌을 준 시간을 상으로 활용하는’ 발상은 역시 그냥 피디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걷고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시간을 열심히 살아낸 그의 기록. 책들을 통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한 것은 바로 '꾸준함'이었다. 


매일 쓰는 것으로, 혹은 꾸준하게 뭔가를 하는 것으로 인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 라는 그의 문장은 잠시 멈추어 선 나에게 질문했다. 무엇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일용직의 삶에서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때 그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최근의 나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무한한 내일을 위해서, 지금 내가 꾸준히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한 문장들.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불씨를 만들어 주었다. 언젠가는 그의 이야기를 직접 경청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또한 꾸준히, 나의 글을 써보겠다고 용기를 품고 시작한 이 작은 기록들이, 비범함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또 한번 성장의 기록이 되기를. 이제 막, 나의 오프닝을 제대로 시작하고 있는 일상들이 헛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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