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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Mar 16. 2020

봄은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의 동선(動線)

나흘 만이었다. 집 밖을 나온 것이. 우리의 생활은 어느새 집 밖이냐, 안이냐, 두 동선으로 나뉘고 있었다. 바이러스 하나가 일상의 방향을 바꿀 줄이야. 아이와 산책 나오던 그마저도 조심스러운 요즘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는 자신의 여덟 살이 순탄치 않게 시작됐음을 기억할 수 있을까? 유치원 졸업 후 두 달 넘도록 세상 절친 사이가 된 아들.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밖은 위험해”, “안 돼”, “손 씻어”, “마스크 써야지” 라는 지긋지긋할 만도 한 엄마의 말을 더 오래 기억할까?


“집에서 노니까 징글징글 해”


가끔 단어 조합을 독특하게 하는 아들은 ‘지긋지긋’하다는 말 보다 징글징글이라는 표현을 곧잘 애정 한다. ‘아들아, 같은 마음이야.’ 라는 말이 나오다가도 금세 쏙 들어간다. 의료 현장에서 중무장을 한 채 바이러스에 대적하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 그 노고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니. 간절함으로 이 코로나의 종식을 도모할 수밖에.


마스크 여분이 부족해 약국 줄 대열에 합류하기로 하고, 망설임 끝에 나섰다.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오는데 오전 햇살에 눈이 시렸다. 아, 봄이었지.


며칠 사이 꽃샘추위가 들락날락 하던 중이었는데, 아무리 질투를 해도 봄은 겨울을 비집고 들어온다. 멈출 줄 모르는 확진자 숫자에도 아랑곳 않고 찾아오는 계절은, 무슨 일이든 끝이 있음을 알리는 것일까, 혹은 무심한 것일까.


봄 햇살이 이마에 닿자, 그리운 것들도 떠오른다. 이맘때쯤이면 아래 지역에서는 목련 씨와 동백 씨가 반질한 얼굴을 내밀 때인데 확실히 위쪽은 꽃 소식이 늦다. 이사 후 세종에서 맞는 첫 번째 봄은 그래서 더욱 더디게 느껴진다.




생경한 봄을 맞는 2020년의 3월. 때마침 미세먼지도 없이 깨끗한 하늘을 본다. 나들이 한창일 이 계절은 문 닫은 상가들만큼이나 썰렁한 감이 있다. 행락객들에게 봄볕을 하사하느라 바쁠 봄은 무안한 표정을 하고 있다. 봄, 저도 코로나 여파가 크다.


새파란 하늘에 피로한 눈을 씻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말해야 되는 시대. 그게 귀하다 생각도 못하고 그저 무한대로 만끽하며 맑은 하늘을, 공기를 탕진하던 시절. 그때는 미세먼지가 뭔지도 몰랐다. 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쓰는 때가 오고야 말았고, 맑은 하늘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해야 하는 때였으나. 지금은 그 하늘도 마스크를 쓴 채 각자가 스스로 격리하는 공간과 동선 안에서만 즐겨야 한다.  


겨울을 밀어내고 오는 계절을 두고 누군가는 봄이 기어이 오고 만다고 표현하고, 또 누군가는 그 봄도 사실은 겨울 덕에 그만한 호사를 누리는 것이라 한다. 추운 겨울 없이 맞이하는 계절이라면 봄은 지금처럼 후한 대접을 받기 어려울 테니. 그런 봄의 즐거움을 올해는 만끽하지 못한 채 코로나의 겨울이 길어질 듯 보인다.


봄은,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아니었던 것을

청산하면서 온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중에서>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데는 역시 독서만한 게 없다. 아껴서 야금야금 맛보는 시 평론집. 문학평론가 황현산 작가의 <잘 표현된 불행>. 그는 봄을 이렇게 표현했다. ‘봄은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봄이 아니었던 것을 청산하면서 온다.’  사실 책에서는 묵직하게 던지신 문장이었는데, 한동안 내내 곱씹게 되는 글이었다. 그리고 내심 이 봄에게 거는 기대 또한 커지게 만드는 문장이기도 했다.  


봄은 곳곳의 추위를 지우고 그렇게 겨울을 청산하며 온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불행히도 세계적 대유행 단계로 들어섰지만, 무너지는 생활과 이 고된 시간들을 청산하면서 우리의 봄도 얼른 와주기를. 머지않은 그날은 이 봄을 온전히 가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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