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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Jan 29. 2020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방향 좀 잃어도 괜찮아, 당신

2013년이었다. 

브레이크 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던 일상에 시동을 끄고 기약 없는 휴식을 결정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해 11년 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던 방송 일을 그만뒀다. 여름휴가 일주일 정도 쉬는 것 외에 (물론 이마저도 반납한 해도 있었지만) 일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미련하게도 일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슬프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들이 있었다. 바로 '생계(生計)' .

일을 놓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로 인해 생기는 경제적 어려움. 당장 먹고 사는 일, 연체된 어제가 내일을 독촉하는 고달픈 시절이었다. 


결혼 후 아이를 가지고서야 제대로 쉬게 된 것인데, 출산과 육아는 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노동의 세계였다. 물론, 아이가 주는 기쁨은 사회적 노동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부모의 세계로 들어서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는 친구도 아니었다.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화장을 하고 백을 매고 덜 마른 머리로, 샴푸 향을 날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 바쁘고 허겁지겁하는 모습이 좋았다. 부러웠다. 아기띠를 매고 밖을 쳐다보다가 “좋겠다”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11년의 탄탄한 경력을 쌓았던 나였지만, 나는 다시 ‘제로’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운이 좋게, 기회가 찾아 왔다. 아는 인맥을 통해 라디오 작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력서를 서둘러, 다시 쓰기 시작했다. 심장이 심히 뛰고 있었다. 부산에서 신랑 따라 울산으로 와 있던 나는, 가족 외에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끝이구나, 싶었을 때 세상은 기회를 주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새는 날갯짓에 닿는 그 바람을 좋아한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막연한 생각들로 가득했던 시간이 불과 며칠 전 같았는데,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On Air에 들어온 빨간 불에 다시 쫄깃해지는 심장이 응답하고 있었다. 너, 잘 해내고 있어, 힘내, 잘 할 거야. 응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마음에 심지 하나 세워두고 원래 그랬듯이 묵묵히 그 길을 걸어 가보자고.  


늘 보이던 길이 사라지고 방향을 잃게 됐을 때 

우리는 또 다시 불안해진다. 

그때는 그 불안이라는 바람에 날개를 맡길 수밖에 없다. 

그 바람이 또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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