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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Feb 08. 2020

아, 지금은 꿈을 꾸는 때

달빛마저 없는 밤

밤공기 그리워 잠시 나왔더니 보름달이 떴다. 아, 맞다. 대보름이지.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넣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얘기가 나왔다. "엄마, 그 집 거실에서 보는 달이 참 커보였는데 그지." 부산 변두리 인기 없는 아파트 중 하나였지만, 거실에서 올려다 보면 신기하게도 달이 참 가깝게 느껴졌던 집이었다. 그 아파트는. 


자주 거실에 누워 살 통통한 저녁달을 올려다봤다. 사실, 쏘아 올려 본 적이 더 많다고 해야 맞겠다. 엄마의 저녁 짓는 소리를 들으며 무심결에 쳐다보면 달과 눈이 마주쳤다. 홱, 등 돌리고 누웠다가 다시 힐끔 쳐다보면 달은 꼼짝 않고 우리 집 거실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런 달의 눈길을 피해 누운 자리를 바꾸곤 했다. 항상 거슬렸다, 그 녀석은. 


달은, 매번 배신을 때렸다. 보름달 보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은 애초 세상에 없던 말이다. 달에게 소원 빌어라, 누가 그러면 달 보는 시늉만 해댔다. 명절날만 되면 동심 가득해지는, 선한 마음들에 흠집 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달 면상을 볼 때마다 나는 부아가 치밀었던 날이 많으니. ‘개뿔, 소원은 무슨.’ 


스무 평 남짓한 아파트는 엄마의 자랑이었다. 내 집 갖는 게 평생소원이셨는데, 어려운 형편에 대출을 많이 받아 집을 마련했다. 전셋집 돌며 주인 눈치 받고 사는 일은 40대 후반의 한 여자에게, 꿈을 갖게 했다. 작은 평수지만 층수도 좋은 7층에 볕도 좋다고, "이제 이 집이 내 평생 마지막 집이다" 하셨던 엄마. 


그 집 거실에서 오래 저녁달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갚지 못할 빚은 늘고 생활비 마련도 어려워진 부모님은 몇 년 살지도 못하고 다시 이사를 결심했다. 이제 좀 정착하고 오래 살려나 싶어서, 동생과 나는 드디어 한기 없는 집, 바깥보다 더 춥지 않은 집, 현관문 열고 들어오면 따뜻한 훈기가 살살 몸을 녹게 하는 집에서 살아 보나 싶어서. 마치 누군가 추운 퇴근길 고개 들어 도시 풍경을 감상할 때, 누군가 아파트 불빛들을 보며 다들 어떤 저녁을 맞을까 사색에 젖을 때, 그 풍경의 한 점이라도 된 것 마냥 기뻐서. 이제 다른 삶 좀 살 것 같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애당초 소원은, 소원일 뿐이었다. 


살림살이 다 빠져나간 빈집에서 “그래도 이 집에서 잘 살았다.” 목소리 젖은 인사를 하고 나오던 엄마가 가여워, 20대 초반의 마냥 어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아파트 앞에서 그녀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줬던 게 다였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어봐, 엄마"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래, 기억, 그 기억이라도 남기려고. 살았다는 기억. 그거라도 남겨 보자고. 


이사라면 징글징글하다. 잘 사는 것과 못 사는 것의 기준은, 이사를 몇 번 하느냐였다. 매번 이사하는 건 돈 없는 우리가 당첨이었다. 또 어디서 살 것인가, 막연히 초조한 생활. 2년 전 살던 그 집은 외풍이 너무 셌다든지, 그래서 동생과 등을 맞대고 체온을 나눠야 그나마 밤이 따뜻했다든지, 예전 그 집은 주인집 낡은 현관문 쇳소리가 늘 귀에 거슬렸다든지. 굳이 겪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을, 추억도 되지 않는 기억들을 주렁주렁 달고 살았다.


거주지를 열댓 번 넘게 옮긴 탓에, 짐 싸고 푸는 게 지겨운 노동이었다. 추억처럼 먹는다는, 이삿날 자장면도 지겨웠다. 남들은 외식으로 먹던 자장면, 우리는 이삿날이 외식하는 날이었다. 


달에 대한 불신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30대 초반까지, 지긋지긋하게 달빛은 밝았다. 


달과 이제는 화해를 해야겠구나, 싶은 계기가 나에게 찾아왔다. 우연히 듣게 된 드뷔시의 <달빛>.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곡을 알게 된 후였다. 좀 늦은 감 있게 듣게 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한, 아니 쓰다듬은 곡이라 표현하고 싶은 <달빛>을 듣고서는 더욱. 


그래, 뭐, 달도 억울한 면이 많았겠다, 겸연쩍었던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달빛을, 마음 편히 낭만적으로 감상했던 때가 있었나 싶었다. 은은하게, 아늑하게 밤을 달래는 달빛을, 나만 너무 미워하며 살았구나. 오랜 시간 꽁꽁 얼어만 있던 마음이 그제야 녹아내렸다. 



아, 지금은 꿈꾸는 때


별들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에서

크고 포근한

고요가 내려오는 듯


아득한 이 시간

(폴 베를렌, <하얀 달> 중에서)


폴 베를렌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드뷔시는 악보에 달빛을, 그렸다. 곡을 듣는 동안은 바람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 오직 하얀 달이 있고, 그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듣고 섰는 내가 있다. 드뷔시는, 고요한 그림 속에 나를 데려다 놓아줬다.  


달빛마저 없는 밤. 사는 게 꼭 그런 한밤중같이 캄캄하다 여겼던 시절. 내 인생에 낭만이라곤 없을 거라 장담했던 그때를 견뎌냈던 것은, 어쩌면 줄곧 밉도록 환하게 따라붙던 그 녀석 덕분은 아니었을까. 사는 일에 낙담할 게 아니라 달빛에 기대어 헛된 낭만이라도 꿈꿔 보라고, 줄곧 말하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서야 짐작해 본다. 


잠시 잊어볼 걸 그랬다.

달이 뜨는 밤에는. 

고요가 내려앉는 아득한 그 시간에. 

잠시라도, 생활을 내려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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