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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Apr 01. 2020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그가 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왜 달려야 할까? 왜 1등으로 들어가야 해?’ 

어쩌면 아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다섯 살 때 어린이집 체육대회에서 50m 달리기를 할 때였다. 출발-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각기 다양한 포즈로 달리기 시작했다. 걷는 아이도 있다. 출발선에서 멍 때리는 아이도 있고, 우는 아이도 있다. 달리다 엄마에게 가는 아이도 있다. 그야말로 재미난 구경이다. 제철음식처럼 인생에 그때 아니면 맛보기 힘든 장면들도 있는데, 이런 순간도 그때 아니면 즐기지 못하는 귀한 찰나이다. 



우리 아이가 달리는 순서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들이 난생처음으로 달리기 시합을(놀이라는 표현이 맞겠다)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아들은 그저 천진난만하다. 선생님이 “얘들아, 출발하면 저기까지 달려야 해”라는 말만 듣고 신이 나서 친구들 따라 달린다. 경쟁도, 싸움도, 승패도 없다. 


아이는, 예상대로 엄마 아빠를 향해 마치 산보 하듯이 손도 흔들며 결승점에 도착한다. 후하게 앞자리를 다 내어주고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웃는다. (물론 친구들도 필사적으로 뛰진 않았다) 1등을 해야 된다는 것도 모르고, 1등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달리라고 하니까, 친구들과 달리는 게 재밌어서 뛸 뿐이다. 지면서도 즐기는 달리기. 어른이 되고 우리 앞에 놓이는 크고 자잘한 전투들도 이렇게 즐길 수는 없을까?   


나 역시도 나이가 한자리 수였을 때, 가장 불만이 많았던 종목이 바로 100m 달리기였다. 1, 2등을 왜 가리는지. 왜 손등 위에 찍어주는 도장으로 달리기의 우열을 가리는지 납득하지 못한 채 참가를 했다. 그래서 항상 달리기에서 4등 아니면 5등이 내 자리였다. 


달리기를 예로 들었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싸워서 승리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친한 동료들과도 보이지 않는 성과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 속에서 능력이 부족해 자리를 뺏기기도 하고 누군가의 자리를 뺏기도 하는 사회. 부당한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하기 싫은 말과 힘든 시간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일도 있다. 각자의 전투에서, 애를 쓰며 승리를 해야 자리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 살아남는 시대니까. 


일을 할 때도 각을 세워야 하는 순간은 쉽지 않다. 매일 방송을 해야 하는 라디오 매체는 특히나 아이템 회의가 많다. 코너마다 어떤 주제로 갈 것인가부터 어떤 게스트, 어떤 인터뷰이를 정할 것인지 의견을 나누다 보면 팽팽한 밀당을 주고 받을 때가 많다. 그날 원고의 내용과 방향, 심지어 문장과 단어 하나 하나 깐깐하게 날을 세우는 피디를 만나면 작가 역시도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날을 세워 내 의견을 쟁취한 적도 있지만 '피디가 그 아이템을 낸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아이디어가 훨씬 더 좋을지 몰라' 한발 물러선 적도 많았는데. 기를 쓰고 이기려는 마음 앞에 ‘내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니까’ 라는 생각이 각을 깎아 뭉툭하게 해줄 때가 많았다. 


살면서 곧잘 졌다. 연애나 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지는 날이 많았다. 실력에서 지기도 했고 인맥에서 지기도 했고 경험에서 뒤쳐지기도 했다. 왜 인생은 내 편에 서지 않는가, 원망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돌아보면 인생은 나에게 패배의 쓴맛을 자주 먹였지만 사실 내 편에 서 있었다. 그 얄궂은 녀석은 이기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선물을 두고 간다. 계속 지다보면 지는 것에도 배움이 있었다. 



김민식 피디의 신작은 그래서 눈길이 많이 간다. 기존의 책에서 노조 활동 이야기를 짬짬이 들려주었지만 이번엔 제대로 작정하고 싸움의 기록을 담았다. 이제서야 빛을 보는 그 시간의 기록. 그가 비장하게 보여 주는 7년의 시간은 그전 책 보다 훨씬 묵직했다. 


그때의 그들과, 우리 모두의 이야기 


mbc 노조 활동을 하며 회사를 상대로 외롭고 긴 싸움을 해온 김민식 피디. mbc의 정상화를 위해서 걸어온 이야기는 그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의 이야기였다. 해고된 동료, 징계 받거나 타부서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본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또한 그런 mbc를 열렬히 응원하기도, 실망감에 외면하기도 했던 우리의 시간을 기록한 것이었다. 국민이 싸늘하게 등을 돌려도 그 찬 바람을 맞으며 꿋꿋이 싸워온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의 기록을 통해 만나게 됐다.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텐데도 

어떻게 그는 끝까지 그 시간을 버텨냈을까? 


스스로를 딴따라 피디라 명하지만 그런 그가 전투에 가담하고 오래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때문이다. 회사를 열렬히 사랑한 탓.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면 숨길 수 없듯이, 투쟁을 기록하면서도, 문장마다 애정이 뚝뚝 흘러 넘치는 게 티가 많이 난다. 그래서 더욱 바로 잡고자 희망했던 게 아니었을까. 시청자들이 mbc에서 등을 돌릴 때, 팟캐스트로 옮겨 갈 때도 지는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고 회사 정상화를 위해 지켜냈던 게 아니었을까. 늦었지만 그 모든 시간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해 달라는 남자. 그 싸움의 기록은 현재를 싸우는 많은 이들에게    


대박이 나면 명성을 얻고, 쪽박이 나면 경험을 얻는다.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게 인생이다. (130 p)



싸워야 할 때 달아나지 않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다. 

이기는 싸움만 하려고 들면 

승산이 없을 때마다 달아나게 된다. 

그렇게 도망 다니며 살면 

인생에서 배우는 게 없고 남는 게 없다.

지는 싸움에서 더 크게 얻는다.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131 p)



지는 날이 더 많은 우리 인생

싸우기 위해서는 애정이 필요하다. 애정이 없다면 싸우는 것도 의미가 없다. 바꾸고자 하는 노력,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싸움에서 지는 한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질기고 독하게, 하지만 신나게 그 과정을 유쾌하게 통과해 온 그의 이야기는 지는 날이 많은 우리에게 힘내라고 응원해 준다. 현실과 싸우며 현재를 정정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딴따라 같은 인생을 꿈꾸지만 실상 현실의 우리는 투사처럼 산다. 달려드는 세상을 향해 우아하게 반격하는 법, 그의 기록들이 깨알 힌트를 준다. 지는 싸움을 버리지 말고 들여다 보라고. 그 속에 당신의 혜안이 있다고 말이다. 버릴 게 없는 문장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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