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깨우는 문장
삶을 대하는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를 기점으로 바뀌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다. 2012년 가을, 정확히 9월 9일. 아버지가 곁을 떠났다.
그 한 해는 징글징글했다. 끝도 없이 세상이 딴죽을 걸어오는 듯했다. 인생 체력장이라도 시작된 것처럼 여러 가지 일들이 나를 시험하고자 달려들었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무조건 통과해야만 했다.
그해 봄이었다. 지금처럼 봄이 꽃소식을 전하던 4월, 아버지는 덜컥 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때 알았다. 힘든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것을. 삶은 준비할 겨를을 내어주지 않는다. 가족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마음 추스를 새도 없이 아버지의 병원생활에 모두의 일과가 맞혀졌다. 올해를 넘기지 못한다는 의사 말에 또 한 번 마음이 주저앉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 소식도 병상에서 투병하던 중에 들으셨다. 그리고 생전 처음 겪음 교통사고로 응급차에 올랐던 일부터, 그해 여름 유산으로 처음 찾아온 아이와의 아픈 이별. 무슨 종합세트처럼 불행은 연속으로 찾아왔다.
일과 병간호를, 엄마와 동생과 매일 나눠하며 보냈다. 몸과 마음이 쉴 새 없었다. 내달리는 기분으로 견뎠다. 사실 ‘견디다’라는 표현도 그때는 괴로웠다. 그 말로부터 도망가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누구보다 고독한 상황을 견디는 것은 아버지인데 간호하는 일을 견딘다고 말하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죄짓는 일이라 생각했다. 끝난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이별이기도 했으니까.
아버지가 떠나시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같이 연애하던 사람이 떠나거나 이직으로 동료와 헤어지는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녁까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맞추고 온기를 나누던 아버지.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당직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리고도 아버지 손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간이침대로 옮겨질 때도 누워 계시던 침대 시트는 여전히 아버지 체온이 남아 따뜻했다.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장의사가 올라왔고 그는 아버지를 덮고 있던 이불로 마치 포장을 하듯 싸맸다. 그리고 아버지는 병실을 떠나 추운 영안실로 이동했다. 죽는다는 일은 참 쓸쓸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무엇도 소용없는 일이고 그 누구도, 그 어떤 달콤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외롭고 처량하며 가엽게도, 그 모든 것이 혼자의 몫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는 한 줌 재로 남으셨다. 사라진다는 것은,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이렇게 한순간이구나.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내 일부 같았던 아버지를 보내고였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마음의 균열이 생겼고, 순간에 후회 없이 살자고 생각했다. 자식을 키우면서 딸에게 가르침을 많이 주시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때 떠나시면서 딸에게 큰 울림을 남기고 가신 게 아니었을까. 딸아, 아낌없이 살아라,라고.
(<하늘은 지붕 너머>, 폴 베를렌)
그때가 떠올랐던 건 폴 베를렌의 시를 읽던 중이었다. 다그치듯 묻는 저 냉혹한 질문은 일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후회하지 말고 살아라. 네 열정과 청춘을 아끼지 말고. 이루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고 살아라.’ 따끔하게 질책하는 문장. 파릇한 청춘을 쥐고서도 무능하게 사는 인생, 무기력함이 손목을 잡고 놓지 않을 때 번쩍 정신 차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김사인 시인은 베를렌의 시를 두고 다시금 아픈 질문을 던진다.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171p, 김사인)
입을 저절로 다물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저 물음 앞에서 다시 자신을 질책한다. 어제를 복기하고 반성하며 내일은 좀 더 나은 하루를 살자고. 애쓰는 매일,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때때로 제자리걸음이지만 그 반복도 하나의 기록이라면 멈추지 말고 계속할지니. 지금의 청춘을 낭비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