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투명하게, 날것으로 존재하라
2005년 9월, 그때도 한주 방송을 끝낸 주말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빌 때면 서점에 가는데 오규원 시인의 시집을 그해 가을에 샀다. 한동안 책을 사면 언제 샀는지 적어두던 버릇 때문에, 책마다 날짜가 기록된 게 많다. '2005년 9월 17일 토요일', 그 시집을 평소처럼 사들고 왔나 보다.
문예창작학과를 전공하는 동안 시인의 시들을 많이 접했다. 특히 그가 특별한 이유는, 그의 『현대시작법』이라는 책 때문이다. 그 책을 족히 열 번에 가깝도록 보고 또 보며 시를 파고들었던, 어떻게 보면 내게는 수학의 정석과도 같은 책이었다.
방송 일을 하며 시집 들여다볼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게 아쉬웠는데, 그때 오규원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서점에서 보자마자 고민도 없이 골라 왔던 모양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라는, ‘날이미지 시인’ 다운 군더더기 없는 제목의 시집.
그러다 다시 펼친 것이 2009년쯤이었을 것이다. 모서리 접어둔 페이지들을 다시 읽었다. 그때서야 궁금한 채 접어 뒀던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굳어진 시심이 다시 말랑해지는 기분과 함께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면 메일이라도 알 수 있으면 편지라도 써볼까, 생각했다. 만나게 되면, 혹시나 연이 닿게 되면 무엇을 물어볼지 곰곰이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양철 지붕과 봄비, 11p)
그렇게 마음먹고, 검색창에 시인의 최근 활동을 찾으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시인은 2년 전 작고하고 세상에 없었다. 왜 당연히 연락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때 알았다. 질문을 하고 싶어도 받아 줄 수 없는 일,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일도 이렇게 있다고. 그러다 후에 찾아본 유고시집에서 그 대답을 만나게 됐다. 2008년 출간된 『두두』라는 시집에서였다. 마치 답을 미리 주고 가신 것처럼.
사물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보려 노력한 오규원 선생의 시력(詩力)만을 시속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누군가의 생각을 쫓기보다 나의 사유를 살피는 것이 시인의 시를 읽는 예의였는데. 책을 읽으며 그 속에서 뭐든 하나라도 찾으려는 마음으로만 글을 대했던 건 아니었는지.
그의 시를 다시 만난다. 세 번째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는 일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할 수 있다면. 사람도 날것의 투명함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읽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있는 그대로 보고 사유하는 일은 아직 어렵기만 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