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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Apr 17. 2020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함

독서건망증, 지식은 하이패스처럼 지나간다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열리던 소규모 독서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만날 기회도 그 모임 덕분이었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후루룩 책을 읽고 부랴부랴 모임에 참석하는, 숨 가쁜 독서를 했다. 모임을 핑계 삼지 않으면 독서를 게을리할까 봐, 내심 조바심이 났던 듯했다. 다독보다 중요한 것은 정독인 것을 알면서도 시간에 쫓기듯 헐떡이며 독서를 한다. 그래서, 지식은 하이패스처럼 지나간다. 오래 머물지 않고.


몇 년 후, 책장에서 다시 꺼낸 그의 단편집은 기억을 표백이라도 한 듯, 생소하기만 하다.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대성당』을 기억하려고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줄 알고 독서기록도 해뒀는데, 그 기록한 파일도 위치를 알 길이 없다. 나는, 독서건망증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문장 하나, 하나 씹어 삼키려고 작정한 듯이. 단편 하나 읽는데도 며칠을 두고두고 읽었다. 옆에 두기만 하면 전송이라도 될 것처럼 손에 쥐고 다녔다. 머리맡에, 가방에, 차 안에, 점퍼 주머니 안에, 밥 먹는 식탁 위에. 손에 자주 만져지고 눈에 자주 읽히면 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편견의 눈으로 보는 세상, 우리의 협소한 시선  

다시 읽은 대성당은 내가 알고 있다 믿는 것들을 돌아보게 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 의심할 필요 없을 만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이 그렇고. 책을 보고 얻은 정보가 그렇다. 책을 읽은 것으로 그것을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그렇다. 가깝기 때문에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나의 잣대에 맞춰서 상대를 판단한다. 하지만 진짜 나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일까?


어느 날 찾아온 아내의 맹인 친구와 눈을 감고 손을 포개어 대성당을 함께 그리며 교감하게 되는 이야기, 『대성당』. 화자는 처음에는 맹인에 대해 달갑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맹인'이라는 막연한 편견으로 시니컬하게 대하는 그의 어투와 생각은 세상을 협소하게 보는 우리의 시선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맹인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아는 세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건 알겠어.” 그가 말했다. “물론 저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거야. 한 집안이 대대로 대성당 하나에 매달린다는 것도 알겠어. 이것도 방금 저 사람에게 들은 거고.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방자함

TV 속 대성당을 맹인에게 설명하려다 어려움을 느낀다. 한 번도 대성당을 본 적 없는 맹인에게 그 형체를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 대상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대성당 하나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어 막막한 화자를 통해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게 진짜 아는 것일까?' '우리가 보는 것이 진짜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는 것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알고 있지만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맹인과 손을 포개고 대성당을 함께 그려 보는 교감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 보고 믿어 왔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글의 수심을 가늠할 때

방송은 기본적으로 다양하게 알아야 좋다. 아는 것이 많아야 창의적인 아이템도 불쑥불쑥 솟아난다. 그런 점에서 많이 안다고 생각다. 사실, 아는 척을 더 많이 했던 날도 있었다. 아는 척을 좀 해야 섭외도 가능하고 때깔 나는 질문도 던질 수 있고 풍성한 글발도 받쳐 준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얕게 알고 쓰다 보면 다 드러난다. 알맹이가 없다. 언젠가 그 얕음이 들통날까 싶어 조마조마하던 때도 있었다. 꾸준히 나의 글을 쓰고자 마음먹고 난 후부터도 잠시 써지지 않던 때가 있었다. 쓰기가 싫은 게 아니라 수심이 금방 가늠될까 싶은 불안. 누군가에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얕은 지식이 들통날까 싶었던 거였다.

                  

“우리들이 쓰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전적이다”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히기도 하는 레이먼드 카버. 그는 제재소 목공, 병원 수위, 교과서 편집자, 도서관 사서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글을 쓰는 작업만이 그를 자유롭게 했다. 밥벌이를 위한 고된 인생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들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보고 듣고 사유한 순간들이 모여 글에 묻어난다. 그래서 글은, 카버의 말처럼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글, 자신을 드러내는 통로

그러다 보니 더 풍성해야 될 것 같고 더 고급져야 할 것 같고 아는 게 많은 척해야 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숨 가쁜 독서를 하고 앎의 폭식을 하고, 그러다 또 지식은 스쳐 지나간다. 이런 조바심에서 벗어나려면 잠시 글을 멈추고 속도를 조절할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허세를 버릴 필요가 있다.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고 담백하게 쓸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본 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그 믿음에서 벗어나기.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어서 어쩌면 우리는 좀 덜 행복한 오늘을 살고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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