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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Apr 06. 2020

좋아하는 일에 대한 실례

실례를 많이 범했습니다

“방송작가입니다”

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글이 매일 써져요?”라는 질문이 있고. 또 하나는 “좋아하는 일 해서 부러워요.”라는 말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때마다 '아, 그래,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라고 다시 동기부여를 해보게 된다. 감사하게도. 


“당신은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잖아.” 

남편 또한 나를 샘나도록 부러워하는 일이 바로 그 점이다. ‘좋아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고 있다는 것. 돈벌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업무를 견디며 직장생활을 해온 남편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러운 직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좋아하는 일을 집까지 들고 와서 (심지어 밤샘 작업까지) 하고 있을 때는 딱하게 쳐다볼 때도 많다. 


사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게 일이 될 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일반 직장인들과 다름없는 내적 갈등을 할 수밖에 없다. 작가 생활하는 내내 ‘이 일이 과연 내 일인가.’라는 질문을 숱하게 많이 던져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질문이 많이 성장하게 했지만) 글 좀 써 봤다고 마치 재능이 엄청난 것처럼, 타고난 것처럼 으스대며 우쭐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작 방송 세계는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혹독했다. “너 글 좀 쓰는구나?”라는 후한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냉정했다.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청취자의 문자 반응을 통해 그날 방송을 복기하며 피디와 날카로운 평가를 나눠야 했다. 다음 방송의 글감을 찾고 초 단위로 숱하게 올라오는 정보들 사이에서 아이템을 찾는다. 글을 엎었다가 다시 쓰길 여러 번, 신입 때는 오프닝 한 장 쓰려고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작가 선배들에게, 피디들에게, 연차 높은 디제이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정말 일만 보며 살았다. 퇴짜 맞는 일은 일상이었고 그때마다 괴로웠다. 하지만 그때마다 오기가 작동했다. 인정받는 날까지 견뎌 보자,라고. 그리고 해내고야 말겠다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코앞에 다가온 일을 쳐내느라 내적으로는 여유가 참 없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빠르게 몰려오는 일감처럼 진땀을 빼며 하루를 몽땅 방송에 쏟아부었다. 여행도, 공부도, 모두 뒷전으로 미루고 살았다. 부산 민영방송에서 시작한 작가 생활. 그렇게 방송의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내며 작가의 키를 조금씩 키웠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경력은, 다른 일들을 마구 밀어냈다. 방송하느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뒷전으로 멀찌감치 밀어 두기만 했다. 


가족과 시간을 나누는 일, 특히 지금도 후회하는, 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드리는 일, 일요일 낮이면 만사 제쳐두고 전국 노래자랑을 보는 어머니 곁에 누워 보는 일, 진짜 나의 글을 써보는 일, 작가로서 더 많은 경험을 배우는 일. 짬을 내서 할 수도 있었던 일을, 많은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뤘다.  


한가해지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실례다.

('어제까지의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라', 나카타니 아키히로)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작가이자 배우, 연출가, 강연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출판 기록이 매번 화제가 됐는데 스물아홉 살에 첫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그의 저서는 800권에 가깝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만큼의 책을 읽는 일도 쉽지 않은데 수백 권의 글을 써냈다니. 그 힘은 어쩌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덕분 아니었을까.  



유보하지 않는 오늘을 살기를.


그의 말대로 나 역시 실례를 많이 범했다.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인생의 우선순위에 나는 무엇을 두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일 그만 두면, 여유 생기면 그때'라는 말로 유보하기에 인생이라는 녀석은 그리 후덕하지 않다. 절대 기다려 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일단 쓰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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