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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May 27. 2021

연명치료를 두려워하는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그대에게

시부모님의 40여 년 결혼생활 썰 푼다.

1978년 겨울 , 작은 시골마을 우체국

26살인 그 당시 노처녀 대열에 막 합류하게 될 위기에 있던 전화 교환원인 여자는

24살의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똑똑하고, 사람들과 금세 두루 친해지는 호방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고등학교 때 연고대에 둘 다 합격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셋째형이 그즈음 사업한다고 집안 재산을 다 말아먹은 상태라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우체국 공무원이 되어

어린 나이에도 꽤 높은 직급에 올라 그녀의 상관으로 전근을 왔더랬다.


둘은 그 당시 드문 사내 연애를 했고,

이듬해 결혼했고,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내 남편이다.


연애할 때의 남자의 장점은 결혼하고 나서 모두 단점으로 변해버렸다.

집안에서 제일 똑똑하고 안정된 월급이 나오는 남자에게

사업한다는 셋째 형이 막내인 그의 명의로 빚을 내달라 해서

결혼하자마자 10만 8천 원인 월급과 5만 원은 빚을 내어 빼앗기는 수모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출산휴가, 육아휴직이란 개념조차 없어 아이를 낳으면 일을 그만두어야 했기에

여자는 아이 낳기 직전까지 직장에 다니다가 막달이 돼서야 일을 그만두었다.

입덧이 심해 더 일찍 그만두고 싶었으나

남자의 월급은 모조리 시댁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기에 살려면 여자의 월급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자의 퇴직금까지 셋째형의 사업자금으로 빌려달라는 말에

이 돈만은 안된다고, 곧 아이도 태어나는데, 남편 월급 고스란히 빼앗기고 지금까지 내 월급으로 살아왔는데 퇴직금도 가져가면 우리 뭐 먹고 사냐고 말했다가,

시댁 식구들이 '독한 년'이 집안에 들어왔다며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남자의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리는 성격 탓에

여자는 첫 아이를 낳을 때도 혼자여야 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이 아직 휴일일 때,

그날따라 느낌이 이상해 남자에게 "오늘 약속 취소하고 집에 있어줘요."라고 해도

남자는 굳이 낚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나갔더랬다.


2년 뒤 딸아이가 태어나고, 4년 뒤 셋째를 임신했을 때,

딸아이가 많이 아팠다.


시골 병원에선 감기라고 했지만,

밤이 깊을수록 손끝 발끝이 새파래지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죽음의 문턱에 있는 딸아이를

여자는 큰 병원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남자를 찾았으나,

남자는 술에 취해 운전을 할 상태가 못 되어

차로 2시간 거리에 사는 택시 운전기사인 제부를 불러야 했다.


패혈증이던 딸아이를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키고

여자는 막내를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딸 병간호를 해야 했다.

그 딸아이가 지금의 내 시누이고,

시누는 그때 수술로 오른쪽 팔에 아직도 깊은 흉터가 있다.

오른 팔이 아직도 불편해서 왼손잡이가 되어야 했는데

타고나길 왼손잡이인 아이들과 다르게 사고로 왼손을 쓰면, 아무리 노력해도 오른손처럼 자유자재로 쓰기 힘들단다.

시누는 "옛날엔 반팔도 못 입고 다녔는데 뭐하러 그랬는지. 이렇게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자랑하고 다녀야 하는 데 말이죠"라고 이젠 자신의 흉터도 너그럽게 드러낼 줄 아는 훌륭한 어른으로 자랐다.


남자는 계속해서 형님의 사업자금을 위한 대출금의 늪에 빠져있다가, 그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더 이상의 빚이 늘지 않았다.


잠깐의 호시절이 왔다.

남자가 투자한 부동산, 주식은 모두 다 천정부지로 올랐다.

여자는 결혼 10년 동안의 고생이 이제야 보상받는구나 싶어 남자가 더 술자리가 잦아지고, 또 대출을 해서 주식을 사느라 빚을 졌어도 모든 것에 관대해졌더랬다.


하지만 IMF가 왔고,

 남자가 가장 많이 사두었던 통신사 KTF(016)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그 당시 남자의 월급이 거의 전부 종합부동산세로 들어갈 만큼의 많았던 부동산은 경매로 넘어가고,

남자는 원래 고혈압이 있었는데, 풍파에 급기야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의 나이 44세. 큰아들이 20세. 딸 18세. 막내아들 16세 때의 일이다.


시동생은 중학교 3학 때 집안이 폭삭 망해서 산비탈에 있는 쓰러져가는 집으로 자기 옷가지를 싼 보자기를 들고 갔던 기억을 이젠 웃으며 얘기할 만큼 여유 있는 어른으로 컸다.


남자는 자신이 돈을 잘 벌 때는 벌떼처럼 달라붙어 술이며 밥을 얻어먹던 사람들이, 자기가 쓰러지자마자 연락이 끊기는 수모를 겪으며

삶의 끈을 놓는 대신, 악으로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뇌졸중의 후유증은 남자를 3급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직장에서 나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다시 한번 부동산을 사고팔며 고려대, 경희대 다니는 아들들이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하고도 대학원까지 다니도록 학비를 댔다.


남자는 그 후에도 주식을 계속 사고팔아보셨으나 90년대 중반의 그 호시절은 오지 않고, 2020년 3월 대폭락장에서 반등하는 기회도 놓치는 등 그에게 큰돈을 버는 기회는 다신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의 다양한 노환과 뇌졸중의 후유증은 계속되었다.

고혈압, 당뇨, 심장 주변 혈관이 막혀 스텐트 시술을 10여 년간 차례차례 5개를 꼈다.


스텐트 시술은 혈관 확장술로 혈관 속에 '스텐트'라는 스프링을 끼워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인데,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고 할 만큼

전신마취를 하긴 하지만 1시간 정도의 시술과 하루정도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면 되는 간단한 치료다.


지난주 일요일도 저 간단한 시술을 생각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월요일, 담당교수가 시술을 집도했는데 4시간이 지나도 나오질 않았다.


여자는 대기실에서 레지던트로 보이는 수술 보조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길 3차례 정도 반복하자 붙잡고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때부터 여자는 흔들리는 의사의 눈빛에서 뭔가를 감지했다.


교수가 나오더니 개복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자는 갈비뼈를 다 벌려놓고 심장 근처의 정맥을 얼마 잘라다가, 동맥에 붙이는 대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10여 년간 남편을 봐 온 교수가

'사람은 살려보고 그다음을 생각해야지 않겠어요'란 말에 믿고

수술동의서에 사인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사인한 무수한 서류에서 여자가 생각나는 문구라곤

 '환자가 사망 시에도 본 병원과 의료진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이었다.


8시간의 긴 수술이 끝나고

남편과 시어머니는 새벽에야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눈을 붙일까 말까 하고 면회 시간이라는 오전 10시 반에 맞춰 다시 병원에 가니

팔다리를 묶어놓고

팔에 수면제와 진통제, 영양제 등등 링거 줄이 4~5개가 이어진 바늘이 꽂혀있고,

입은 산소 공급을 위한 삽관이 되어 있는 시아버지를 봤다.


짧은 면회시간에도 시아버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의식은 없지만 수술부위 통증이 심해서일 거라고 했다.

삽관을 한 입술과 입안이 이미 헐고 있었다.


면회  수술을 함께 담당한 흉부외과 의사가 툭 까놓고 얘기하자며 2주정도만 남았다고 했다.

심장이식을 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식을 할 수 있는 심장을 찾는 것도 힘들고,

맞는 심장이 나온다 해도 그 큰 수술을 다시 환자가 받을만한 체력이 있는가에 대한 것도 확신이 들지 않고

무엇보다 30,40대에 사고로 들어와 심장이식만 하면 벌떡 일어날 수 있는 환자가 순번에서 밀려

시아버지 같은 약한 환자에게 심장이 갔는데,

혹시 수술이 잘못될 경우, 그 아까운 심장을 하나 버리게 된다면 인명피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며

이식대상자 명단에 올릴 필요도 없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틀 후 심장외과의로 담당의사가 바뀌며

뇌 손상이 없고, 다른 장기도 깨끗한 편이라며 이식 대상자 명단에 올리라고 종용받는데

마침 코마 상태에 빠졌던 시아버지가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셨다.

손주들 근황을 말씀드리니 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눈물까지 흘리시는 등 의식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남편은

이식대상자 명단에 사인을 했다.


심장이식 수술은 1억이 드는데,

의료보험과 문재인 정권 이후 중증치료 환자의 부담비용이 5%로 제한되기에 약 2천만 원 정도로 예상된다고 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에 이식대상자 신청을 하는데

시어머니는 천운이 닿아 이식수술을 한다해도 재활에 시간이 걸리거나 누워만 있는 사람 병수발이 길어지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

심장이식은 성공하면 걸어나가지만. 실패하면 소천하시는거라며 암환자와는 달리 "심플"하단다.

그 말에 시어머니는 흔쾌히 이식대상자 명단에 사인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도 남편이 속상해하는 게 그 이식대상자 명단에 올리지 말걸,

괜히 명단에 올리려 조직 검사며 기타 등등의 다양한 검사를 하느라 또 시아버지가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해 마음 아파한다.


2일 후 밤 10시쯤 병원 측에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고,

멀리 사는 시동생까지 불러 12시쯤 병원에 도착하니 모든 가족들을 입회시켜주었.


그때 시아버지의 팔에 꽂혀있는 건 수면제, 진통제, 영양제뿐만 아니라

O형 피주머니가 4~5개는 걸려서 수혈까지 하며 10개 이상의 수액 봉지들과 수많은 바늘이 꽂힌 채

피부가 파랗고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새벽 2시쯤 또 위기가 와서 다시 가족들이 가봤을 때 시아버지는 마약성 진통제 종류를 바꿔 달고 무슨 처치를 했는지 혈흔을 닦은 흔적이 많고 여전히 파랗게 점점 부풀어 올라 이젠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새벽 5시 47분.


의료진이 다시 들어오라고 했을 땐 시아버지에게서 모든 링거병들과 주삿바늘은 빼어있었고, 맥박을 잡은 기구만 손가락 끝에 걸려 있었다

수혈을 안 하니 부기는 좀 빠졌지만 여전히 푸르른 얼굴빛으로 운명하셨다.


시어머니는 돈 때문에 평생 불안해하며 살았으니 이제 돈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며 시아버지의 퉁퉁 부은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우셨다.


그렇게 두 분의 42년간의 인연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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