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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Jul 08. 2021

1978년에 2살 연하와 결혼해서 삼 남매를 키운 삶

68세에 남편을 보낸 내 시어머니의 삶

1960년 용자가 7살 때, 아버지를 처음 봤다.


벌써 한 달 전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네 집에 가서 살게 됐다며, 짐을 싸고 이사 준비로 분주했고,

그 날 아침엔 정성스레 머리를 쫑쫑 따주시고 새로 산 원피스를 용자에게 입혀주셨다.


"인사해야지" 어머니는 용자의 머리를 눌러 억지로 아버지께 머리를 수그리게 하였다.


아버지는 용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고, 옆엔 키가 껑충한 중학생 오빠가 있었다.


용자에게 아버지도 생기고, 오빠도 생겨서 좋은 일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지만,

용자는 자꾸 어머니 뒤로 숨고 싶어 졌다.


어른들 앞에서 노래도 잘하고, 활달했던 용자는 그날부터 수줍음을 타고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말을 잘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1929년생의 용자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여고까지 나온 엘리트다.


그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 바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용자의 어머니는 선생님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사변이 났고,

먼 친척의 집으로 잠시 피난을 갔다가

근무하던 학교가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천안으로 왔는데

학교는 반파되어 운동장에 천막을 쳐놓고 수업을 해야 했다.


문제는 화장실.

구덩이를 파 거적데기로 가림막만 설치해놨는데

용자의 어머니가 화장실을 쓸 때마다 옆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자신을 훔쳐본다는 생각에 소변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려 고생하셨고, 급성 신장염으로 번져 병원에 입원하면서 자연스레 교사 일을 그만두셨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6.25 전쟁 중에도 일반인이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 외삼촌의 권유로 법원에 직장을 다시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직장 상사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하면서 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외향적인 용자 어머니는 용자를 키우면서 산후우울증을 앓은 듯하다.

(그 당시는 산후우울증이라는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고, 우리 시어머니(용자)도 할머님께서 당신을 낳고 키우셨을 때 모습을 알 수 없으나

시어머니께서 당신 어머님의 옛날 얘기를 듣다 보면 그때 이 냥반이 우울증이 좀 있으셨나 보다, 란 생각이 들으셨단다.)


남편은 시간 날 때마다 강으로 바다로 낚시를 다니며 집안일에 소홀한 사람이었고

용자 어머니는 아기와 집에만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하다가 이혼을 하게 됐다.

용자가 두 돌이 갓 지난 1956년이었다.


그리고 용자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용자의 어머니는 재혼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법무사로 천안 외곽 시골마을에서 그 근처 동리 모든 법적 사항은 모두 그분을 통해 해결을 하니 돈도 많이 벌고,

아들을 낳다가 아내가 병으로 사망하게 되어 애도 하나만 딸려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혼처가 없다는 중매쟁이의 얘기에도

용자의 어머니는 딱히 내키지 않았으나 주변의 권유로 선 자리에 나갔고

그렇게 재혼이 성사가 되었다.


하지만 중매쟁이의 얘기는 조금 틀린 것이

법무사의 아내는 셋째 아들을 낳다가 사망한 것이기에 애가 셋 딸린 홀아비였고,

천안 시내가 아니라 굳이 시골에 법무사 사무실을 차린 것도 천안 시내에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고향에 가면 일감을 주지 않을까 해서 내려간 거지만 거기서도 벌이가 그다지 시원찮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재혼한 남자는 자신의 아이들과 용자를 차별하지 않았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는 성실한 남자였기에

용자의 어머니는 재혼하고 2남 2녀를 더 낳으며 남편이 돌아가신 2001년까지 40년 넘게 해로하셨다.





용자는 천안 시내에서 살다가 갑자기 '입장'이라는 천안 근교의 시골로 이사와 적응하기 힘들었다.


국민학교 교실 안 56명 중에 머릿니가 없는 건 용자 하나뿐이었다.


용자는 어머니께 천안 집으로 돌아가자고 매일 밤 졸랐고,

어머니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만 학교를 빠질 수 없으니 여름방학 때까지만 있어보자 달래고, 여름방학이 지나면 또 추석 때 가자고 달래셨다 한다.

(할머님의 지혜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만 말하라고 윽박지르거나 혼내실 수도 있었을 텐데,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키우셨다 한다.)


1964년, 용자가 겨우겨우 시골 생활에 적응될 때쯤

갑자기 천안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아버지의 법무사 사무실 운영이 너무 힘들어져 천안에 있는 다른 법무사 사무실로 월급쟁이 법무사로 취업을 하시게 된 것이다.

집안 형편이야 어찌 되었든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용자는 천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 자체에 기뻤다.


천안으로 이사 올 당시 용자 나이 11살, 이미 용자의 여동생들이 둘이나 태어났고, 엄마의 뱃속에는 아들이 있는 상태였다.

용자는 공부도 곧잘 잘했고, 나름 천안에서 명문인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와 바로 체신국(지금의 우체국)에 공무원으로 입사했다.


1970년대 초중반만 해도 우리나라 통신수단인 전화가 거의 없었고,

전화도 전화 교환수를 통해 연결이 되었는데

용자가 처음 맡은 일이 바로 전화 교환수였다.

전화가 연결되면 발신자가 원하는 수신자에게 단자를 꽂아 연결하고, 요금을 계산해야 하는데

일이 꽤나 까다로웠던 데다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일하다 보니 재미도 없었다.


그러다 재밌는 남자를 만났고, 연애도 재미나게 한 뒤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뒀다.


용자는 이 남자와 결혼하면 매일 이렇게 재밌겠거니 싶었는데

술 잘 먹고, 친구들 좋아하는 남자는 연인이었을 땐 그토록 용자를 재밌게 해 주었건만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되고, 애아빠가 되면서 용자를 외롭게 했다.


그래도 용자는 꿋꿋이 삼 남매를 잘 길러냈고,

엄마는 같지만 아빠가 다른 여동생 둘, 남동생 둘과도 늘 사이가 돈독해

같이 해외여행도 다니며 인생이 재밌을 때도 많았다.


셋째 시아주버님이 돈 문제로 힘들게 했지만

그래도 똑똑한 남편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IMF 때 용자의 남편의 투자에 큰 문제가 생겼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에 이르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반신불수로 평생 못 일어난다고 했다.

용자 나이 46, 남편 나이 44였다.

용자는 절망할 틈이 없었다.

이제 갓 대학 입학한 큰아들, 아직 고등학생인 딸, 중학생인 아들이 있었다.


식당에 나가고, 틈틈이 마늘을 까고, 자기 명의로 된 조그만 땅에 지렁이 농장을 운영하며 돈 되는 일은 뭐든 하면서도

남편이 퇴원하며 3급 장애인이 되었고, 또 언제든 간병할 일이 생길까 '요양보호사'자격증까지 따놨다.


40대 중반에서 50대까지 약 15년 간 오로지 돈, 돈, 하면서 아껴 아껴 살고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고 차례차례 결혼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남편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관리를 해서 큰 탈 없이 생활했기에

용자의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장롱에서 잠자게 되었다.


이제야 돈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제서야가족들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좋은 거 보고, 남편과도 여행이나 다니며 살 줄 알았는데


2021년 봄, 남편은  쉬기 힘들어진다고 하더니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집에 있던 용자는

이전부터 소일거리도 하고 친구도 사귀었던  복지센터에서 요양보호사로서의 일자리를 알아봐 줄 테니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 정신없으니 나중에 나가겠다고 했으나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아준다고

과부가 많은 복지센터 아주머니들은 용자 집 앞까지 찾아와

혼자 집에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떠오르고 이럴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며 끝끝내 용자를 끄집어냈다.


용자는 잘 모르는 복잡한 등록들을

친구들은 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쉽게 끝내고

그날 바로 취업하게 되었다. 

용자는 요즘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산다.





시아버지의 49재다.

아버님 영정사진과 위패를 모신 절에 가는 길에 어머님과 같이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제 진짜 아버님 하늘로 보내드리는 거네요." 하자

어머님이 잠시 숨을 멈추셨다가 하시는 말씀이

"평생을 나 외롭게 하더니 죽어서도 외롭게 한다." 고 하신다.


사랑이 뭐 거창한 것인가.

어쩌면 지리해보이는 우리들의 삶은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갖가지 모습으로 박혀있기에

그래서 죽을 것이 뻔한 삶을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노력도 해가며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장마철이라 요며칠 비가 계속 왔는데 오늘만은 하늘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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