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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Jun 30. 2021

빚을 탕감해주는 법도 개인 빚은 없애주지 못한다.

한정상속으로 금융권 대출은 안 갚아도 되지만 개인적으로 빌린 돈은...

공인중개사인 시아버지께서는 종종 내게 땅을 사라고 권해 오셨다. 게다가 항상 신랑 몰래.


첫 제안은 결혼한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300평을 천만원에 사라고 하신 것으로 시작되었다.

신랑과 상의해야 한다고 하니, 이런 매물 놓치면 후회한다며 신랑 모르게 얼른 계약금 입금부터 하라고 하셨다.


부동산을 사본 적이 없는 나로선 괜스레 겁이 나서 우물쭈물했지만,

땅을 사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 필요한 줄 알았는데 

천만 원 남짓으로로 몇 백 평의 큰 땅을 소유할 수 있는데다

얼마 안 있으면 소방도로가 나서 그 땅이 수십 배로 오른다고 하니 말 그대로 "뽕 맞은 듯 취해"버렸다.

천만 원 쓰면 몇 억의 돈이 공짜로 굴러들어 올 것 같은 황홀감. 아니 확신!


마침 결혼 전에 모은 돈이 좀 남아있었다.

 '내 돈'이니 굳이 신랑한테 허락 맡을 필요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 계약금을 내려했는데


금융지식이 없던 나로선 그때까지만 해도 큰돈을 한꺼번에 예금으로 묶어 놔서 예금을 깨고 시아버지께 이체해드려야 했기에 전화통화할 때 이미 4시가 넘은 시각인지라 다음날 은행에 들러 예금 해약 후 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에 이 일을 신랑에게 얘기했더니, 

별안간에 웬 땅 타령이냐고 신랑이 버럭 화부터 내기에

내 돈 내가 투자하겠다는데 왜 신경질이냐고 첫 부부싸움을 했더랬다.


신랑은 딱히 반대하는 이유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사지 말란 말만 반복했고

난 그까짓 땅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여전히 부동산을 소유한 경험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데다

내가 그 땅을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큰돈을 쓰는 것도 찜찜해서

다음 날 시아버지께 못 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후에도 몇 번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또 한 번은 8억 정도 되는 지하 1층, 지상 4층 꼬마 건물인데, 

내가 그 당시 학원을 운영 중이었으니, 꼬박꼬박 월세로 130만 원씩 나가고 있던 상황인지라

그 건물을 매입해서 그 건물로 학원을 이전해서 월세도 아끼고,

그 건물에 있는 점포들이 깔아놓은 보증금 빼면 3억 정도만 현금이 있으면 되니 대출을 좀 끼고 사면

다른 점포들에게서 나오는 월세로 은행이자 내고도 남을 거라고.

건물 부자가 급전이 필요해서 쉬쉬하며 아는 사람 몇몇한테만 얘기한 거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시아버지께서 은밀하게 얘기하셨다.


난 정말 혹했다. 

그리고 그때 그 건물을 샀으면 지금 꽤 많이 올랐으니 좋은 투자였으리라.

하지만 그 당시 시어머니께서 "당신이 평생 빚에 쪼들려 살더니 애들까지 빚쟁이로 만들려 그러냐! 적게 먹고 적게 싸면서 살게 내버려두어라"라시며 극구 반대하셨고

신랑 또한 "1층 편의점 빠지고 지금 몇 달을 떠돌이 장사치들이 쓰면서 건물이 망가지고 있는데 뭣하러 제 값을 주고 사. 그리고 건물 입구가 길 쪽으로 나있어야지 구석에 있어서 영 못쓰겠어. 주차장이 너무 좁아서 값 안 오른다니까." 라며 자꾸 사지 말아야 할 핑계를 댔고

또 무산되었다.


신랑은 워낙 싫은 소리 자체를 못하고 서로 불편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타입이다.

티브이에서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나 후원을 요청하는 단체들의 영상들도 못 볼 정도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부들이 각자의 가정에서 흠이 될만한 일을 얘기하지 않듯

신랑에게 있어 꺼내지 않는 말이 시아버지의 '신용'도에 관한 것이었다.


'신용'이란 믿음과 유사어로 저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가, 거짓말쟁이인가, 의 판단 기준이 되는 말 같지만,

법적 용어로는 '돈'과 관련되어 있다.

저 사람이 '돈을 꾸고 갚을 능력이 있는가'가 '신용도'의 기준이라 하겠다.


시아버지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지만


신랑이 성인이 된 해 1998년부터 신용도가 바닥으로 내려갔고, 

그곳이 끝인 줄 알았던 신용도는 몇 년 후 지하 17층까지 뚫고 내려갈 만큼 더 낮아져 파산신청까지 해야 했다.


시아버지 성격 상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투자를 하실 분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제1 금융권, 제2 금융권에서 빌린 돈을 못 갚자, 

길바닥에 뿌려져 있는 '일수' '당일 대출'과 같은 명함에 연결된 사채에서도 돈을 빌렸고,

신랑이 대학원 졸업 후 대체복무로 일하면서 100만 원의 월급을 받을 때부터 모은 돈을 관리해준다는 명목으로 모두 투자금으로 썼고,

이혼하고 혼자 사는 조카에게도, 살아계신 둘째 형님, 막내 누나에게서도, 같은 아파트 6층에 사는 아파트 청소해서 돈 버는 아주머니에게서도

몇 백부터 몇 천에 이르기까지 빚을 얻어 써서 투자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혼할 때 신랑이 마련한 8천만 원짜리 25년 가까이 되는 아파트는 

신랑이 그동안 내 월급 모아놓은 게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자

둘째 형에게 고향에 있는 본인 몫의 땅 값을 달라고 해서 겨우 받은 돈으로 산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신랑이 얘길 안 해주니 난 알 수 없었고,

결혼 한 지 5년이 지나서 내게도 100만 원, 500만 원씩 돈을 빌려가는 시아버지를 보며 그때서야 이런 과거를 시누이와 시어머니 입을 통해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시댁 가족들은 시아버지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조차 하질 않고 무조건 반대한 이유가 그동안의 세월 속에서 추락만 해온 시아버지의 신용도 때문이었다.


내가 시아버지께 빌려드린 돈도, 용돈으로 드린 돈이다 생각하고 

시아버지의 개인빚도 조금 걱정은 되지만, 신랑이 신경끄라고, 아버님이 알아서 하실거란 말에  

잊고 살고 있었는데


시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신랑은 '한정상속' 서류를 준비하면서 시아버지께서 진 빚을 법적으로 탕감했지만

시아버지께서 개인적으로 진 빚을 받으러 오는 분들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연자실해졌다.


자식이 부모의 빚을 대신 갚아 줄 의무는 없다.

만약 빚 받으러 집 앞으로 와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경찰을 불러 쫓을 권리가 유족에게 있다.


하지만 시어머니 혼자 계신 아파트에 매일 같이 찾아와 문을 쿵쿵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랑은 걱정되고, 그런 일의 싹을 없애야 했다.


한 명, 한 명 만나 뵙고, 차용증이 있는지, 법대로 하면 내가 갚을 의무는 없으나 도의상 처리하는 것이니 양해해달라는 말과, 법무사님을 만나 뵙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상의하고, 통화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시아버지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법적 '한정상속'도 마무리되어 금융권에 진 빚도 탕감했고,

법과 멀리 있는 '개인 빚'도 삼 남매가 갹출해서 어느 정도 갚고, 

다행히 소송으로 가질 않고 합의로 마무리가 되었다.


'돈'은 '법'의 보호를 받는 범위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시아버지 지갑 속 로또는 언제나 그렇듯 5천원도 되질 않았고,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영정사진 속 시아버지는 여전히 겨울 정장을 입고 웃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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