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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홋카이도 갈래요?

2화. ‘일주’라는 사람

by teaterrace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는 표현이 제일 적당할 것 같다.


결혼 전 한참 방황하던 시기, 무턱대고 끊은 비행기가 데려다준 곳이 홋카이도였다. 생각해 보면 홋카이도는 인연을 만들어 주는 땅인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공항에서 같은 일정의 여성을 만나 잠시 함께 여행을 했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홋카이도에 왔던 그녀는, 짧지만 기억에 남는 인연이었다.

그 시기를 건너서 결혼을 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근사한 곳에 함께 갈 가족이 생겼고 지난 겨울 실행에 옮겼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열흘은 행복했지만, 세심해야 했다. 종종 닥치는 위기들이 있었고, 부모로서 힘을 합쳐 어떻게든 헤쳐 나갔다. 휴게소에 핸드폰을 두고 온다든지, 고속버스 안에서 아이가 급 설사를 해야했다던지 하는 일들이 불쑥불쑥 생겨났다. 그때마다 또는 그 후에 도움을 구하는 글이나 후기를 쓰던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서 줄곧 나의 글에 휴게소 위치를 알려준다거나,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갔다는 류의 격려를 주로 남기는 이가 있었다. 그의 닉네임이 바로 ‘홋카이도 일주’.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했다.


아이는 어른 같이, 엄마는 소녀 같이, 아빠는 아들 친구같이. 3인 가족 친구같이 여행 즐기는 모습이 넘 보기 좋습니다. 버스 안 헤프닝, 분실 사고, 사고 수습 후 일정 마무리도 지혜롭게 잘 대처하시는 것 같아 한 수 배웁니다.


추측건대 그는 남자였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인생을 달관한 여유로움도 느껴져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하소연하고 싶은 매력을 가진 어른이었다. 자신도 이런 어른이 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원은 일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아이와 함께하는 ‘한 달의 무작정 여행’을 시작하는 참이었다.

한 달의 여행을 고민할 때, 다시 한번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홋카이도 일주’.


지원: 남편이 업무상 1월을 움직일 수 없답니다. 아이랑 둘이 홋카이도로 가기는 엄두가 안 납니다. 일어 한마디 못 하는 남편이지만, 존재만으로 든든하므로.


남편 없이 떠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존재만으로 든든하다’ 는 말은, 지원도 처음 써보는 말이었다.


일주: 긍정적이신 님은 아드님과의 단둘 여행에서도 새로운 즐거움을 뽑아내실 테지만, 귀댁은 삼총사가 완전체일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답니다.

지원: 1월 표를 취소하고 다시 끊으면 편도 3인 총합 120은 하네요. 취소 수수료까지 더하면 130. 왕복 항공권만 250입니다. 이게 과연 잘하는 결정인지 모르겠어요.

일주: ‘도쿄에 가자’ 카페, ‘홍콩에 가자’ 카페가 아닌 ‘홋카이도에 가자’ 카페에 글을 남기신 건 홋카이도 외엔 만족스럽지 못한 거고, 결국 경비의 문제겠죠.

지원: 홍콩 특가 떠서 3인 왕복 60에 질렀거든요. 15년 만의 홍콩이 왤케 하나도 안 설레는 걸까요. 온통 쇼핑몰뿐이고, 일본 같은 대자연은 없고.

실은 얼마 전 오사카와 교토를 다녀왔어요. 여행은 좋았지만, 일본은 다녀왔으니 홋카이도는 포기하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자꾸 그곳만 미치게 땡겨요. 도쿄를 경유하면 1인 10만 원은 절감이던데, 이렇게라도 가는 게 맞을까요? ‘이성이 손을 잡고 있는데, 감정이 자꾸 팔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에요.

일주: 2월 초순은 설 연휴와 유키 마츠리가 겹쳐 국제선과 일본 국내선 가격할인이 없을 겁니다. 2월 중순 이후 6박 이상의 비교적 여유 있는 일정으로, 직항이든 경유든 저렴한 티켓을 구하심이 어떨까요? 취소로 인한 손실은 다음 여행 한 번 안가는 셈 치고요. 다행히 북해도가 아드님에게 트라우마가 아닌 고진감래의 기쁨을 알게 해준 것 같아 다행인 것 같습니다.


삼총사일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이라니! 지원은 이 말을 마음속에 꾹꾹 담아 두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이 자신의 ‘한 달의 홋카이도’를 말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지원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페에서라도 말리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고 글을 썼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녀의 도전을 응원 해주어 지원은 행복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남편의 응원 카톡을 내보이며 부디 자신을 말려달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반응했다.


일주: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가 봅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멋진 짝꿍님이십니다. 정말 친구 같은 가족들이시네요. 뭐든 응원합니다^^


지원은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라는 말을 서두로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하고 냉정하게 제지해 주기를 바랐고, 또 한편으론 지지를 받고 싶었다.


지원: 일주 님! 정말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이 글을 쓸 때 ‘일주 님 봐주세요!’라는 제목을 달고 싶었어요. 진지하고 섬세하고 따뜻하게 봐주시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셔서 늘 힘이 되었거든요. 저를 말려주실 거라고 기대했다면 안 믿으시겠죠. 일주 님의 응원은 왜 이렇게 울컥 일까요. ㅜㅜ

일주: 좋게 봐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는 항상 과도한 무리가 아니라면 ‘경험해보고 저지르자!’는 성향이라 따끔한 조언은 딱히 드릴 게 없지만……, 님과 ‘스며들듯이 여행’님은 그 감성이나 글에 대한 사랑 등이 서로 통할 것 같아 그분의 조언에 귀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게으른 산책자’님의 오타루 살이 책도 읽어보시고 한달살이를 가늠해 보시는 것은 또 어떨까요?

지원: 말씀에 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 있으니까요. 뭐랄까, 인자한 어른 같달까요. 격려도 조언도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힘을 가지셨어요. 우선 경험 해보고 저지르자, 는 제가 제일 못하는 영역이지만, 분명 이렇게 해도 큰일이 나지 않았던 경험을 해 보셨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말씀해 주신 책,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마치 이 일이 소설 같아서 환상의 영역 같기도 해요. 그리고 조만간 결단을 내릴 것 같습니다.


결단은 없었다.


그저 약속한 시간에 다다랐고,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없어서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처럼 지원은 그렇게 시간의 끝에 당도하여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홋카이도에 도착하면 ‘서프라이즈! 짠!’ 하고 홋카이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글을 올리면 어떨까를 상상했는데, 하필 폭설이 내렸다. 오타루는 커녕 삿포로에도 도착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태에서 여행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다시 떠오른 홋카이도 일주. 한 번 만난 적도 없고, 그저 도움을 받기만 했던 상대이지만, 지원은 그가 절실했다.


일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JR 운휴이면 호텔은 불이익 없이 취소 가능할 것이고, 오타루행도 버스편은 가능할지 모르니, 신치토세 도착하시면 카페 정보 체크해 보시고, 오늘만 잘 보내면 될 것 같아요.

지원: 감사합니다. 오늘도 슈퍼맨처럼 짠! 하고 도와주시네요. 오타루행 현재는 13시 40분 이후 전면 취소인데, 이런 상황이면 삿포로 호텔도 금세 동나겠죠?

일주: 삿포로에 호텔 예약 해두시는 게 좋을 듯하네요. 제가 링크 드린 호텔은 현재는 공실이 넉넉히 있습니다. 오늘 오타루는 많이 힘들 것 같아 보이지만, 딱 한 시간만 상황이나 소식 지켜보시죠.


비행시간 약 3시간 반. 이륙을 위해 지연된 시간 1시간. 4시간 반 이후 홋카이도의 기상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항에서 아이와 버티거나, 삿포로까지라도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며, 오타루 예약 호텔은 캔슬하고, 삿포로 호텔을 최소 1박 예약해야 하는 게 현재 지원에게 주어진 상황이었다.

신치토세 공항.

그 사이, 그는 아이와 투숙할 호텔 상황조회까지 조회해서 보내주는 한편, 심지어 홋카이도 주오(中央)버스 정보가 담긴 링크까지 보내 두었다.


지원: 방금 공항 도착했답니다. 버스도 운휴가 많네요.

일주: 여전히 공실 충분히 있습니다. 오타루 호텔 전화해서 취소 문의해 봐 드릴까요?

그는 천사의 아바타가 아닐까 싶었다.

지원: 취소문의 전화까지 부탁드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지금 상황 가릴 형편이 아니니 부탁드려도 될까요? @@호텔, 이지원입니다. 4박 예약했는데 일부만 취소가 가능할지…… 너무 어려운 부탁을 드리네요.

일주: 오늘 하루만 취소 가능성 알아볼게요.

호텔 쪽에서 알려주었는데요, 고속도로는 폐쇄되었지만 일반도로로 오는 버스는 운행하고 있다고 하네요. 주오버스이고 삿포로역에서 도보 5분 떨어진 곳에 버스 역이 있다고 하니, 삿포로역으로 먼저 가셔서 인포메이션에 버스 타는 곳 물어보면 어떨까요? 만약 버스 실패하면 다시 호텔에 알려달라고 하니 상황 봐서 톡 주세요.


삿포로역까지만 가면 된다. 지원은 삿포로 역까지 가는 JR이 운행 중인지 조회를 했다. 천사 아바타의 애씀을 보고 하늘이 감탄한 걸까?


지원: JR이 운행되는 건 가봐요. 여기 18시 41분, 동그라미표.


자신이 보고 있는 운행 현황을 캡처해서 홋카이도 일주에게 전송했다. 오타루행 쾌속 에어포트 179호.


일주: 쾌속 에어포트 ‘운행’ 맞네요. 운행 재개했나 보네요.

지원: 그럼 삿포로 안 가고 공항에서 바로 오타루 갈 수 있는 거죠?


지원은 몇 번이나 다시 물었고, 그의 차분한 답변은 지원의 마음을 조용히 달래주었다.


지원: 으아아!!! 넘나 신나요! 그럼, 우선 국내선 쪽으로 넘어가 볼게요!

일주: 사람 몰릴 테니 줄 선점하셔야 해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답하지 말고 뛰세요!

일 년 전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헤맨 적이 있어, 지원은 정확하게 국내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JR 역을 찾고, 표를 끊어 드디어 열차에 올랐다.

지원: 탔어요!


기차 문이 닫히고, 진동이 의자 아래로 전해졌다. 드디어, 진짜로 오타루행이었다.


일주: 다행입니다. 아~~~~~ ^^ 한숨 돌리세요. 그럼~~~


그의 글에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음이, 그리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마음을 놓고 있음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지원: 하~~~ 덕분입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일주: 호텔에 막 전화했어요. 오타루행 JR 탔다고, 체크인 조금 늦을 거라 얘기해 뒀습니다.

지원: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다니, 정신 차리고 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요? 찬찬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지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그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따뜻했다. 그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홋카이도에 못 올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는데, 또다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그 조건들이 눈 녹듯이 해결되는 상황이라니. 이렇게 내가 홋카이도에 오도록 모든 기운들이 돕고 있는 건가, 생각하며 지원은 눈을 감았다. 남편에게도 무사 이동 소식을 전하고서.


오늘까지 오타루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습니다. 어제 하루 내린 적설량이 69㎝로 1953년 통계 작성 이후 3번째로 많은 적설량이었습니다. 현지 기상예보로는 오늘 이후로 눈이 많이 내리는 고비는 지나간 것 같지만, 내일까지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현지 여행 중이거나 내일 홋카이도에 가는 회원들은 기상예보와 JR, 버스 사이트에서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렌트를 하시는 분들은 폭풍설 같은 상황에 잘 대비하셔야 합니다.


드디어 오타루 역에 도착했다. 낯익은 풍경. 수년 전 혼자일 때도, 일 년 전 가족들과 함께였을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그녀를 반겼다. 노란 가로등이 ‘어서 오라고, 오느라 고생했노라고’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원: 잘 도착했습니다. 오타루, 기록적 폭설이라는데 역사의 길 위에 서 있는 느낌이네요. 덕분에 무사히 왔어요. 감사합니다.


호텔로 향하는 길에 주차된 자동차 위에는 69센티에 해당하는 눈이 두껍게 쌓여 바퀴만 보이지 않았다면 형태조차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주: 카페에 가끔 소식 남겨주세요. 오타루 궁금한 거 있으시면 ‘게으른 산책자’님께 물어보세요. 흔쾌히 답변 찾아드리려 할 겁니다. 아드님과 좋은 시간 되시길.

지원: 그러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살길을 찾아보면서요. 며칠 겨우 버틸지, 오래 즐길지 봐주세요. 늘 격려와 응원 감사합니다.


홋카이도가 만들어 주는 인연. 그 덕분에 지원은 이곳에 무사히 오게 된 거라고 확신했다. 푸근한 호텔 룸이 따뜻하게 감싸주는 밤이었다.


Special Thanks to...


《지원의 고민에 함께해준 사람들》


카페 안에는 낯선 이들의 따뜻한 위로가 있었다.


스며들듯이 여행 — 감성적인 조언을 건네는 따뜻한 언니 같은 존재


스며들듯이 여행: 실례지만, MBTI 어떤 유형이실 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ISFP? INFP? 너무 귀여우시고 궁금해서요.

지난번에도 답변해 드렸지만, 성향상 남편분과 함께 여행하시길 원하시고 직접 여행을 이끌어가시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으셔요. 도전하시는 것도 좋으시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장기간이고 겨울이라 운전하기도 위험하고 언어의 장벽도 있고 아이도 있으신데 독감이나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처럼 호흡기 질환이라도 걸리면 타국에서 핵노답이죠.

비행기표를 취소하기 어려우시면 아이와 함께 쉬운 코스로 일주일 정도 다녀와 보세요. 그리고 남편분 성향은 때로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가정은 너무 사랑하지만,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로망입니다. 여자인 저도……. ㅋㅋㅋ 더욱이 계획적이고 스스로 잘 결정하는 성향 이시라면 더욱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가정에 더 충실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줄 거예요. 당연히 지금도 너무 행복해 보이세요^^

지원: MBTI는 놀라시겠지만, ISFJ입니다. 예측하신 P는 아니고, 완전한 “J”입니다. 그래서 계획 없이 떠나는 걸 매우 두려워하고, 계획이 달라지면 매우 당황해서 상의할 사람이 곁에 있어 줘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절실한 사람이고요. P처럼 보이는 이유는 저의 즉흥성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즉흥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는 잘 못 합니다.

저는 마치 ‘풍선과 같은’ 사람이랍니다. 쉽게 부풀어 올랐다가 냉정함을 가진 한마디에 ‘푸르륵-’하고 쪼그라들어 본래 자리를 찾아 오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설레는 저를 ‘빵!’하고 터트려 줄 구실을 찾느라 이런 글을 썼답니다. 이런 저를 귀엽게 봐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말씀대로 요즘 플라즈마 폐렴이 무섭긴 하더라고요. 특히 아이 동반이니 타국에서 혼자 이를 해결하려면 정말 아찔하네요. 사실 지금도 남편은 제주에서 근무해서 평일에 아이가 아프면 정말 힘들긴 하거든요. 여행은 이동이 많아 어렵지만, 한 달을 사는 거라면 덜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장기체류를 고민해 봤던 건데, 아플 거 생각하니 주춤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주말부부라 제 남편은 5일을 혼자서 제주에서 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소 혼자만의 시간은 대빵, 질리도록 많답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혼자 지내는 찬스를 주는 여행은 아닌 걸로~

스며들듯이 여행: 와! 대박입니다. 한 끗 차이였어요. 실례지만 여쭤본 이유는, 저희 남편과 진짜 진짜 너무 비슷하셔서였어요. 저희 남편은 ISFP. P라서 계획이 1도 없어요. 제가 다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 체크인이나 주문이나 말 한마디도 안 하게 해주는데, 저만 따라오면 되는데도 낯선 곳에 가면 대문자 I가 튀어나와서 저 없이는 안 되더라구요. 그것도 평생을요. J가 있으셔도 앞의 변수들 때문에 똑같으시군요.

그래도……, 저희 남편도 그렇고 두 분 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들이라는 거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겪어봐야만 아는 순수함. 워낙에 낙천적이시고 노는 것도 좋아하셔서 지금 주말부부도 다 견디시고 여행 계획도 세우시고 제가 다 압니다. 다 알고 나니 어떻게 하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남편분은 좋은 아내분이 계셔서 복 받으셨네요!

지원: 남편들이 많이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의사 결정할 때 저보다 더 지혜롭고, 냉정해서 많이 의지하고 삽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마치 엄마가 ‘내가 너 잘 알지…… 안 그런 척 해도, 내 속으로 낳아 키웠는데,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와 같이 쓰다듬어 주신 기분이에요. 이 글을 쓰고 나서 제 나름 ‘생각의 동굴’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 끝이 이제 살짝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일주 님 말씀처럼 저랑 많은 부분에서 통하시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헤헤.



게으른 산책자 — 세 달 살이를 경험한 조용한 용기의 소유자, 그 용기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게으른 산책자: 저는 남편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세 달 살이를 했어요. 게스트하우스라서 심심한 거 모르고 혼자 잘 지냈죠.

남편분 말씀 넘 감동적. ‘우리 나이에 간절하게 해 보고픈 거 있는 건 축복’이라는 말이요. 글쓴이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고민은 그저 시기만 늦출 뿐이지 않을까요? 이번에 안 하시더라도 언젠가 한달살이 하실 것 같은 느낌.

제가 늘 하는 말인데, 처음이 어렵지 남들한테 큰 피해주는 거 아니라면 일단 저지르면 어떻게든 된다구요. (일주 님과 이렇게 통할 줄이야.) 한달 오셔서 가끔은 저랑 놀아주셔도 됩니다. 따끔하게 말려야 하는데, 말리지 못하는…… 뭔가 응원하게 되는 이 마음.

지원: 책을 열어보니 뭔가 산책자 님을 위해 다 맞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시간도, 조언을 해주시는 친구 은미 님도, 게스트하우스 공고문도. 이 사람을 위해 모든 조건이 맞춰지는 하늘의 기운 같은 거요. 그래서 저도 게스트하우스도 막 뒤져보고 그랬는데, 아이랑은 역시 무리일 것 같더라고요. 혼자서 용기 내는 것도 힘든데, 저만 믿고 의지할 생명체 하나를 더 업고 용기를 내려니 부담이 크답니다. 그럼에도, 안 말려주시고 응원해 주심에 한 발자국 내딛습니다. 계신 곳 알려 주신다면 싸인 받으러 가겠습니다!

게으른 산책자: 맞아요. 아이가 있으면 모든 게 달라지지요. 저도 혼자라서 할 수 있는 일들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신랑도 없고, 아이도 없는데 하고 싶은 일도 못 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렇다면, 님의 상황은 어떤가요? 뭔가 조건들이 맞춰지는 것 같은 기분은 안 드세요? 저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즐거운 여행하시고, 저는 ‘히가시카와-정’이라는 마을에 있으니 아사히카와 언저리에 오실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응원합니다!

지원: 그럼에도 저 같은 사람은, 혼자였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사람이기에 산책자님은 굉장한 분이신 겁니다. 산책자님을 비롯한 카페의 많은 분들께서 반대를 안 하는 분위기 속에서, 저는 정신 못 차리는 중이고요.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지만 모른 척 할랍니다. 아사히다케 도전하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응원 정말 감사합니다!


모리노도케이 — 두 아들을 키우며 철학처럼 살아가는 현실 아빠


모리노도케이: 사는 방법도 다를 테지만 제가 쌍둥이 아들 놈들 네 살 때부터 데리고 혼자서 여행을 다녔어요. 미친놈처럼. 그게 내가 아이들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 바깥세상 보여주고 경험 시켜주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코시국 때 빼고는 매년 서너 번 데리고 나간 듯 해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24시간 내내 같이 있어야만 하는 게 여행이라 그것만으로도 아이들과 교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회는 1도 없어요.

지원: 쌍둥이 아들 둘을……! 진짜 대단하세요. 네 살이면 기저귀를 뗄랑 말랑한 시기였을 텐데. 그런 용기도, 체력도, 재력도 모두 부럽습니다.

말씀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여행이라는 것에는 절대 공감합니다. 아이랑 둘이 있으면 사이가 좋아지긴 하더라고요. 의지할 생명이 단둘이라 그런 건지. 중딩 되기 전까지 열심히 데리고 다녀보겠습니다.

모리노도케이: 재력은 소시민인데, 어떻게든 메꿔지더라고요. 체력은 더 거지임. 여하튼 파이팅하세요.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저는 서울살이 청산하고 시골 내려와 있으니 메꿔지는 것 같습니다. 남들 보기에 처절하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외식이라는 걸 거의 안 하고 살아요. 하지만 애들은 두 살 때부터 하루도 아침밥 빼먹은 적 없고(살면서 제일 잘한 짓임),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잘 먹여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요.

혼술하고 상하이 혼여 예약하고 기분이 좋으니 좀 더 이야기하자면……(다른 분들이 이 글 볼 일 없을 것 같아서), 쓸데없이 사생활 이야기긴 한데. 어디서도 안 해본……. 왜 이글의 댓글로 이 얘기를 하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답답한 게 있었는지. 대나무숲에 이야기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 엄마 사망보험금이 아이들 대학 들어갈 나이쯤까지 나오는데, 절대 그 돈은 안 쓰고 애들 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잘 모아 대학 들어가면 오천씩 줘서 기죽지 않게 할 거다, 잘하자 했거든요? 그 목표가 코시국에 투자 잘해서 초6에 이뤄졌어요. 그래서 돈 모으는 것에 관심 가지고 코시국 끝날 무렵 다른 곳에 투자해서 수익률이 괜찮게 나왔어요. 소소하게 아이들 데리고 일 년에 두세 번 해외여행 가는 비용만 뽑으면 감사합니다, 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아직까지는 그게 되네요.

남들은 그 나이에 왜 골프도 안 치냐고 하죠. 애들이 그 나이에 외국 가면 멀 아냐고 하죠. 아침은 걍 씨리얼 주면 되는데 왜 피곤하게 아침밥 해주냐고 해요. 옷 좀 사세요. 10년 동안 지겹게 듣고 있네요.

제 자신을 위한 유일한 낙이 뭐냐면요. 15년째 단골인데 압구정 가서 커트랑 염색하는 거. 이거 딸랑 하나, 나 위해 하는데, 이것도 엄청 욕먹으며 하고 있어요. 그래봤자 일 년에 5번 정도 가나?

지원: 모리 님 글에서, 모리 님의 철학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이대는 잘 모르겠으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듯하여, 일편 존경스럽습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압축하여 본 기분이에요.

아내분께서 남겨주신 귀한 자산을 오롯이 자녀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투자라 역시 행운이 따라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도 모리 님의 성향을 알 것 같은데, 낄끼빠빠의 시기를 잘 알고 실행에 옮길 줄 아는 대범함이 보이세요.

예전에 비행기에서 만난 어르신께서 ‘자산을 물려주려 하지 말고, 그 돈으로 여행을 데리고 다니라’고 하시더라고요. 비록 아이가 기억을 못하더라도 그 감성이 몸속 여기저기 남아있음을 아이가 네 살 때도, 열 살인 지금도 느낍니다.

압구정 커트와 염색이라니요. 너무 힙하신 거 아니신가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게’ 중요하잖아요. 내가 가치를 두는 곳에 힘주어 쓰고,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 아끼는 것. 저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일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같은 금액의 돈이어도 무엇에 쓰이느냐에 따라 아깝거나 혹은 아깝지 않은 것은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달려 있는 거니까요.

대나무숲은 원래 듣고만 있어야 하는 건데 뭐 이렇게 메아리를 울려대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리 님의 대나무 숲 공간이 된 것이 어쩐지 비밀 친구가 된 것 같아 기분 좋은 밤입니다. 이미 모리 님은 이미 모리(林)이셨으니, 대나무숲이 모리 님이고, 모리 님이 대나무숲인 뭐 그런 호접지몽의 기운을 빌어 잠을 청해보겠습니다.


비밀 친구님. 안녕히 주무세요^^


그 밤. 지원은 낯선 이들의 다정한 말들을 마음속에 품은 채, 따뜻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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