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별이라는 아이
한별은 줄곧 손가락 주변 피부를 피가 나도록 뜯었다.
때로는 재미 삼아 하는 행동 같기도 했는데, 피가 나도록 뜯어놓은 손가락을 보면 지원은 마음이 아팠다. 그런 지원의 마음을 눈치 빠른 한별이 모를 리 없는데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뜯고 있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무의식적 습관이 오래도록 이어져 강도마저 점점 세지고 있었다. 코로나 세대의 초등생들이 가진 무기력함을 한별 역시 가지고 있는 데다,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아이를 혼자 돌보는 것이 지원은 늘 미안하고 걱정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한별 역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 엄마다. 동시에 가장 무서워하는 것도 엄마인 지원이다. 평소에는 엄마와 격의 없이 지내지만, 눈치가 빠르고 감정이 풍부한 한별은 엄마의 표정 변화만으로도 그녀의 기분을 읽어냈고, 지원의 말투만으로도 엄마가 화가 났는지 확인을 하는 아이였다. 엄마와 단둘이 생활하는데 엄마가 기분이 언짢으면 한별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부모를 닮아 굉장히 온순한 면모가 있어, 한별은 지원이 정한 규칙에 대체로 수긍하고 잘 따라주었다. 그 대신 이 아이는 더 마음을 헤아려주어야 했고, 무언의 질책조차도 정말 조심해야 하는 아이였다. 규칙으로 제한하고 무언의 질책이 필요가 없는 아이이자, 칭찬과 인정에 목이 마른 아이였다.
그에 반해 지원은 자신의 감정이 표정에 잘 드러나며, 사랑 표현이 어색한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부모 밑에서 자라, 애정 표현이 어색하고 부끄러운 사람인지라 최대한 표현을 한다고 노력을 해도 한별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별은 원체 자존감이 낮고 마음마저 여리다 보니, 상대의 공격에 적절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 오는 일이 많았다. 유일한 탈출구가 엄마인데, 한별에게 엄마라는 품은 따뜻했으나 때로는 냉정하고, 때로는 채워도 조금씩 새어 나가는 구멍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런 환경이 한별을 불안한 성격으로 키워낸 것은 아닐까. 지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어느새 집중을 못 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손을 뜯는 일이 잦으니 담임 선생님의 눈에 집중을 못 하는 아이로 보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이미 그렇게 낙인을 찍은 듯했다. 지원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혹시 모를 염려가 남아, 남편을 동반하여 소아정신과에서 각종 심리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집중력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상위 1퍼센트 안에 드는 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불안이 문제라는 해석을 받았고, 놀이치료를 권했다. 아이가 가장 갈구하는 ‘아빠와의 동거’를 하면 정서적으로 조금 더 안정될 것 같아 이 방면의 노력도 해봤으나, 올해도 시도로만 끝이 나 버렸다.
아이는 증세는 줄었다 늘었다, 를 반복하며 지원을 울렸다. 지원은 한별과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손을 뜯지 말아야 할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으니까. 방학 때만큼은 한별이를 계속 지켜볼 수 있으니, 손에 관심을 가는 시간을 줄이면서 한별과의 시간에 불안을 줄일 수 있게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중 하나가 여행이었다.
“별아, 엄마랑 홋카이도 가면 매일 많이 걷게 될 거야. 엄마가 고민해 봤는데, 힘들다고 투덜대지 않고 하루에 만 보를 잘 걷는다면 엄마가 별이에게 특별히 게임 시간을 줄까 해. 원래 게임은 주말에만 게임을 할 수 있지만.”
“정말? 얼만큼?”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는데, 음……, 한 시간은 너무 많고, 30분은 너무 적으니, 40분 정도가 어떨까 싶어.”
“해볼래!”
“그래? 좋아, 그럼. 별이는 기분 좋게 걷고 또 건강해지고. 단, 방학 때만 그러는 거야.”
“응, 알겠어.”
최소한 걸으면서 손을 뜯지는 않을 테지. 그러니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 일상을 보내는 게 이 여행의 숙제였다. 대한민국의 면적에 육박하는 홋카이도를 다닌다는 것은 오래도록 그리고 자주 걷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로가 힘들지 않게 즐겁게 다니려면 이 방법이 최선 같았기에, 지원은 나름의 꾀를 낸 것이다. 게임으로 딜을 하는 것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게임을 하도록 무작정 허락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면서.
영상통화 화면 속 남편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별은 스누피 고리를 흔들며 “이거, 아빠 선물이야!” 외쳤다. 지원은 말 대신 사진 한 장을 보내며 생일을 축하했다. 미역국 한 술 못 뜨고 출근할 남편이 안쓰러워, 대신 금일봉을 보냈다. 무려 백만 원. 선물은 아니지만, 그걸로 미안함을 달랠 수 있기를 바라며.
“어? 이거 공 하나 잘못 붙은 거 아냐?”
“어. 아냐. 특별히 쏘는 거니까, 갖고 싶은 거 맘껏 사.”
“우와- 우리 색시 최고다!”
신기한 물건에 유난히 호기심 많은 남편은, 자기 용돈으로 별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을 종종 샀다. 주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열 개 중 하나쯤 간신히 쓸 만한 수준이었다. 지원도 안다. 잔소리를 피하려고 몰래 사는 것도. 그래서 ‘갖고 싶은 거 맘껏’이라는 말엔, 그조차도 눈감아주겠다는 나름의 허용이 담겨 있다. 물론, 아깝다며 제대로 쓰지 못할 확률이 높지만.
텐구야마 로프웨이. 현재 운행 중.
와- 며칠 만인가. 지원은 한별을 데리고 서둘러 예의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안쪽 시외버스 터미널 창구로 가서, 오타루 1일 시내버스 승차권과 로프웨이 왕복 승차권 세트를 구입했다. 작년에 해본 경험이 있어 지원은 익숙한 듯 표를 사서, 대기 줄에 줄을 섰다. 수족관을 갈 때처럼 버스는 구불구불한 눈 산길을 올랐다.
버스는 금세 텐구야마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로프웨이를 타는 건물까지 걸어서 일이 분 남짓 걸렸다. 로프웨이는 12분 간격으로 운행했고, 하행 편 마지막 운행 시간이 저녁 9시인 것을 확인하고 로프웨이에 올랐다. 올라갈 때는 뒤쪽에 타야 산 아래 풍경을 보며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았기에 두 사람은 문이 열리자마자 로프웨이의 뒤로 향했다.
5분여 시간을 오르면서 활강하는 스키어들과 눈 덮인 나무들을 구경하며 한별이 이야기한 ‘주인공’을 대면할 순간을 기다렸다. 한별의 만면에도 기대감과 벅참으로 뒤섞인 웃음이 잔뜩 얹어져 있었다.
텐구야마 상- 오겡끼데쓰까-
작은 봉고차 모양의 로프웨이는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OTARU’라고 쓰여 있었는데, 색깔이 흰 산과 정말 잘 어울렸다. 로프웨이에서 내려 몇 걸음 걸어 나오니, 바로 왼편에 ‘TENGUU 카페’가 있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을 거르고 나와, 지원과 한별은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별은 챠슈를 얹은 쇼유 라멘을, 지원은 치킨 가라아게 카레를 주문한 후, 설경이 내려다보이는 바 의자에 앉았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한별과 지원은 풍경 사진을 찍기도 했고, 아빠에게 보낼 생일 축하 영상을 찍기도 했다.
이윽고 나온 라멘은 노란 생면 위에 동그란 챠슈가 세 조각 겹쳐 얹어있었다. 면이 탱글탱글하니 꽤 먹음직스러워 보여 지원은 보자마자 침을 꿀꺽 삼켰다. 지원 몫의 카레 라이스는 갓 튀긴 치킨이 어우러졌고, 자줏빛 단무지가 곁들여 있었다. 지원은 자신의 카레 접시를 한 손에 받쳐 들고는 설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장면이 마치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나가려는데, 동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배가 고파선지 들어올 땐 눈에 안 들어왔던 텐구 상이, 이제야 비로소 보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 괜한 말은 아니구나. 조명 아래 조용히 서 있는 히나나데 텐구 상. 오래된 나무를 깎아 만든 듯한 얼굴에는 긴 코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 코를 문지르면 소원이 이뤄진다’ 고 한다. 어디까지가 전설이고, 어디부터가 믿음일까.
“엄마, 우리도 소원 빌어볼까?”
한별은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코를 문질렀다.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어. 엄마가 오래도록 나랑 같이 자주면 좋겠어.”
지원은 괜히 울컥한 마음에 손을 뻗지 못하고,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오래된 나무상 앞에서, 사소한 바람을 ‘소원’이라 부르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이 애틋하게 와닿았다. 기도하는 옆모습이 너무도 소중하고 크게 다가왔다.
입구에는 텐구 상 입간판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는 오늘 적설량이 80센티이며, 오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6도라고 알려주었다. 그 옆에는 덴구 상의 얼굴 부분이 뚫려 있는 입간판 하나가 서 있었다. 몸에는‘홋카이도 3대 야경 - 오타루 텐구야마’라고 쓰여있는. 한별이 얼른 뛰어가 그 구멍으로 자신의 얼굴을 쏙 내밀어, 지원은 깔깔거리며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일 년 동안 기다려오던 텐구야마를 만나는 한별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모시는 신을 영접하듯 벅차오르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작은 처마 아래 눈사람을 만들어 모셔둔 제단을 지나, 드디어 오타루 시내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지원과 한별은 약속한 듯 외쳤다.
“오겡끼데스까- . 와타시와, 겡끼데스-”
그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깔 웃었다.
한별은 자신의 키만큼 쌓인 눈 위에 철퍼덕 누웠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공인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는 커다란 눈덩이를 번쩍 들어올리기도 했고, 눈 언덕에 눈 오리를 만들어 쌓아놓기도 했다. 지난 겨울 허벅지 깊이로 쑥쑥 빠지는 눈 덕분에 한별의 바지는 다 젖어 얼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툼한 패딩 바지를 입고와 신나게 눈 위를 구르고 활보했다.
한별의 볼이 잘 익은 자두만큼 빨개졌을 무렵, 두 사람은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눈 위에서 실컷 굴러다닌 탓인지, 다리는 살짝 무겁고 손끝은 얼얼했다.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씩 받아 들고 바 테이블에 앉았다. 호호 불며 마시던 순간, 창밖으로 파란 로프웨이가 예의 모습으로 지나갔다. 눈과는 역시 빨간색이 더 잘 어울리는구나.
추위를 녹이고 다시 밖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한별이 머리에 고프로 카메라를 달고, 텐구 신사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 재미있는 영상이 찍힐 것 같아 지원도 흔쾌히 동의했다. 고프로를 머리에 쓴 한별은 머리통을 살짝씩 흔들며 걸었다. 지원은 아이의 작은 등 뒤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저렇게 걷는 장면도, 나중에 영상으로 보면 또 귀엽겠지. 스노우 슈즈를 신지 않아, 다리는 줄곧 아래로 곤두박질쳤지만, 한별은 재빠르게 다시 다리를 뽑아 올려 다음 걸음을 준비했다. 긴 겨울 동안 먹잇감을 찾으러 나온 다람쥐가 재빠르게 눈 위를 지나간 것처럼 한별의 발자취가 계속 눈앞에 이어졌다.
세 시 반쯤 되자, 구름이 오타루 시내의 절반을 덮었다. 도시의 절반은 해가 났고, 절반은 그늘이 지더니 금세 황혼의 물이 밀려 들어오려는 신호를 보냈다. 사진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지원과 한별도 그 사이에서 저녁이 시작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귀가 심각하게 에이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겨울바람은, 바닷바람은, 산바람은, 저녁바람은 생각보다 거셌다. 서둘러 카페에 자리를 잡고 창밖이 변하는 순간을 지켜봤다.
시내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5시가 되자, 본격적인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까만 하늘에 수를 놓은 별처럼, 오타루 시도 까만 공기에 노란 별을 새겨넣었다. 홋카이도 3대 야경이라더니 이런 모습이구나 감탄할 무렵, 한별이 추위를 호소했다.
“엄마, 추워.”
옷이 젖어 한별이 오들오들 떨었다.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로프웨이를 타려는 줄의 길이가 십 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아예 늦은 시간에 내려가지 않는 이상 줄은 줄어들 기미가 없어 보였다. 긴 줄을 보니 삼십 분 정도의 텀으로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갈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냥 줄에 섰다. 대기 줄에서도, 로프웨이 안에서도 온통 중국어였다. 이곳이 일본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당연히 로프웨이도 만원이 되어 낭만도 없이 내려갔다. 야경을 보며 내려올 수 있겠다는 기대는, 추위 속에 왁자지껄한 중국어 속에 사라졌다.
내려와 보니 버스를 타려는 줄도 로프웨이 대기 줄에 비례하여 길었다. 십오 분 후면 버스가 온다. 그런데, 이번 버스는 눈대중으로 봐도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별아. 이번 버스는 아무래도 타기 어려울 것 같아. 어쩌지? 많이 춥지?”
“추워. 그리고 쉬도 마려워.”
한별이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줄을 벗어나면 대기는 더 길어질 것 같았다. 한별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원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저기 보이는 로프웨이 타는 곳에 가면 화장실 있는데 다녀올래? 엄마가 같이 가주고 싶은데, 그러면 이 줄의 맨 뒤에 다시 서야 해서. 그럼, 별이가 더 오래 기다릴 것 같은데. 엄마가 여기서 별이 가는 거 지켜보고 있을게.”
한별은 의외로 흔쾌히 답했다. 엄마의 걱정은 늘 아이가 보여줄 예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알겠어. 그럼 다녀올게.”
“쉬, 하고 거기 앞에 의자에서 앉아서 기다려. 다음 버스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엄마가 전화할게.”
“응. 꼭 전화해야 해.”
지원은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 속에서 혼자 걷는 한별의 작고 빠른 걸음을 복 있자니, 왠지 아이가 더 조그맣게 보였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는 화장실도 항상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 많은 나라라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그냥 ‘사람 사는 곳 어디든 비슷하지’라는 생각으로, 혼자 화장실을 보냈다.
한별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쯤 버스 한 대가 도착해서 사람들을 태워 갔다. 그리고, 지금 지원의 앞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정도면 앉아서 갈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인 지금 화장실에 갔고, 나는 버스 기다리고 있어. 여기 중국인들 엄청 많아. 일본어보다 중국어를 훨씬 더 많이 들었다니까.”
“당신은 춥지 않고?”
“응, 난 괜찮아. 별이 발이 좀 젖어서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다음 버스 올 때까지.”
이 말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버스 한 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람들 기다리니까 바로 다음 버스 올려보냈나 봐. 역시 일본. 일단 끊을게.”
잠시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일본의 버스 시스템을 떠올리고는 남편과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아. 시간보다 일찍 버스가 왔어. 바로 내려올 수 있겠어?”
당황한 한별의 기색이 전화에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어? 어! 알겠어. 빨리 가볼게.”
“눈길이니까 뛰지 말고 조심히 내려와. 다치면 안 되니까.”
“알겠어. 엄마.”
버스 기사는 버스를 주차하고 앞문을 열었다. 지원은 버스로 다가가 기사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아이가 화장실에 가 있는데, 버스가 언제쯤 출발하나요?”
“5분 정도 후일 것 같네요. 아이가 금방 오나요?”
“네,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지원은 뒷사람에게 먼저 타라고 손짓했다.
“아이가 괜찮아요?”
중국인으로 보이는 그 일행은 지원이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았는지, 한국어로 염려를 전해왔다. 지원은 고맙다고 이야기하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때, 한별이 지원의 손을 잡았다.
“별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혹시 날아온 거야?”
“버스 왔대서 마구마구 왔지.”
“어휴. 넘어지진 않았어?”
“응. 괜찮았어.”
지원과 한별은 뒷문으로 버스에 올랐다. 나란히 좌석에 앉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열기를 두 다리에 쏘이며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낮에 올라올 때 보니,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지원과 한별이 묵는 호텔을 지나 텐구야마로 오르는 노선이라 내려올 때는 호텔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호텔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리니 괜히 횡재한 기분. 우리가 간 곳들이 이 호텔을 지나가는 노선 위에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두 여행자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룸에 들어서니 정갈하게 정리된 침대와 새 잠옷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따뜻한 호텔 방의 기운이 두 사람을 포근히 감쌌다. 지원은 옷을 갈아입고, 신발 드라이어를 챙겨 한별의 부츠를 말렸다.
“우리, 한 시간만 푹 쉬자. 그리고 밥 먹으러 나가자. 오키?”
“오키!”
해가 조금씩 기울던 오후 6시쯤, 방 안은 고요했다. 침대에 누운 채 며칠간 찍은 사진을 돌려보며 지원은 생각했다. 벌써 4일째라니. 만약 3박 4일 일정이었다면 오늘이 마지막 밤이었겠지. 정말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구나.
한별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한별은 열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온천욕의 뜨끈함을 즐길 줄 안다. 어르신 마냥, ‘허어-’소리를 내가며 온몸으로 시원함을 표현하는 신음이 욕실 밖으로 전해 왔다.
“근처에 회전 초밥집이 있대. 거기 가볼까 하는데.”
“엄마. 근데……, 꼭 나가야 해?”
추운 곳에서 떨다가 따뜻한 곳에서 쉬니 나가기 귀찮을 만도 했다.
“어제도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식사했으니, 오늘은 제대로 먹자.”
“…… 알겠어.”
내키지 않는 말투였으나, 지원은 그 심정을 무시하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모든 순간을 아이의 기분에 맞춰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무거운 걸음으로 숙소를 나섰지만, 고프로를 켜서 가는 길을 찍으면서 걷자고 하니 이내 한별은 신나 하며 앞장섰다.
“엄마. 근데 이 길 걸으니까, 작년에 아빠랑 걸었던 거 생각나.”
“그치? 첫날 이 길 걸어서 카이센동 먹으러 갔었는데.”
“이렇게 좋을 때 아빠가 없으니까 더 허전하다. 아빠 보고 싶다.”
“그러게. 엄마두.”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아빠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지원은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그래도 좋은 순간에 제 아빠를 떠올리는 아이로 키웠으니 잘한 거라고 자신을 위안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초밥집에 도착했다. 문 앞에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는 안내가 있었고, 문을 밀고 들어가니 대기가 이미 서너 팀 있어 대략 1시간 기다려야 식사가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9시에 밥을 먹는 건 무리일 듯싶어, 두 사람은 식당을 돌아 나왔다.
“별아. 그럼 어쩌지? 아까 걸어올 때 있던 가게들로 가볼까?”
두 사람은 다시 걸어왔던 길을 돌아 걸었다. 지나오면서 봐두었던 가게도 그 사이 문을 닫았고, 초라한 징기스칸 집 하나만 영업 중이었다.
“별아. 징기스칸 알지? 접때 삿포로에서 맛있게 먹었던 양고기.”
“알지, 엄마. 제일 맛있었던 곳인데, 어떻게 잊어.”
“크크. 그 정도였어? 지금은 그것밖에 안 될 것 같아. 삿포로가 유명하긴 하지만, 오타루 징기스칸도 맛볼까?”
“나야 좋지!”
지원과 한별은 노포의 나무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갔다.
“식사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원하는 자리에 앉으세요.”
아주머니는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모든 테이블이 주인아주머니를 바라보고 앉는 디귿 자의 바 형태였다. 지원과 한별은 가장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래봤자, 가게는 6명이 앉으면 만석이 되는 사이즈라, 구석이라 해도 주인 아주머니와 아주 가까웠다. 두 사람 앞 징키스칸 투구 모양의 팬에 불이 켜졌다. 테두리에 숙주가 깔리고, ‘아브라’라고 불리는 지방 덩어리로 팬에 기름칠을 해주었다.
“뭘로 드릴까요?”
“生라무랑 라무 스테키 중 뭐가 다른가요?”
라무는 lamb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생라무는 숄더 부위, 스테키는 갈비 부위입니다.”
“각각 하나씩 주세요. 야채는 뭐가 나오나요?”
“양파, 대파가 나옵니다.”
은색 스테인레스 접시에 선홍빛 고기가 담겨 나왔다.
“먹어볼까?”
“응!”
한별은 다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물며 대답했다.
치이익-.
냄새가 침샘을 자극해서 입안이 뻐근하게 아파 오더니, 이내 침이 고였다. 붉었던 고기가 이내 연갈색으로 변하고 먹음직스러운 검은 딱쟁이가 곳곳에 앉기 시작했다. 주인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수제 타래장을 종지에 덜고, 재빨리 고기를 찍어 입속에 넣었다. 오늘의 추위가 다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흐음-, 엄마. 녹는다. 녹아.”
한별도 연신 감탄을 뱉어냈다.
“엄마, 밥도.”
밥 귀신 한별이 밥을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지원은 밥을 주문했다.
“밥 한 공기 부탁드립니다.”
“사이즈는요?”
“미디움으로 주세요.”
주문 착오였다. 밥을 적게 먹겠다고 하는 한별의 다짐은 늘 틀렸었다. 금세 밥공기가 비워졌고, 한 공기를 더 주문했다.
그때,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노포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나무로 된 유리문이 드르륵 소리를 냈다. 미러리스 카메라를 자신의 옆자리에 소중히 내려놓고, 신중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본어로 말했지만, 지원은 어쩐지 그가 한국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별아, 맛있어?”
지원은 일부러 별에게 물었다. 그 말에 옆자리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한국에서 오셨나 봐요.”
예상했던 말투. 지원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랑 사흘 전에 왔어요. 혼자 오셨나 봐요.”
“오늘 도착했는데, 저녁 되니까 먹을 곳이 없네요.”
“그렇더라고요. 오타루는 저녁 되면 가게들이 다 일찍 닫더라고요. 오늘은 어디 좀 가보셨어요?”
“늦게 도착해서, 요기 운하 밖에 못 봤어요.”
남자가 손가락으로 운하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희는 텐구야마 다녀왔어요. 작년에도 갔었는데, 아이가 또 가고 싶다고 해서 갔는데 야경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아, 감사해요. 저도 거기 가봐야겠네요.”
지원은 말 대신 짧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한국말 되게 오랜만에 들어본다. 엄마 빼고.”
한별이 지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 오타루에 온 이래로 지원 역시 한국말은 한별의 목소리 외에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요 며칠 일본어보다 중국어가 더 많이 들려왔고, 전과 다르게 한국인들을 거의 못 만났던 것 같다. 문득, 지원은 외롭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징기스칸 팬 위 검게 탄 숙주가 말라비틀어질 즈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깜깜한 길목을 가게 앞 작은 불빛들이 밝혀주고 있었다. 계획된 4일이 정말 금방 지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별을 재워두고 내일 갈 곳과 잘 곳을 찾아야 한다. 내일은 오타루를 떠날 작정이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눈.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막막한, 그 감정들이 방 안에 조용히 섞였다. 열려있는 내일이 막연하기도, 기대되기도 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