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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홋카이도 갈래요?

7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혐오와 인간성의 그 중간 어디쯤

by teaterrace

폭풍설.


‘폭풍우’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폭풍설’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우리는 흔히 ‘눈 폭풍’이라고 표현하니까. 눈 폭풍이 주는 어감은 폭풍이 부는데 거기에 눈이 섞여 내린다는 기분이다. 그런데 ‘폭풍설’은 체감부터가 달랐다. 눈이 폭풍과 같이 휘몰아치듯 쏟아져 내린다는 말로 여겨졌다.

지원은 호텔 안에서 휘몰아치는 눈을 바라봤다. 회색 하늘. 그보다 더 회색에 가까운 눈덩이가 건너편 고층 건물과 호텔 사이를 쓸 듯이 지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저기 아래에서 하늘의 눈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듯이. 휘이잉- 창밖으로 거센 바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벗겨지려는 모자를 두 손으로 꽉 감싼 채 바람을 마주하며 걷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그들을 보니 지금의 안락과 고요가 얼마나 값진지 실감이 났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세상 바깥, 이 작은 방 안의 따뜻함이 마치 세상 전체처럼 느껴졌다. 지원은 이 평온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눈 덮인 창문 너머로 조용히 되새겼다.


어제 미리 사 둔 빵들을 꺼내 우유와 함께 먹었다. 그 후 지원은 책을 읽고, 한별은 TV 만화를 보며 깔깔거렸다. 요즘은 대부분의 호텔에서 유튜브 시청이 가능해 한국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살짝 갑갑함이 몰려왔다. 그래서 지원은 한별을 데리고 2층 호텔 라운지로 갔다. 밖을 향해 설치된 바타입 테이블과 그 중앙에 넓은 원목 테이블이 놓여 아늑함이 느껴졌다. 한쪽엔 장작이 타고 있는 화로를 모티브로 만든 난로가 붉은 빛을 내며 낭만을 더했다. 지원과 한별은 녹차 라떼와 밀크티를 만들어서 마셨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실제 벽난로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은 거짓말같이 맑았다. 오늘의 행선지는 후라노였다. 닝그루 테라스와 개썰매가 있는 곳. 둘은 라벤더 버스에 올랐다. 비에이를 지나 나카후라노로 향하는 길. 도로의 양 옆에 마치 복사해서 붙여놓은 듯 긴 눈밭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끔씩 나무 한 그루, 가끔씩 전봇대 하나, 그리고 또 가끔씩 적설량을 가늠하는 폴대 하나. 그리고 다시 또 흰 설원. 도깨비가 택한 ‘무(無)의 세상’이 과연 이랬다면 살 만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뽀얗게 빛나는 눈밭이었다. 밤이 되어야 아름다워지는 그곳 역시 버스가 일찍 끊긴다. 다행스럽게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후라노역까지 데려다준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전까지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긴 자작나무가 빽빽이 자란 산책로의 끝에 식당으로 보이는 로그 하우스가 보였다.


모리노토케이(森の時計)-.


어? 이건 나의 비밀 친구 이름인데? 직역하면 ‘숲속 시계’이지만, 어쩐지 ‘숲의 시간’이라는 의미일 거라고 지원은 짐작해보았다. 입구의 처마 위에 두꺼운 눈이 쌓여 있었다. 한 스푼 크게 떠먹으면 고소한 치즈케이크의 맛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내는 예상대로 따뜻해 보였고 따뜻했다. 나무 기둥과 한옥 서까래처럼 보이는 구조물들이 멋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바닥은 마치 돌조각을 맞춰서 끼워놓은 듯 커다랗고 불규칙한 타일들로 로그 하우스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메뉴를 펼쳤다. 여기는 어쩌면 동화 속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메뉴의 이름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낭만적인지.


케이크-첫눈, 케이크-네유키(밑에 깔려 봄의 해빙 때까지 녹지 않고 남는 눈), 케이크-유키도케(눈이 녹음), 잔설, 움트는 싹, 숲의 카레, 눈 스튜……


어느 것 하나 현실적인 이름이 없었다. 영어 번역은 더 기가 막히다.

First snow, Real snow, Melting snow.

과연 눈의 마을이구나.


카레와 스튜를 각각 하나씩 주문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설원에 꽂힌 듯 나란히 선 자작나무들이 보였다. 남편도 이곳을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함께 있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솟아오를 때 음식이 나왔다. 당근의 향이 그윽한 카레와 버섯의 짙은 풍미가 올라오는 스튜로 두 사람은 행복한 식사를 마쳤다.


밖으로 나오니 이제 노란 램프들이 줄지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두사람은 ‘후라노 칸칸무라’라는 곳으로 갔다. 튜브 썰매와 개썰매를 탈 수 있고 커다란 이글루에서 추위를 피할 수도 있는 이벤트 존이다. 이미 밖은 영하 10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튜브 썰매를 다시 끌고 올라오는 것을 몇 번 반복하자 몸이 더워졌다. 이글루 안에 들어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벤치에 한별이 몸을 가만히 뉘였다.

“엄마, 등이 완전 시원해졌어. 아이스크림 깔고 누운 기분이야.”

얼음이 등을 쏙 감싸는 느낌이 이상하면서도 웃긴 듯, 한별은 등을 꼼지락 비비며 킥킥 웃었다.


이글루를 나와 개 썰매 존으로 갔다. 아이누족으로 보이는 청년 2명이 허스키로 보이는 개 몇 마리를 데리고 나와 썰매 체험을 시켜주는 듯 보였다. 한별이 다가가자 그들은 개를 만져보라고 권했다. 사람을 좋아하는지 한별이 손을 뻗자마자 바로 배를 보이며 눕는 개를 보며 한별도 경계심을 풀고 한참을 교감했다. 서로 만져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통에 한별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원래 알았던 사이처럼 한참을 놀다 보니 한별은 친구가 된 개들을 탄다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냥 떠나기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지원 역시 흔쾌히 아이에게 개를 만지도록 해주고 사진도 찍게 해준 청년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었다.

특히 지원은 홋카이도의 식민화 과정과 홋카이도 안에서 아이누족의 지위에 대해 들었던 바가 있던 터라 마음이 짠했다. 아이누 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순식간에 일본에 동화되어 사라져 갔고 일본인들의 차별로 산골짜기에서 숨어 자급자족하며 살다 필요할 때만 시내로 나온다고 들었다. 본거지를 빼앗긴 민족의 슬픔이 담겨 있는 홋카이도. 그들에게는 이것은 엄연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래서 1분도 채 안 되는 체험이니 즐기라고 권했다. 청년들은 한별의 안전을 고려해 적당한 속도로 개가 달리도록 배려했다. 한별은 정말 즐거워했다.

이곳이 환호라면 바로 옆 ‘요정의 숲’ 닝구르테라스는 신비롭고 로맨틱했다. 겉에서 볼 때는 그랬다. 막상 입장을 하니 사람이 너무 많아 부산한 느낌이 강했다. 다양한 공예품을 파는 프리마켓이랄까. ‘숲속의 로맨틱 쇼핑 에어리어’가 딱 맞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예쁜 사진을 찍었다. 좋다고 생각하면 좋은 곳이 된다.

셔틀버스가 서서히 출발했다. 닝그루테라스 부근에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산림욕장과 캠핑 에어리어 같은 것이 슬쩍 보이는 것 같았다. 지원은 그것이 요정의 장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후라노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사히카와로 돌아왔다. 역 근처에 유명한 징기스칸 집이 있어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평소에 대기가 길어서 쉽게 맛볼 수 없는 그런 집이었는데, 두 사람은 운 좋게도 대기 없이 자리를 안내 받았다. 직원은 아이에게 음료 하나를 무료로 준다고 말했다. 세트 메뉴와 음료 하나, 그리고 아몬드 무 샐러드를 주문했다.


치이익-.


고기 익는 소리가 두 사람을 흥분시켰다. 숄더, 안심, 다리, 목살. 부위별로 각기 다른 식감과 맛이 느껴졌다. 아삭아삭한 무 샐러드는 식욕을 더욱 돋구었다. 신선한 육질과 풍부한 양유 아이스크림과 푸딩. 충분한 행복이었다.

“엄마. 이곳이 징기스칸 단연 1등 집이야.”

“그러게. 정말 맛있다.”

두 사람은 배를 두드리며 호텔로 들어갔다. 옷에 가득 배인 고기 냄새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섬유 탈취제를 잔뜩 뿌려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겨울이지만 하나도 추운지 몰랐던 하루.


다음 날은 동네 카페에서 노닐기로 했다. 눈덮인 너른 설원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카페였다. 책을 읽다 보니 창 밖 테이블에 강아지와 산책 나온 모녀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강아지가 몇 살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제 한 살입니다. 시바예요.”

강아지는 견종답게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고집이 매력적인 시바 강아지였다. 자꾸 어디론가 가려고 리드줄이 탱탱해지도록 네 다리를 버티고 섰다.

“안녕. 시바 짱.”

“모모 짱이에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여자아이랍니다.”

“어머나- 모모 짱. 정말 귀엽구나.”

지원의 일본어를 듣더니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물었다.

“한국 사람이세요?”

한국어로.

지원은 반가운 마음에 한국어로 답했다.

“네. 한국 사람이에요.”

“안녕하세요. 반가, 반갑습니다.”

더듬더듬 펼쳐지는 한국어가 정말 귀여웠다.

“한국 드라마 좋아해요. 그래서 가끔씩 한국어 공부해요.”

“우와- 정말 유창하시네요.”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지원의 일본어를 되려 칭찬했다. 아이의 할머니, 즉 자신의 친정엄마가 키우는 강아지인데 연로하셔서 산책을 못 시켜서 주말마다 이렇게 자신과 아이가 함께 산책을 시켜준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 드라마에 대하여, 한국 배우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했다.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많은 일본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참 호의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결국 강아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홋카이도를 좋아하셔서 좋습니다.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계속 홋카이도가 좋은 곳이기를 바랄게요.”

모녀는 웃으며 다시 공원으로 걸어갔다. 공원이라고 하지만 전부가 눈으로 덮여 그냥 설원처럼 보였다. 한별과 지원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음료는 거의 식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따뜻해서 식은 커피도 맛이 좋은 것 같았다. 공원의 갓길을 따라 ‘걷는 스키’를 타는 무리가 이따금씩 지나갔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이렇듯 가까운 공원에서도 스키를 탈 수 있다니 부러움도 스쳤다.


다음 날엔 비에이로 가는 호텔 셔틀을 탔다. 흰 수염 폭포가 바로 곁에 있는 료칸에서 운행하는 버스였는데 아사히카와 역 바로 앞에서 픽업을 한다고 해서 호텔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셔틀에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비에이 역에서 두 팀을 더 태웠다. 작년 여행에서 흰 수염 폭포는 가본 적이 있지만, 청의 호수는 겨울이라 볼거리가 없다는 이유로 투어에서 제외된 탓에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지원은 청의 호수 라이트 업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료칸을 찾아서 예약을 한 것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라이트 업을 보려면 미리 예약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오래된 다다미 방이었지만, 비에이 숲속의 정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따뜻한 공기를 뿜어내는 라디에이터에서 쉬- 소리가 났다. 그 조차도 이곳 비에이와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짐을 내려두고 걸어서 흰 수염 폭로로 향했다. 관광 버스가 한 대 도착할 때마다 인파가 밀려들었다가 줄었다, 를 반복했다. 우리도 작년 이맘때쯤 그 인파 중 하나였는데, 올해는 이렇게 여유롭게 비에이를 즐긴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 폭포 뒤편 멀리로 다이세쓰 산의 능선이 근사하게 펼쳐졌다. 어쩌면 이 추운 겨울에 이토록 따뜻한 물이 폭포로 떨어질까. 어쩌면 이렇게도 청아한 푸른 색일까. 과학적인 설명이랑 내려두고 그저 신비한 풍경에 다시 넋을 내려놓았다.

료칸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마치고 로비로 나와 셔틀을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니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지원과 한별에게 다가와 가기를 청했다. 셔틀에 오르니 이번에도 두 사람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야스카와’라고 소개했다. 예정된 출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출발을 한 그는 우리에게 이 숲의 또 다른 비밀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출발시간도 다르고 원래 정해진 코스도 아닌 곳을 간다니. 지원은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여성 한 명과 어린이 한 명 쯤은 성인 남성이 상대하기 우스울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지원의 그런 경계가 미안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유키 짱-”

기사의 부름에 셔틀 곁으로 나온 것은 사람이 아닌 여우였다. 기사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산에 사는 어미 여우인데, 그가 이렇게 차를 몰고 오면 인사라도 하듯 숲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가끔씩 제 식구들도 데리고 와서 보여준다고. 기사의 말처럼 유키 짱은 기사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기사가 손을 내밀자 마치 악수라도 할 것처럼 곁으로 다가왔다. 지원과 한별은 그런 진귀한 만남을 하게 해준 기사에게 너무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유키 짱과 작별을 고하고 셔틀은 다른 료칸에 들렀다. 그 사이 야스카와 상은 자신의 한국 드라마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중에 ‘승은이 망극하옵니다’의 구체적인 뜻에 대해 질문을 해서 지원을 당황하게 했다. ‘임금에게 받은 은혜가 한이 없다.’를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까. 지원은 평소 학생들에게 이런 말이 영어로 단순히 ‘Thank you’로 번역되는 현실을 소개하며, 우리가 외국어를 잘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 나라의 말을 잘 배워야 그들의 언어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정작 그녀야말로 그 말을 어떻게 표현해 줘야 할지를 생각해두지 않았다. ‘도-모 도-모 도-모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정도라고 설명하면서도 그녀는 자신만 아는 부끄러움에 한참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야스카와 상은 여전히 신이 난 목소리였다. 아까 낮에 셔틀에서 만났던 두 팀을 더 태우고 본래의 목적지인 청의 호수로 갔다. 주차장에 들어서니 이미 멀리서 하늘을 향해 푸른 빛을 쏘고 있었다. 6시까지 셔틀로 돌아오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빛의 근원을 찾아 걸었다. 푸른 빛은 밤하늘 전체를 채색해 밤하늘은 파란 잉크로 물들었다.

그때,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아래도 눈발이 흩날리면서 파란 잉크 밤하늘에 별처럼 하얗게 점을 찍었다. 호수 위는 얼어서 그 위에 눈이 덮여 있었고, 곳곳에서 파란 빛이 호수를 무대 삼아 춤추고 있었다. 호수 주변을 둘러선 나무에서 늘어진 앙상한 나뭇가지가 도화지에 지나간 날카로운 붓질처럼 선명했다.

화려한 라이트 쇼 가운데 가장 압권은 모든 빛이 멸한 암흑의 순간이었다. 고요와 암흑. 마치 자신이 태초의 인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불이 켜지면서 생크림 케이크 위에 꽂힌 초들처럼 앙상하게 자라는 호수의 나무를 비췄다. 그리고 다시 파란 빛으로 물들여지는 광경이 반복되었다. 푸른 호수였어도 멋있었을 청의 호수는 눈 덮인 모습으로도 충분히 근사했다. 행복했다. 말없이 곁에 선 한별을 바라보자 한별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지원은 허리를 낮춰 한별에게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감촉이 경쾌했고 마음 속은 뜨끈했다.

셔틀로 돌아오자 야스카와 상이 사람들을 반겼다. 그리고 료칸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로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그곳의 이름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걸어가면 멋진 트리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지원과 한별을 포함한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시로가네 비르케’라는 이름의 휴게소였는데 건물 뒤편으로 가보니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화려한 램프 장식을 한 채 근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원과 한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계획에 없던 낭만을 즐겼다. 셔틀로 돌아와 모두 야스카와 상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그는 넘실넘실 웃으며 “사-비스, 사-비스”라고 말해주었다.


호텔 조식은 현지 식재료를 이용한 뷔페였는데 하나같이 신선하고 따뜻하고 맛이 좋았다. 특히 신선한 해산물을 마음껏 넣어 카이센동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한 부분이 지원은 마음에 들었다. 셔틀을 타고 호텔을 나와 비에이 역에서 내렸다. 마침 근처 호텔에 방 하나가 있었다. 아직 체크인 시간이 많이 남아 지원은 호텔에 짐만 우선 맡기고 나왔다.

역 근처에는 유명한 찻집과 음식점이 많았지만, 지원은 말차와 흑설탕 콩가루 라떼가 맛있다는 찻집으로 갔다. 아이스크림 맛이야 이제 홋카이도에서는 칭찬도 입이 아프다. 그러나 흑설탕 콩가루라니. 콩가루 모찌와 흑설탕 카페 라떼, 말차 라떼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말차 시럽을 아이스크림에 뿌리자 햐얀 아이스크림 산 아래로 초록의 말차 스키어가 유유하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콩가루 모찌는 한국의 인절미와는 조금 다른 식감으로 부산에서 먹었던 물방울 떡과 유사한 식감이었다. 곤약보다는 쫄깃하고 인절미보다는 느슨한 그 중간 정도의 찰기랄까. 커피를 마시며 지원은 다음 날의 일정을 생각했다.

계획대로라면 유빙을 보러 아바시리 쪽으로 이동이다. 하지만, 그 시기 유빙은 아직이었다. 카페 운영자의 안내대로 유빙 지도를 며칠 동안 봤었지만, 유빙은 홋카이도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경로를 바꿔야 한다. 유빙 워크든 쇄빙선이든 이 시기에 어렵다면 여러모로 동쪽은 포기하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노보리베츠와 하코다테로 이동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고민의 중심에서 지원은 제법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늘어났다. 큰 변화였다.

찻집을 나와 한별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회색 돌벽 위로 하얀 린넨 바란스 커튼 세 장이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옆에 긴 세로로 된 보라색 원단에 카페 이름이 멋스럽게 새겨져 날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찻집 청년이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의 눈을 쓸기라도 할 작정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청년이 대뜸 둘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주문을 하려고 서있는 지원과 한별을 보자마자 한국인임을 알아차렸었다. 그리고 아주 반가운 듯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아마 그는 자신의 호의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둘만의 사진이 적었는데 무조건 감사한 제안이었다. 카페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힘껏 브이를 했다. 청년이 유쾌하게 웃으며 “다른 포-즈”를 요청했다. 한별과 지원은 두 개의 하트를 만들어 청년을 보며 웃었다. 청년은 한국어로 “귀여워”라고 말하며 두 사람의 사진을 정성스레 찍었다. 청년에게 듣는 귀엽다는 한국어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아마 일본인에게는 그들의 ‘카와이이’만큼 최고의 칭찬의 표현이 그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카츠산(돈까스 샌드위치)과 가리비 그라탱, 그리고 생강 라떼를 사 먹었다.


일전 일본 여행에서 현금이 똑 떨어진 상황이 있었다. 당시 택시는 현금만 사용이 가능했던 상황에서 남편과 지원이 당황을 하며 편의점으로 가려는 찰나 한 일본인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현금을 쥐어주었다. 두 사람은 그에게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을 하며 “당신들이 일본에서 좋은 기억만 가지고 돌아가면 좋겠다. 나는 그걸로 족하다”고 이야기했다.

지원은 홋카이도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자꾸만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부흥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제 쇄락의 길을 걷는다는 일본이 여전히 세계 속에서 목소리를 내며 온전히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놓은 국제적 입지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전해오는 인간적 따뜻함이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없을 국민성이 아닐까 생각하며 한별을 바라보았다. 역사 왜곡을 부추기는 일본 정치인들과 우익 학자들만 원망하면 될 일이니까.


‘별아, 너의 세상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보다, 오늘처럼 누군가와 웃는 날이 많기를. 너희들의 세상에서는 부디 무조건적인 혐오는 없기를 바라.’


아이에게도 백 마디 말보다 더 나은 경험을 하게 해준 것 같아 지원은 오랜만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 뒤편으로 ‘쪽바리들의 나라에 돈 보태주러 가냐’는 시아버지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좋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내 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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