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오타루 애호가
실내가 깜깜해진다.
뒤통수를 가로질러 강한 빛이 비추어지고 이윽고 하얀 설원을 그려낸다.
히로코의 터져 나오는 숨.
하늘을 응시하며 차가운 바람의 여운을 느끼다 설원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
그 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하늘 위에서 그녀를 조망한다.
찬찬히 연주되는 <HIS SMILE>.
당시만 해도 일본의 영화는 물론이고 음악조차도 개방되지 않았던 때라, 주로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영상을 불법으로 틀어주고 이를 돈을 내고 관람하곤 했다. 지원도 X-JAPAN의 콘서트 영상이라던가, <러브 레터> 같은 것을 이런 비공식 루트를 통해 접했었다.
오겡끼데스까-
안타까운 여주인공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기도 전에 그녀는 대답을 한다. 나는 잘 지내고 있노라고.
그 설원이 오타루였다는 것을, 지원은 첫 오타루를 다녀오고 나서 알게 되었다. 오르골의 황홀한 소리가 있을 것이라는 것과 오타루로 향하는 기차의 오른쪽에 앉으면 눈 내린 바다의 풍경을 보며 갈 수 있다는 두 가지 정보가 오타루에 관해 알고 있던 전부였다. 아련한 어떤 이가 전해준.
그녀의 첫 오타루는 이런 기억들로 장면 장면 남아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묵었던 오타루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숙소. 노란 가로등. 영롱한 유리 공예품들과 아기자기한 눈사람들이 곳곳에 있던 노란 거리. 그리고,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테이네(手稲)라는 곳에서 환승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친절히 알려주던 호텔 직원. 비행기를 놓쳐서 잃는 것은 돈뿐이지 사람은 아니라며 여유를 가지라던 오타루.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와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녀의 바람에 따라 작년 가족 여행에서 제일 먼저 발걸음을 한 곳이 바로 오타루였다. 가족들에게 이곳의 황홀한 낭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타루의 낮은 매우 짧았다. 게다가 텐구야마(天狗山)에서 내려왔을 때 폭설로 JR이 운휴한다는 소식으로 가게들은 본래 폐점 시간보다 앞당겨 문을 닫았다. 그녀의 바람은 쉬이 이뤄지지 못했다. 아름다운 오타루의 저녁 풍경을 여유롭게 거닐지 못했고, 혹시 삿포로로 가는 JR을 못 탈까 봐 조급함으로 지나와 버린 오타루. 그렇게 또다시 아쉬운 도시로 남겨두고 돌아섰던 첫사랑 같은 도시. 지원은 이번에는 그녀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첫 나흘을 오타루에 머물기로 작정한 것이다.
“별아! 오타루에 오면 가장 하고 싶은 두 가지가 뭐라고 했지?”
“수족관이랑 텐구야마.”
“그럼, 오늘은 그 둘 중에 한 가지를 해볼까 하는데……,”
강풍이 불면 그 즉시 로프웨이 운행이 중단된다.
“텐구야마는 날씨가 매우 중요해. 로프웨이가 운행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 잠깐만. 엄마가 텐구야마 로프웨이 운행하는지 살펴볼게.”
때로 일시 운휴인 경우도 있고, 종일 운휴인 경우도 있는데 아직까진 일시 운휴 상태이다.
“음……, 산 위쪽에 바람이 많이 부나 봐. 아직까진 로프웨이를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네. 우선은 수족관부터 가보고 날씨 상황 봐서 텐구야마에 가보자. 혹시 오늘 못 가면 내일도 있으니까.”
장기 여행이 이렇게 좋은 거라니.
“좋아!”
“그럼, 필요한 물건을 가방에 넣고 출발하자.”
“응! 알겠어!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리스트를 좀 작성해 놨거든? 그걸 보면서 내 꺼를 챙겨볼게.”
“우아- 정말? 엄마한테 진짜 큰 도움이다.”
“헤헤. 정말?”
한별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지원도 짐을 챙겼다. 혹시 모를 추위에 덧입을 경량 조끼와 갈아신을 양말, 털모자, 새로 산 카메라, 보조 배터리, 충전케이블, 여권, 지갑.
호텔 밖으로 나오니 화창한 날씨에 눈이 부시다. 호텔에서 역까지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되는 거리인데, 걷기가 쉽지 않았다. 한별이 호텔 밖을 나오는 순간부터 눈오리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 지난번이랑 다르게 눈오리가 잘 만들어져. 이것 봐봐.”
“정말 그렇네! 홋카이도 눈은 밀가루 같은 눈인데, 이번에는 꽤 잘 뭉쳐지네.”
“‘스노우 파우더’라고 했지?”
“응. 맞아. 우리 별이 잘 기억하고 있네.”
동화 계에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길’이 있다면, 이곳 오타루에는 ‘한별과 지원의 오리 길’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느리고 기다란. 그러나, 지원은 재촉하지 않았다. 오타루에 조급함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지원 나름의 절대 규칙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넉넉한 기간도 있지 않은가.
한별은 이미 다져진 눈길을 걷는 것을 마다하고, 굳이 자신의 무릎만큼 쌓인 눈 위를 걸었다. 밟는 족족 신발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부츠 안으로 눈이 흘러들어가는 사태를 매우 여러 번 경험한 끝에 오타루 역 건너에 도착했다.
오타루 역을 중심으로 왼쪽에 두 개의 건물이 있다. 안쪽이 시외버스 터미널이고, 바깥쪽이 오타루 시내와 근교를 다니는 버스들을 탈 수 있는 곳이다. 작년 기억대로라면 시외버스 터미널 쪽에 가서 텐구야마 로프웨이와 시내버스 원데이 티켓이 묶인 세트권을 살 수 있다. 혹시 운행 상태가 변경됐을지 확인해 보았지만, 날씨는 여전히 로프웨이를 강제 휴식 상태에 두었다. 하는 수 없이 지원은 오타루 수족관 행 버스 티켓만 구입했다. 지원 몫은 240엔, 한별은 120엔이었다.
초록색 바탕에 흰 글씨로 ‘오타루 수족관 행’이라고 쓰인 기둥이 서 있는 3번 승강장에 줄을 섰다. 산을 경유하는 11번 버스와 오타루 수족관이 종점인 10번 버스가 20분에서 30분 간격으로 교차 운행되어 버스는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익숙한 듯 두 사람은 뒷문으로 탑승했다. 뒷문을 기준으로 뒤편에는 운전석 쪽을 바라보는 2인석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고, 앞쪽에는 같은 크기의 2인 좌석이 서로 바라보고 앉는 형태로 이웃해 있었다. 좌석은 지원의 중고생 시절 버스처럼 낡은 시트가 덮여 있었는데, 정갈하게 잘 사용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도록 단정했다. 겨울 외투를 입은 두 사람이 앉기에는 비좁았으나 그 누구도 불평하는 이 없이 조심해서 앉았다.
버스는 꽤나 울퉁불퉁한 길을 높이 높이 올랐다. 교행이 가능하지 않은 지점에서는 서로가 마다 않고 기다리며 양보하는 모습이 과연 일본답게 느껴졌다. 25분 정도 달렸을까. 버스는 종점인 오타루 수족관에 도착했다. 지원은 한별의 손을 잡고 앞문으로 가서 티켓 두 장을 운전사에게 내보이고는 요금함에 넣고 내렸다. 표지판에 붙은 오타루 터미널행 버스 시간을 사진으로 찍은 후 수족관으로 향했다.
수족관의 외경은 마치 영화 <워터 보이즈>에 나오는 듯한 꽤 오래된 모습이었다. 어른 1300엔, 아이 500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시설에는 어른에 준하는 과한 요금은 부과하는 우리나라와는 참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지원의 티켓에는 물범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한별의 티켓에는 펭귄의 뒤태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자 환영한다는 문구와 함께 개관 50주년이라는 메시지와 감사 인사가 새겨진 현수막이 가로로 길게 붙어 있었다. 지원은 이름을 알 리 없는 커다란 거북이부터, 자라는 환경이 바다 또는 호수인지 하천인지에 따라 그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성장한다는 송어, 남편이 제주에서 잡은 무시무시한 외형의 볼락을 닮은 어떤 물고기, 고양이처럼 파이프 같은 구멍만 있으면 자신의 몸을 끼워 넣는 곰치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아침을 거르고 온 탓에 두 사람에게 슬슬 허기가 찾아왔다. 식당은 2층에 있었는데, 자판기에서 식권을 사서 원하는 자리에 앉아 먹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지원과 한별은 바다를 향해 있는 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별이는 뭐 먹을래?”
아이의 이목을 끄는 메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거북이 모양의 오므라이스인 카메 타로군 런치와 돌고래 틀로 찍어낸 밥 주변에 카레를 덮은 이르 카레였다.
“이거랑 이거 궁금한데.”
“카레 타로군 런치는 오므라이스야. 카메는 거북이라는 뜻이고, 타로는 맏아들, 보통 장남이라고 하지? 첫째 거북 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이건 보다시피 카레. 이르카가 돌고래라는 뜻인데 거기에 카레라는 말을 합성해서 이르 카레라고 지은 것 같아. 되게 귀여운 이름이다. 그치?”
한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두 가지 메뉴 중에 선택이 고민되는 모양이다.
“참고로 엄마는 돈까스 카레 먹으려고.”
“앗! 그럼 나는 오므라이스 먹어야겠다. 헤헤. 엄마 덕분에 고민 해결!”
오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한별의 오므라이스는 노란 계란 위에 붉은 케찹으로 거북이 등껍질 모양을 냈고, 머리는 꼬마돈까스로, 다리 네 개는 비엔나 소시지로, 새우튀김으로 꼬리를 만든 후 주변에 하이라이스 소스를 깔아 바다를 헤엄치는 거북의 모습을 표현했다.
한별이 한껏 기대를 하고는 한술을 떴다.
“엄마……. 아이들 메뉴는 역시 모양만으로는 믿을 게 못 되는 거 같아.”
“하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맛이 별로야?”
한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는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별로라기 보다는…… 되게 맛있다고 할 순 없는 정도?”
맛에 민감한 아이라서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아이의 입맛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한별이 평범하다고 하면 정말 그런 맛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원의 카레 역시 일본식 카레 특유의 깊고 그윽함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유원지에서 익히 먹는 보통의 맛이었다.
“크크. 그래? 그럼, 엄마꺼 먹을래?”
“그래도 돼?”
“그러엄!”
지원과 한별은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찬 삼아 싹싹 긁어 먹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돌고래와 물개 공연 시간과 얼추 맞았다. 공연장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없어, 두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았다.
먼저 물개가 미끄러지듯 등장해 인사를 했고, 다이빙을 한 후 수영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뒤이어 돌고래 세 마리가 등장해서 사육사와 악수를 하고, 장대 높이뛰기를 한 후 우리 앞쪽으로 미끄러지듯 올라와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엄마, 진짜 진짜 신기해! 저기, 저거 봐봐! 돌고래가 공중으로 점프했어!”
“진짜로 저렇게 높은 소리를 내는구나. TV랑은 완전 달라.”
“왜 돌고래 소리 같다는 말이 있는지 알 것 같아.”
처음 본 실물 돌고래가 신기한 듯, 한별의 목소리는 점점 더 들떠 있었다.
“별이는 수족관에서 돌고래를 본 게 처음이지?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돌고래의 행복권을 위해 제주도 바다에 풀어줬거든.”
“응.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어. 근데……, 돌고래 행복권이 뭐야?”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면 수족관 안에서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아……, 그렇겠네. 그럼, 이곳은 어째서 가능해? 바다 옆에 있는 수족관이라 그런 건가? 여긴 바다랑 친구라서 돌고래도 괜찮은 걸까?”
“글쎄……. 어쩌면 일본의 돌고래 행복권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지원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인간의 기본권이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듯 돌고래도 그럴 터였다. 하지만, 나라별로 인식과 문화가 다른 것이니 그걸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는 동물원이나 수족관 자체도 없어져야 할 테니까. 그래서 한별에게는 이 정도로 설명을 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커서 스스로 동물원과 수족관에 대한 자기 생각을 가질 때까지 지원은 기다릴 작정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본관으로 돌아와 구경을 이어갔다. 해먹에서 유유히 놀고 있는 수달을 보느라 한참을 서 있었다.
“어쩜 저리도 평화로울까.”
어린 개체도 성체도 모두 아기 같은 모습의 수달은 만화 캐릭터만큼 참으로 귀여웠다.
“엄마. 수달과 해달을 구별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글쎄…….”
“딱 봤을 때 똑소리 나게 생기면 수달, 조개를 빼앗겨도 ‘어어……’ 할 거 같으면 해달이래.”
“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엄청 똘똘하게 생겼네!”
“어때, 엄마 내 말이 맞지?”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 여기 내 앞에도 수달이 있네?”라고 말하며 앞서 걸었다. 한별이 어리둥절하며 지원을 따라왔다.
“나? 엄마, 나 말한 거야?”
지원은 대답 대신 한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별아! 아까 식당에서 바다 보였잖아. 그쪽으로 한 번 나가볼까?”
“좋아!”
그곳에는 오타루 수족관이라는 큰 표지목이 있었고 그 뒤로 너른 바다가 펼쳐졌다. 날이 흐려서 멀리까지 내다보이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보였다. 지원은 자신이 있는 곳이 수족관이 아니라 바다에 속한 놀이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펭귄 산책 시간까지 아직 30분 정도 남았거든. 그 전에 여기에서 놀자.”
잠시 후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별은 스치는 눈바람이, 만나게 될 펭귄이, 밟는 곳곳 눈이라는 사실이 매우 신나 보였다.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눈오리를 만들었고, 누구도 밟지 않은 눈밭에 거리낌 없이 백-다이빙을 했다. 눈밭에서는 넘어져도 깔깔거렸고, 대왕 고드름을 찾았다고 으쓱해 하기도 했다.
펭귄의 산책로는 한별의 허리 높이의 눈들이 쌓인 ‘눈의 동산’이었다. 눈 동산은 사람들이 걷는 길과 펭귄들이 걷는 길 정도로만 구분이 되어 있었다. 점점 굵어지는 눈이 한별의 패딩 모자 위로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펭귄 산책길임을 나타내는 표식도 눈에 잠겨 이제 얼굴만 겨우 드러내고 있었다. 지원과 한별의 발자국도 금세 눈에 뒤덮여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눈이 내릴 즈음, 펭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스노우 부츠를 신은 사육사가 앞장섰고, 그 뒤를 작은 펭귄들이 뒤따랐다. 작년 아사히야마 동물원에서 본 아이들보다 덩치가 작은 녀석들이었고, 구경하는 인파가 적어 더 가까이서 펭귄들을 볼 수 있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소풍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 같았는데, 딱히 정해진 길로 산책을 하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한참 동안 펭귄들을 관찰하던 한별이 말했다.
“엄마, 얘네들은 지금 전력 질주하는 걸지도 몰라.”
한별의 말을 들으니 작은 펭귄들이 정말 사력을 다해 걷는 것 같아 지원은 한편으론 웃음이 나기도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가? 아이쿠. 넘어졌어. 아구 아구 괜찮니?”
작은 몸뚱이가 폴랑 넘어지더니 금세 번쩍 제 몸을 일으킨다. 언제 넘어졌냐는 듯 다시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인형 같아, 엄마. 건전기 넣고 움직이는 인형 말야.”
“그러게. 정말 그렇다. 어쩜 이리도 귀엽니. 별아 여기 봐봐. 날개에 이름표가 있어. 논, 피스케……”
여기저기 넘어지는 펭귄들. 여기저기 깔깔거리는 아이들 소리. 천지가 귀여운 존재들 투성이다.
“오타루 수족관에는 13마리의 젠투펭귄이 있습니다. 젠투펭귄은 머리에 흰 줄무늬가 있으며 노란 부리와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친구들은 호기심이 강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키는 약 80㎝, 몸무게는 5kg에서 7kg으로……”
귀여운 이유가 있었다. 딱 어린아이들 체격과 성격을 가진 존재들이어서였다.
“서른네 살 대디, 스물다섯 살 봉, 스무 살 보봉, 열여섯 살 나츠와 얏코, 열 살 나디, 아홉 살 히나 고로, 일곱 살 피스케, 여덟 살 논, 여섯 살 헤이, 세이, 호이, 다섯 살 마이케르입니다.”
사육사의 소개를 듣고 지원이 한별에게 알려주며 말했다.
“별아. 여기 한별이보다 어르신 펭귄들도 계신다. 그리고, 나디는 한별이랑 동갑 친구야.”
“어디? 어디?”
“여기 여기 이 아이.”
“안녕, 나디. 반가워. 난 친구 선한별이야.”
한별이 펭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름이 헤이, 세이, 호이인 아이들도 있어. 이름 너무 귀엽다. 그치?”
“응응. 엄마, 얘가 피스케야? 헤헤 이름 진짜 펭귄스러워. 레시, 골든, 토토 보고싶다.”
한별이 아끼는 동물 인형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두 사람이 희희낙락 떠드는 사이, 녀석들은 몇 바퀴 눈 동산 산책을 마치고 다시 자기들 집으로 돌아갔다. 펭귄들은 제 집안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고 놀고, 한별은 제 친구가 누구인지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리 벽으로 손가락을 내밀자 입을 맞추듯 다가오는 녀석들 덕분에 한참을 행복하게 웃었다. 먹을 것을 건네는 손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미안해할까 봐 지원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여유롭게 펭귄들을 보니 이제 아쉽지 않게 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우리 바이바이 하자.”
눈은 이제 그쳤으나 하늘은 여전히 눈구름으로 먹먹했다. 버스정류장 부근엔 적설량을 확인하는 폴대만 덩그러니 서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니 한별은 노곤한 듯 지원에게 기대 금세 잠이 들었다. 덜컹이는 버스에 몸을 맡기며 지원도 한별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맞댔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낮에는 못 봤던 재미난 광경이 눈에 띄었다. KFC, 이른바 켄터키 할아버지 동상의 두 손에 치킨이 아닌 커다란 눈덩이가 얹어져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수염, 그리고 하얀 눈덩이가 꽤 조화롭게 보였고, 할아버지의 미소 또한 더 행복해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 잠시 몸을 녹이고, 오타루 운하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 운하에 대해서 지원은 참 할 말이 많다. 오타루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며, 첫 오타루에서 그녀는 꽤 근사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유행도 변하는 건지 노랗고 그윽했던 조명이 아닌, 파랗고 흰 LED 조명으로 변했다. 낭만보다는 경쾌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게 영 탐탁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원은 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사진이 훨씬 낭만적인 장소라는 것을. 찰칵-. 사진으로 찍고 나니 예상대로 역시 근사하다. 혼자 찍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으로 북받치고 있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 사이로 흩날리는 눈과 골목길. 실제적 본질과 가공된 실제 사이에서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던 지원을 구제해 준 오타루 운하의 근사함. 10년 후의 한별에게는 오타루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궁금한 밤이었다.
“별아. 잘 담아둬. 오늘의 오타루. 엄마는 오타루가 너어무 좋다? 저번에는 여유가 없어서 별이에게 오타루가 너무 힘든 곳이 되어서 아쉬웠어. 이번엔 별이도 엄마처럼 오타루가 따뜻한 곳이면 좋겠어.”
“엄마. 저기 봐봐, 영하 7도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에이- 알지, 엄마. 엄마랑 있어서 더 따뜻해. 오타루.”
주고받는 농담이 따뜻해서 두 사람은 추운 줄도 몰랐다. 그들에게 시작된 ‘어떻게든 되겠지 여행’의 두 번째 날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오타루 애호가’라는 자평이, 이제는 지원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