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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페티예(Fethiye)에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길

by 미네

온갖 반찬과 밥솥, 옷, 비상용 상비약 등 온갖 장비를 차에 다 넣고 늦은 여름 여행을 다녀왔다. 이미 아이의 학교는 개학을 했지만, 지난 한국행 때 바다는 육지보다 한 계절 느리다며 스킨스쿠버가 취미라는 콜밴 아저씨의 말씀을 듣고, 한국은 어느새 서늘한 9월, 튀르키예 페티예로 여행에 나섰다.

파묵칼레, 페티예, 이즈미르로 이어지는 긴 여행이 끝나고 산더미 같은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여행 동안 사용한 물건들을 정리한다. 여행동안 아이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더니 그래도 올해, 한 뼘 더 크긴 컸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 뒤척이긴 했지만 약을 먹고 이른 아침, 웃으며 학교에 갔다.


페티예(Fethiye), 이 여행지는 지난 봄에 예약을 했다가 남편의 회사 일로 취소한 후, 늦은 봄 어쩌면 또다시 취소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예약한 공간이었다. 주재원 생활을 시작한 후,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 아저씨들처럼 선임들의 훈계에 따라 여행을 열심히 다니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지나고 나면 여행 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그들의 말에 따라 더 열심히 떠나야 하지만, 남편의 업무, 그리고 아들의 알레르기 증상, 나의 체력 등, 좋으면서도 다녀오면 진심으로 피곤하다.

한국을 다녀온 후, 몸이 아직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인지. 정말 마음 때문인지, 몸 때문인 건지. 요즘 참으로 더 피곤한 건 나이 탓 인가.




내가 어린 시절, 나는 움직이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리고 깨끗하고 안온한 나의 집, 나의 방에 친구들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제법 나이를 먹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친구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 솔직히 잘 가지 않았다. 여행을 가서는 신이 나지만 다녀와서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 여전히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방학이 곧 시작될 학기말 즈음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후두염이 찾아왔다. 일주일을 앓아누워야 몸이 낫곤 다시 방과 후 수업을 하러 학교에 갔다. 생각해 보면 방학 중에도 거의 대부분의 날을 학교에 갔다. 누가 교사가 방학마다 여행 간다고 했어. 나는 나갈 힘조차 없는데, 아하하하. 그렇게 2년을 학교에서 구르고 나니, 몸이 단련이 되었는지 방학이 시작될 즈음이면 크게 아픈 건 똑같았지만, 나가기 싫을 만큼 힘이 없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점심때 학교 급식도 아이들처럼 고봉밥으로 먹었는데, 나름 날씬했다. 아하하하.(옛 기억이라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2년, 학교를 다녀와서 힘이 쭉 빠져 집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친정 엄마는 늘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방학이 시작될 즈음 배터리가 방전된 나의 몸에 병원약을 넣어 며칠을 앓고 나으면, 다시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방학이지만 방학이 아닌 삶, 그런 반복된 일상이 괴로워서 여행을 계획하고 혼자서 떠나기 시작했다.

교사라는 이미지 속엔 이중적인 시선이 있다. 존경의 의미도 있겠지만 방학이면 신나게 논다는 시선이다. 분명 다른 직장인보다 방학이 있어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학기 중에는 오히려 다른 직업에 비해 연가 등 휴가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학교 교육과정에는 법정수업시수가 있고, 교과마다 학기 초에 정해진 계획이 있어 이 학사운영은 천재지변이 없는 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즉, 내가 학교에 없으면, 내가 수업하는 그 시간에 같은 교과의 다른 교사가 나를 대신하거나 또는 내 수업을 다른 시간과 교체하여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그 시간에 반드시 나를 대신해야 한다.


신종플루가 한창 유행이던 2009년, 그 시절 아이들이 하나 둘, 결석을 시작했고 선생님 몇몇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병가를 내기 시작했다. 요즘이야 코로나19로 인해, 전염병에 대한 주의와 관심이 높아 이런 일이 학교에서 절대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이대로 가면 연간 교과 수업 시수를 다 채울 수 없다며, 아파도 학교에서 아프라는 학교 어른들의 소리를 들으며 열이 39도를 넘기는데도 학교에 꾸역꾸역 출근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아파도 목에 수건을 두르고 목 아픈 것을 참아가며 마스크를 쓰고 아이들에게 수업을 했고, 그리고 내가 가르친 학생들 또한 엄마가 그래도 학교 가서 누워있으라는 말에 아프면서도 학교에 그렇게 왔었다.

그랬던 학교가 2023년의 지금, 누가 뭐라 해도 '코로나 19'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그리고 학교를 변화시켰다.



특히 학기 중에 나의 교과 특성 때문인지, 일 복 많은 나의 팔자와 성격 탓인지 방학 기간 중, 거의 대부분의 날을 학교에 출근하였다. 수업을 위해서 또는 다음 학기 준비를 위해서, 방학 중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 방학이었지만 학교에 참 많이도 머물렸고, 거기서 많은 어른들과 일했다.

그때도 여행 전 날까지 학교에 남아 그 다음 주에 시작되는 방과후 학교 업무를 정리하기 위해 남아있었다. 그때의 나는 보통 여행 6개월 전에 비행기 발권을 했는데, 만약 내가 겨울 방학에 여행을 2주 간다면 여름 방학에는 업무나 수업을 내가 모두 도맡아 하고, 겨울방학에는 원하던 여행에 돌아와서는 남은 방과 후 수업이나 업무를 모두 도맡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만드는 여행 일정이었다.


처음에는 3박 4일, 5박 6일 이렇게 시간을 늘려가며 혼자서 제주 여행을 떠났고, 학생이 노는 방학은 모두가 떠나는 극성수기인 탓에, 나의 여행 비용은 매번 참으로 사악했다. 그럼에도 유럽, 호주까지 나는 사실 혼자서 잘 다녔다. 내가 패키지여행이 아닌 혼자서 이곳저곳을 여행한다는 말에 나이 지긋한 부장선생님에게도 부럽고 낭만적인 일이었는지 혼자서 표 끊고 길 찾아다니는 네가 부럽다고 연신 이야기하셨다. 부장님께서도 지금 떠나셔도 된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너무 바빠'를 반복하셨다.


그때의 내 눈에는 그녀는 너무 완벽해 보였다. 학교에서는 좋은 교사, 안정적 직장에 따뜻하고 좋은 남편, 공부도 잘하고 예쁜 두 아이까지 모든 것이 준비된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가 크고 학교에 다니면서 방학이라도 학원에 가고, 남편이 회사에 가니, 이제는 떠날 수 없다는 그리고 이젠 혼자선 용기가 없다는, 부러움 섞인 말이었다. 그 시절, 완벽한 그녀가 도대체 뭐가 어려울까 했던 나의 생각이, 다시금 그 선생님의 나이가 되니, 그녀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튀르키예 페티예는 너무 아름다웠다. 파란 바닷물과 뾰족하게 쏟아 오른 바위산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인 이즈미르에서 선택한 호텔은 우리 가족에게는 알맞지 않았다. 이 호텔은 이즈미르 공항 근처의 호텔이었는데, 3인이 추가 요금 없이 숙박할 수 있고 보조 침대를 제공한다는 점이 좋아 예약했다.


하지만 객실은 햇볕이 들지 않고, 창문이 없고 대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아주 큰 베란다 문이 호텔의 복도와 바로 연결이 되는 장애인용 객실이었다. 불필요한 가구와 장식은 없었고 객실 공간은 그 어떠한 호텔 객실보다 넓었다.


하지만 장애인 전용이라 호텔 복도와 객실이 바로 연결되는 탓에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는지 이제껏 묵었던 어떤 호텔보다 먼지가 많았고, 이동의 불편을 없애려고 한 쪽 벽을 유리문으로 바꾼 탓에 호텔 복도에 사생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객실에서 어두운 커튼을 계속 치고 있어야 해서 더 답답했다.


내가 신체에 문제가 있는 지체장애인이고, 휠체어를 탄다면 이 객실은 어떠한 장애물 없이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고, 샤워장에도 간이 의자와 손잡이가 있어 그것을 지지하고 씻기 좋을 듯했다.


한참을 객실이 더럽다고 투덜대다가 남편이 이 객실을 예약할 때, 평점이 아주 높았다는 남편의 말에, 어쩌면 내가 이동의 불편이 없는 사람이라 이 객실에 좋은 점을 못 느끼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월이 지나고 아주 나이가 먹어 몸이 불편해지고 다시 이곳에 왔을 때, 어쩌면 나는 아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변하여 다른 몸이 되면 말이다.


아들을 재우곤 남편과 텔레비전 속, 잘 생긴 조인성을 보며 잠깐 남편의 얼굴과 그를 비교해 본다. 아하하하. 그리곤 점차 영화 속에 빠져든다. 영화 '무빙' 속 김두식이라는 인물,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곤 어떻게 해야 잘 날 수 있냐는 연인의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잘 난다는 건 잘 떨어지는 거예요.'


페티예가 패러 글라이딩 세계 3대 명소라며, 평소에는 돈 주고 무서운 걸 왜 타냐던 남편이 웬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겠다며 하늘로 올라갔다. 돈 받고 높은 데 올라가야지. 왜 돈 주고 위험한 걸 타냐는 핑계로 나는 호텔에 아들과 앉아 있는다. 생각보다 금방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궁금해서 패러글라이딩에 대한 소감을 물어본다.


"내려오는 건, 천천히 내려와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패러 글라이딩 한 번 하겠다고 차 타고 얼마나 꼬불꼬불 올라가는지, 올라가는 동안에 멀미 다해서 기운 다 뺐다. 올라갈 때 속이 너무 힘들어. 근데 내려오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예약해서 해볼래?"


그의 비행이 우리의 여행과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탄불에서 페티예까지 가는 길, 아들이 멀미를 하는 통에 몇 번을 길가에 차를 세웠던가. 참으로 멀어 힘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집에 돌아와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건 이보다도 편안했다. 그저 잔뜩 놓인 빨래를 분류해 하나씩 천천히 돌리는 일 아닌가. 그는 아주 재미없는 놀이기구를 타고 왔는지, 액션 카메라(고#로)로 찍힌 사진값이 너무 비싸다며 자신의 생애 첫 패러글라이딩 기념사진도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끌고 가서 그의 첫 비행 사진을 찾아왔다.

까딱하면 페티예 어느 컴퓨터에서 당신의 40대의 기억이 다 삭제당했을 텐데. 같이 뛰지도 않고 아들 보느라 어떻게 내려오는지 보지도 못했다고, 어떤 건지도 모르는 나랑 무슨 이야기하겠냐며, 곧 있으면 너무 늙어서 돈을 줘도 못 뛴다며 그래도 하늘에서 날았으니 첫 패러글라이딩 사진을 사라며, 영업 아닌 영업을 한다.


다시 이스탄불, 그는 똑같이 회사를 가고, 아들은 학교에 갔다. 그리고 여행 여파로 병원에 다녀와 식구들 차례대로 약을 먹는다. 꿀꺽! 꿀꺽!

그는 어제도 회사에서 돌아와 너무 바빠서, 내게 이제껏 비싸게 산 패러 글라이딩 사진을 한번도 안 봤다며 투덜댄다. 사실은 나도 그 매장에서 컴퓨터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하늘에 떠 있는 그를 봤을 뿐, 그의 사진을 제대로 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가 조인성이었다면 다시 한 번 봤을까.


그래도 이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이스탄불의 긴 여정을 끝나고 내려왔을 때, 하늘을 날고 있는 그를 그때의 우리는, 다시 웃지 않을까. 그런 나를, 그런 너를 서로가 기억해 주길 바라며 나는 그와 아들의 사진을 무수히 찍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천천히 이 비행에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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