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법 크고 난 뒤에, 가끔 아주 쉬운 일을 실수하거나 무언가를 잘하지 못하면 엄마는 내게 가끔 그런 말을 했다.
" 네가 유치원을 안 나와서 그런가."
아니 마흔 살의 내가 유치원을 안 다녀서 무슨 실수를 한다니 거 참! 엄마의 말을 별 의미 없이 듣지만, 사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자주 들은, 전형적인 삼 형제의 중간의 어정쩡한 끼인 아이, 둘째였다. 솔직히 집 근처의 미술학원에 다닌 게 나의 초등학교 이전 사교육의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내가 유치원에 입학할 시절, 일반 유치원 원비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불자님이셨건만 원비가 비교적 저렴한 집 근처 선교원에 나를 보내셨다.그리곤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우고 밥을 먹던 나는 그렇게 신실한 생활을 정리하고, 이사와 함께 갑자기 미술학원생이 되었다.
아빠는 늘 새벽같이 회사에 나가셨고, 집에는 엄마와 언니, 내가 있었다. 아직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 학교를 다녀오면 대충 씻고 내복으로 갈아입고는 텔레비전을 켜서 '딩동댕 유치원'부터 '가요톱텐'까지 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동네에 유명한 속셈 학원에 다녔는데, 원장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엄청 열심히 공부했다. 동네에서 유명한 학원 선생님이었는데 과외로 작게 시작했던 그의 수학 수업의 수강생의 성적이 계속 오르면서 점점 학원 규모가 커졌고, 결국 빌딩 하나를 학원 전체 건물로 쓸 만큼 부자가 되셨다.
어린 시절 나의 언니는 참으로 공부를 잘했다. 분명 나와 같이 엎드려서 '가요톱텐'을 켜놓고 수학 경시 대회 문제를 풀었고, 주말이면 언니는 나랑 같이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봤는데 늘 전교 일등을 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언니에 비해 나는 너무 평범했기에 내 이름 대신 동네에서나 학원에서 '## 동생'으로 불리는 일이 제법 빈번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너무 흔한 영어 공부는 당연히 없었고, 생각해 보면 한글도 제대로 못 쓰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곤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에 늦게나마 남동생을 낳았고, 그렇게 기다렸던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몇 번의 수술과 입원이 연거푸 이어졌고, 당연히 엄마는 오랜 시간 집에 없었다. 그래서 배 깔고 누워 엄마의 밥을 기다리던 생활도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중지되었다.
엄마가 없는 빈 집을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봐주셨는데, 전기밥솥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는 어른이 어린이의 밥을 제대로 차려주실 일은 만무했다. 그때 겨우 초등학생이던 언니와 나는 전기밥솥으로 밥도 짓고, 세탁기도 돌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남동생을 챙기기 위해 병원에 머물려야 했던 엄마의 일상에서, 언니와 나는 온전한 어른 없이 하루를 보내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팠던 남동생은 건강해졌고, 나와 언니, 그리고 어리기만 했던 남동생도 어느새 커서 어른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 각자는 자신의 인생을 가지게 되었고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실패와 성공을 만나고, 그리고 사랑을 했다.
어느새, 배 깔고 누워 숙제를 하면서 '가요톱텐'을 보던 그 아이는 여기 이스탄불에서 그때의 나와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세월만큼 나의 엄마는 참 많이 늙었다. 이제는 그 누구나 나의 엄마를 '아줌마'라는 호칭이 아닌 '할머니'로 부른다.
그녀가 손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내 나이, 마흔 즈음의 엄마는, 기다리던 소중한 아들을 낳은 그녀는 어느새 누가 봐도 '할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설날을 맞아 커다란 솥에 곰탕을 끓인다. 소뼈에 핏물을 빼고 다시 건져내 씻어 오랜 시간 끓인다. 아파트 천장의 벽지가 노랗게 변한다고, 미세먼지가 천식환자에게 좋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자신의 천식은 생각지 않고, 곧 올 자신의 막내아들을 기다리며 뽀얗고 하얀 곰탕을 끓인다. 나의 영상통화 속, 너는 여름에 오냐는 질문을 하고서 오늘 끓인 곰탕 때문에 연거푸 몸을 수그렇더니 허리가 아프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리고 내가 어제 열쇠를 안 챙기고 문을 닫아서, 시떼(site; 한국의 아파트와 같음)의 기술자 아저씨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던 이야기를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다시 그거다.
" 너를 유치원에 안 보내서 그런가."
딸이 마흔이건만, 유치원을 안 가서 열쇠를 잊겠는가. 엄마는 그렇다. 내가 해주지 못했던 그 많은 순간을 기억한다. 알파벳도 모르고도 해외에 가서 크레인 운전을 한 아버지도 살아냈건만, 나의 부모님은 자신이 못해 준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리곤 해 준 게 없는데 잘 커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녀는 그때는 사는 게 바빠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엄마가 효자손으로 얼마나 때렸는지 아냐고 물어보면,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듯이 너희가 너무 착해서 자신은 한 번도 때린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신다. 어릴 때, 언니랑 싸운다고 효자손으로 인정사정 없이 엄청 맞았는데 말이다.
지금의 나는 30년 후, 그때의 나를 기억할까. 지훈이가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는지 친구랑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그리고 지훈이가 잘못한 일에 엄청 혼을 내던 지난 밤의 나의 모습을 기억할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아주 길고 긴 드라마지만, 그저 아주 짧았던 그 한 순간만의 느낌만 기억한 채 살아간다. 어린 시절 엄마 옆에서 엎드려서 텔레비전을 보던 그 순간, 할머니 대신 고사리 손으로 쌀을 안치고는 밥솥에 쏟아나는 김에 깜짝 놀라던 순간,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목놓아 울던 그 순간만을 기억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순간은 사실 그렇게 하나의 영화처럼 이어지는 연속되는 드라마가 아니라, 아주 흐릿한 느낌의 사진과 같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모든 흐릿한 사진들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