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을 몇 년 살며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C'를 한국어의 'ㅋ'로 읽지 않는다. 혼자선 광고나 표지판으로 튀르키예어를 공부하다 보니 부정 표현보다 권유표현이나 감탄을 잘하고, 말하곤 실수한 게 부끄러워 더 많이 웃으니 내가 튀르키예어를 할 때는 웃음이 헤픈, 더 밝은 사람이 된다.
무릇, 사람이 더 허술해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때론 여기 사는 따뜻한 사람 눈에는 귀엽게 보이고, 마음이 바쁜 사람에겐 답답해 보일 것이다. 아직 운이 좋은 탓인지, 나의 어설픈 튀르키예어에 나를 나쁘게 대하는 이곳 사람을 보지 못했다. 가끔 외국인이라는 명확한 외모로외국인 요금으로달라고 하는 일이 생길 뿐, 그저 튀르키예어를 조금 하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칭찬을 받는다.
이제 이스탄불의 물건 시세를 아는 외국인이라 제 기분 따라 비싸다며 안 사고 나오거나, 더 주고도 오니내 얼굴만 보고, 돈을 더 달라고 말한 사람에게 화낼 일이 없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아랫집 할머니는 나를 보며 '자늠(canım, 한국어로 '자기야'와 비슷한 호칭)'이라고 멀리서도 인사를 건네고, 속사포로 쏟아지는 말을 반쯤 못 알아듣고 다 못 알아들었다며 천천히 말해달라고, 어리숙한 웃음으로 대답한다.
아들을 보내고 동네 한 바퀴를 돌다 이젠 내게 모스크가 아닌 자미 (cami)에 들어가 자연스레 인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는, 능청이 늘어난 것도 신기한 일이다.
무릇, 나란 사람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 이리 달라진다.
'C를 'ㅋ'로 읽건 'ㅈ'로 읽건,내가 보는 그 사람은 매한가지인건만 먹은 마음이 다르고 그것을 보는 시선이 다를 때, 똑같은 이스탄불의 하늘도 그 색을 달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