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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 Oct 29. 2022

모든 순간은 다르게 기억된다.

사프란 볼루, 너와 함께 걷는 길

  바닥에 깔린 돌이 너무 미끄러웠다. 많은 사람이 지나간 탓인지 너무 깎인 탓에 아들의 잰걸음에도 제법 어려운 길이었다. 지훈이는 '엄마'를 외치고, 잠깐 멈춘 길 위에서, 아이 소리에 작은 마을  담장 너머 할머니가 수줍게 깎아 건네는 사과 세 조각에 우린 잠깐 거기서 멈춰 서 있었다.


Teşekkürler. (테쉐큘레; 감사합니다.)


 예전 대학생 때, 춘천에 두 번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처음은 1학년 그리고 졸업을 앞둔 4학년, 같은 장소에 나는 갔다. 처음은 언제나 너무나 두렵고 큰 공간이었다. 지방에 살던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가 다시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게 처음이던 대학교 1학년, 순수한 그 시절의 나는 산 넘고 물 건너 상경한 촌 아가씨처럼 어렵게 어렵게 그곳을 향했다.

   다시 시간이 지나 춘천, 취업을 앞둔 나,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 청춘이었건만, 그때 지금보다 마음이 더 늙어있던 나는 같은 공간에서 다른 마음을 느꼈다. 1학년이었던 나에게 마냥 설레고 커 보이던 그곳이 4학년 졸업반, 임용시험을 치르고 답답한 마음을 안고 나선 나에게 그곳은 좁고도 작은 시골 동네였다. 아마 그 사이 서울이란 공간에서 시험공부에 치여 살며 갓 교복을 벗은 그때의 나보다 그동안 더 많은 것을 보며, 마음의 여유라곤 저 멀리에 던져버린 탓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늙어 가고 있었다.




 10월 29일, 튀르키예의 휴일이다. 공화국 수립일(Cumhuriyet Bayramı), 튀르키예도 오스만 제국이었던 시절 즉 왕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에서 근대 국가의 모습인 '공화국'이 된 날이다. 어디를 가도 튀르키예의 국기가 펄럭이는 오랜만의 휴일이다. 대체공휴일도 없는 이곳에서 쉬는 날엔 꼭 놀러 가야 한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자동차로 4시간 30분이 걸리는 사프란볼루에 갔다. 잘 닦인 고속도로를 지나 구불거리는 도로를 지나 도착한 '사프란볼루'. 이제 제법 여기 사는 사람이라며, 튀르키예어를 쓰며 다니는 여행이다. 주변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루면 다 본다며 볼 것도 없다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다행히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오전 일찍 도착해서 단풍도 보며 '토카틀리 협곡(tokatli kanyonu)'을 걷고, 한국의 경주의 사촌 동생 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사프란볼루'의 시내도 걷는다. 오스만 제국 시절의 집이 그대로 있는 곳, 우리로 치면 안동 하회마을 아니면 경주 양동마을 같은 동네다.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본 그 모습은 다른 이들의 설명과 다른, 그래도 제법 아기자기한, 가장 예스러운 튀르키예다운 공간이었다.

 어디를 찍어도 예쁘게 나오는 예스러운 거리와 말라버렸지만 지붕과 벽을 타오르는 포도덩굴과 단풍이 우거진 오래된 거리, 이스탄불의 바자르처럼 연이은 거친 호객이 없는 조용한 공간, 빠른 걸음으로 15분이면 다 돌 것 같은 조그만 시내에서 로쿰과 터키쉬 커피를 마신다. 다소 쑥스러워하는 가게 주인들, 튀르키예어를 하는 내게 꼭 어느 사람인지를 한번 더 묻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은 마치 대학교 1학년 아직 세상을 모르는 나처럼 수줍고 겁 나지만 그래도 어색하게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순수함, 그때의 어린 내가 있었다. 이스탄불의 세련됨과 분주함은 없는, 할머니가 건넨 작은 사과가 어느 소녀의 작은 손길처럼 느껴지듯 작고 여린 공간이었다.

 지훈이와 앉아 남편과 나는 돌길에 앉아 그 사과를 먹었다. 아들이 어리던 그때보다 마음도 커진 우리는 지훈이의 기우뚱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여행하기 좋은 지금, 여기가 사프란볼루이건, 경주이건, 춘천이건 우리는 잠깐 거기서 가방에 있는 먹을 것을 꺼내 나눠먹으면 되는 것이다. 털썩 주저앉아 그냥 귤이라도 까먹으면 되는 것이다. 바쁜 건 없다. 갑자기 비만 오지 않으면,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편안하다.


 만약 지훈이가 작고 어린 아기였다면 걸음이 서툴렀다면 이 여행은 온전히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아들의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추면 된다. 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이 녀석이 나랑 같이 걷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힘들 때는 세상 모든 게 다 멈춰져 있는 것 같지만, 그 순간도 어느새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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