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은,『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안전가옥, 2019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읽고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떠올린 게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악명과 찬양이 자자한 바로 그 에반게리온 극장판.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아 애니메이션은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래도 이렇게 유명한 작품인데 줄거리만 훑어볼까, 하고 검색했다가 웬만한 논문 분량을 압도하는 나무위키 설명을 보고는 포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고리즘의 축복(이자 저주)으로 한 영상을 보게 되는데...(눌러선 안 됐다)
https://youtu.be/Ay5spIdSWHs?si=_jRrXqENdEr_5Mv8
ㄴ심약자 시청 주의...
댓글 밈으로 쓰이는 OST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가 잔잔히 깔리는 가운데 속절없이 주황색 액체로 녹아버리는 인류.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의 무리와 주인공의 대립을 다루는 소년만화는 많다.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절망으로 치닫는 <진격의 거인>에서도 거인들에 맞서 인류의 80%가 소멸한다. 이런 케이스는 오히려 희망적인 편이다. 뭐라도 해볼 여지가 있으니까. 에반게리온은 스케일이 달랐다. 외계인이나 괴물이 사람을 학살하는 것도 아니고, 60억 지구인이 총칼로 멸망에 맞서보지도 못한 채 주르르 녹아 흘러내린다. 어이가 없었던 건 이 장면이 '인류말소계획'이 아닌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것.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녹아 하나의 액체로 용해되는 현상이 '학살'이 아닌 '보완'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인간들은 서로가 타자로서 존재하기에 필연적으로 갈등하고 소외되며(혹은 소외시키며) 완전한 이해, 완전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불완전한 현재의 인류를 '액체'라는 단일한 존재로 승화시키는 것을 가장 완전한 진화로 여긴다(고 작중 누군가 주장한다). 그래. 문자 그대로 완벽한 하나. 몸(?)도 하나 마음도 하나. 맞긴 맞다.
나는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하지 않아서 이 논리가 와닿지 않았지만, 조예은 작가의『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읽으며 어떤 인물에게는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너 녹고 나 녹자'가 행복한 합일로 여겨질 수 있겠구나, 조오금 이해하게 되었다. 에반게리온에서 인류가 LCL용액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는 가상의 놀이동산 '뉴서울파크' 안의 사람들이 분홍색 젤리로 녹아내린다. 한여름 끈끈한 젤리 봉지 안에서 젤리들이 녹아 하나가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습하고 끈적한 정서를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완독하시기를.
8명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재난영화 같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모두가 이 재난을 극복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재난을 대하는 등장인물의 태도는 모두 다르다. 의도치 않게 한 가족을 재난 속으로 떠밀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아이, 재난 바깥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고 관망하는 고양이, 재난을 열렬히 환대하며 한가운데로 뛰어내리는 여자, 영문도 모른 채 이 재난에 휘말린 모녀. 그중 이 재난의 최대 수혜자는 '다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젤리로 하나가 된다면 영원히 이별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에게는 합일이 곧 구원이었다. 한 사람을 향한 집착이 접착으로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상상은 비뚤어진 이상의 극단을 보여준다. 누구나 소외되고 싶지 않다.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 나의 호르몬 작용을 활발하게 하는 그 혹은 은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 정도 적법하게 소유하기 위해 우리는 연애를 발명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넌 나고 난 너야'의 문자 그대로의 실현은 이렇게 끈적하고 끔찍하다. 관계의 진화는 합일이 아닌 분리이다. 우리를 '우리'로 지칭하기 위해 너는 너여야 하고 나는 나여야 한다. 사랑, 우정, 관심, 온정.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모든 정의는 역설적으로 모두가 간격을 둔 완전한 타자이기에 가능하다.
이 소설은 본래 조예은 작가가 안전가옥에서 진행한 창작워크숍에서 써낸 단편소설이었다.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미아>라는 하나의 단편소설을 두 개의 목차로 갈라 각각 처음과 끝에 배치하고, 그 사이를 일곱 개 목차로 채워 지금과 같은 장편소설의 형식으로 완성시킨 것. 그래서 첫 번째 목차와 아홉 번째 목차는 <미아>라는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안전가옥의 첫 번째 오리지널 시리즈가 시작되었고『칵테일, 러브, 좀비』로 이어지는 안전가옥x조예은의 시대가 도래했다.
『칵테일, 러브, 좀비』식으로 이 소설을 소개한다면 '놀이공원, 젤리, 호러'가 아닐까. 산뜻한 소재와 음울한 소재를 결합시키는 조예은 작가의 개성은 몸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어서 먹고 보는 불량식품처럼 즐겁다. 정신건강이야 어떻든 재밌으니까. 진중한 가르침이 물리는 날에는, 하물며 이제는 좀 물러갔으면 하는 여름이 밤까지도 끈질긴 날에는 이런 맛이 당기는 법. 세 시간 동안 도서관 벤치에 젤리처럼 달라붙어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한동안 젤리를 못 먹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