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이 사야코(지음),김은모(역),『고비키초의 복수』,은행나무,2024
인기가 많은데, 나는 그걸 티를 안내!
나 완전 엘리트, 난 하버드 대학교, 성격도 좋아, 싸움도 잘해, 그런데 내성적!
- 하하
여기, 에도 시대 후기 고비키초 극장에 하하 유니버스의 화신이 있다. 눈에 띄게 희고 잘생긴 명문 무사 가문 자제.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한 미소년. 돈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채 유흥가에 떨어진 도련님을 위해 극장가의 모두가 나서서 일감을 찾아주고, 공짜로 숙식을 제공하고, 무술과 연기를 비롯한 교육까지 해준다. 하지만 그는 내성적인 남자. 이토록 열렬한 호의에도 겸허한 남자. 이 정도면 하하버스의 상위호환 아닌가.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싫은 구석이 없는", 호의를 넘어서 그를 위해 애쓰고 싶게 하는 이 남자는『고비키초의 복수』주인공 기쿠노스케이다.
기쿠노스케는 고비키초 극장 뒤편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단칼에 해치운다. 조명 아래 흰 눈을 배경으로 붉은 피를 흩뿌리며. 날렵한 미소년의 극적인 복수 장면은 '고비키초의 복수'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소설은 그로부터 2년 후, 복수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시작된다. '악처'라고 불리는 유흥가에서 살고 있는 목격자들은 문전 게이샤, 여장남자 배우, 소도구 제작자 등 다섯 명의 연극 종사자. 무사 가문의 도련님에 비하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다.
목격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험난한 사건을 겪었을 때 우연히 연극에 매료되었다. 둘째, 누군가의 선의로 극장 일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그들은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확연한 자부심이 있다). 셋째, 기쿠노스케에게 크나큰 호의를 가지고 있다. 각 목격자들의 시점마다 증언이 달라지는 <라쇼몽>식 구성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다섯 명의 증언이 일치했다. 기쿠노스케는 복수를 위해 무사 집안을 떠나 고비키초까지 흘러들어왔고 극장 사람들의 돌봄을 받았으며, 그동안 목격자들 모르게 복수를 준비해 왔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벽하게 복수를 수행했다는 것.
나는 책소개 카드뉴스에서 어렴풋이, 책의 3막 즈음에는 명확하게 소설의 반전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예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아니지만 반전을 알아챈다 해도 읽는 재미가 반감되지 않는다. 보통 미스터리 소설의 재미가 범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죽였는지를 추리하는 데 달렸다면, 이 추리소설(아니 추적소설이라고 해야 하나)의 재미는 증인 한 명 한 명의 기구한 인생과 연극이라는 매개가 그들을 구원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각 목격자들의 특징을 반영한 공간에서 펼쳐지며 극대화된다. 예컨대 1장 '극장 찻집'에서는 문전 게이샤가, 2장 '연습장'에서는 무술 감독이, 3장 '의상실'에서는 여장남자 배우가 등장한다. 하나의 목차가 끝나고 다음 목차 페이지를 펼치면 마치 막이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공간이 바뀌는 극적 효과를 느낄 수 있다. 그곳에서 이 소설의 관찰자는 화자가 아닌 철저한 '청자'의 태도를 취한다. 이 청자는 지면에서 한 마디도 개입하지 않고 증인들의 진술을 충실하게 경청하고, 독자는 청자가 받아 적은 목격담과 인생사를 가감 없이 듣는다.
그들의 증언을 들으면 도대체 기쿠노스케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각기 다른 환경,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사랑을 받을까 궁금해진다(차은우처럼 생긴 걸까?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되짚어보면 기쿠노스케가 털어놓은 고난은 그들이 인생에서 겪은 고난과 조금씩 닮아있다. 한번 눈에 띈 상처는 계속 눈이 간다. 내가 가진 상처와 완전히 같은 모양의 상처가 아니더라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은 소년의 혼자 울다 들킨 얼굴에서 그 옛날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것이 단순한 호의를 넘어서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그러모아 그를 응원하는 동력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독자는 이 소설이 예상과 다른 목적과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그때 시작된다. (…) 반전은 물론 감동까지 안겨주는 미스터리 군상극이다.
- 출판사 은행나무 홈페이지 | 『고비키초의 복수』책소개 중
『고비키초의 복수』는 촘촘히 쌓아 올린 반전으로 달려가는 미스터리 소설이자 연극으로 구원받았던 사람들이 연극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는 휴머니즘 소설이다. 이 서사의 동력은 '연민'이다. '동정'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위치에너지이고 그 낙차가 크면 클수록 더 격한 감정을 일으키는 힘이라면, 연민은 보다 수평적인 힘이다. 연민의 힘을 딛고 선 사람은 상대를 내려다보지 않고 마주한다. 연민의 방향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상처를 받은 사람을, 내가 겪었던 좌절을 겪고 있는 사람을, 내가 양옆으로 손을 뻗어 도울 수 있는 사람을 향한다.
유흥가에 사는 증인들은 기쿠노스케를 올려다보지도,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랍시고 얄미워하지 않고,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 커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어리바리한 그에게 속세의 맛이 어떠냐고 비아냥거리지도 않는다. 그들 또한 비슷한 아픔을 아니까. 주어진 길에서 도망치고 싶은 소년의 마음을 아니까. 기쿠노스케와 목격자들 사이에 놓인 신분의 차이, 환경의 차이는 연민의 힘으로 포개지며 평평해진다. 이것은 다른 모양의 상처가 포개지며 아무는 이야기다.
스무 살 겨울 대학교 동기에게 "너는 글로 위로받은 사람이니까 글로 위로할 수 있을 거야"라는 편지를 적어준 적이 있다. 편지의 그 부분은 오랜 시간 그 친구의 프로필 배경사진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학창 시절 이병률과 김연수에게 빚을 진 그 친구가 국어선생님이 되어 많은 학생들의 감사 메시지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 때문에 국어가 좋아졌다고. 선생님 때문에 책이 좋아졌다고. 나는 늘 이 미신 같은 도움의 연쇄를 믿는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도움을 준다는, 세상은 이런 선의로 굴러가고 있다는 명제를.
꽤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는 하하 유니버스가 있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되기를 꿈꿨다. 다만 난 미량의 호의나 관심에도 쉽게 흥분하고 뿌듯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랑하기 바빠 '티를 내지 않는다'는 조건에 한참 빗나갔지만. 하지만 요즘 내 동경의 대상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의 매력보다 돌려받을 생각도 없이 사랑을 퍼주는 조연들의 헌신이다. 이 소설의 목격자들처럼 어른스러운, 아니 어른다운 사람들. 그들도 어딘가에서 그들보다 먼저 산 사람들의 도움과 호의로 자랐겠지. 그런 어른들의 돌봄을 받아 내가 이만큼이나마 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일까.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가 물려받은 선의로 세상을 굴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