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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Oct 25. 2022

그 아저씨를 미워할 바에야 이 청년을 사랑하겠네

베트남의 차량 예약 서비스 Grab bike 위에서

베트남의 공유 택시 서비스는 한국의 ‘카카오 택시’나 ‘타다’ 보다 더 먼저 보편화되었다. 그간 베트남에 상륙했던 여러 공유 택시 서비스 회사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베트남에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싱가포르의 ‘그랍(Grab)’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고젝(Gojek)’, 베트남의 ‘비(Be)’ 등 만이 살아남았다. 2023년 베트남의 대기업인 빈그룹(Vin Group)은 자회사인 빈페스트(Vinfast)의 전기 자동차와 전기 오토바이를 이용한 '쌍 SM(Xanh SM)'이라는 친환경 공유 택시 서비스를 가지고 새롭게 뛰어들었다. 베트남 공유 택시 서비스의 특징은 회사에 등록되어 관리받는 차량뿐 아니라 일반 택시를 연결해서 함께 잡아주는 서비스, 그리고 ‘오토바이’를 이용한 다양한 서비스가 있다는 점이다. 오토바이 서비스 중에는 한국의 ‘퀵 서비스’처럼 물건을 운반해 주는 것도 있고, ‘배달의 민족’처럼 음식점과 연계되어 음식을 배달받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오토바이 택시인 ‘그랍 바이크(Grab bike)’는 내가 자주 애용하는 서비스이다. 공유 자동차 택시의 절반 정도 되는 비용에다가 작은 골목길이 많고 밀리는 구간이 많은 하노이에서는 더 빠르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베트남에는 ‘쎄옴(Xe ôm)이라 불리는 오토바이 택시가 있다. 정류장 부근이나 공원 입구, 큰 건물 입구 등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는 늘 헬멧을 두 개 걸어놓은 오토바이를 세워둔 채,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아주 편한 자세로 오토바이 위에 앉거나 누워있는 아저씨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휴대폰 지도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하노이 골목골목을 찾아갈 수 있는 쎄옴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가격 흥정도 필요 없고, 목적지를 미리 지정할 수 있고, 내가 있는 곳 어디든 데리러 오고, 운전자의 신원정보도 알 수 있고, 운전자에 대한 피드백도 줄 수 있는 신식 '공유 오토바이 서비스'가 나타나자 쎄옴을 타는 고객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많은 쎄옴 기사들은 ‘그랍’ 유니폼 등을 입게 되었고, Covid-19 시기까지 겪으며 일자리를 잃은 타지 출신의 도시 노동자들도 하나둘씩 ‘그랍 바이크’ 기사가 되었다. 어느새 하노이 도로엔 초록색 그랍 유니폼을 입은 초록 라이더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7년 만에 하노이 풍물 동아리에 다시 나가는 날이었다. 만삭의 몸까지 신명 나게 장구를 치다가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야만 했던 채를 7년 만에 다시 잡기로 한 바로 그날이었다. 며칠간 열이 났던 아이의 상태는 호전되었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모임 시간에 늦을까 부러 일찍 퇴근한 남편이 어서 다녀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까지 남편에게 당부의 말을 더하고 더하다가 ‘엄마, 잘 치고 와’라는 아이의 말에 안도하며 몸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정말 오랜만에 혼자서 하는 저녁 외출이었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연습 장소는 하노이 한국 학교, 우리 집에서 10킬로 떨어진 곳이었다. 내 오토바이를 끌고 갈만한 거리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헤매고 싶지도 않았고, 퇴근 시간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이 마구 엉켜대는 그 길 위에서 핸들을 잡고 진을 빼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휴대폰으로 그랍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그랍 바이크를 호출했다. 아파트 근처에 대기하던 여러 대의 바이크 중 한대가 연결되었다. 외국 이름을 보고 베트남어를 못 하는 손님일 거라 생각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들렸다.


“알로(여보세요)?... 찌 초이(Ms. Choi)?”

“네, 내려가고 있어요. Q마트 앞으로 갈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오늘 나를 태워줄 그랍 바이크 기사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전화로 베트남어를 한 사람이 이 사람일까 아닐까 고민하는 눈치의 아저씨는 헬멧을 건네주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모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나는 더 이상의 베트남어를 내뱉으면 안 되었다. 베트남어로 한마디를 하는 순간 가는 내내 폭풍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산지 몇 년 되었냐’로 시작한 질문은 곧이어 나의 신상정보, 가족의 신상정보, 남편과 나의 직업과 연봉, 주거 형태와 가격, 한국과 베트 남의 비교 등 약 스무 가지 정도로 늘 비슷했다. 아주 드물게 한국에 갔거나 다녀온 지인에 대한 이야기, 노동자로 한국에 가는 이야기, 박항서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 등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 또한 스무 가지 질문이 다 끝나고 난 뒤의 추가 질문들이었다. 정말이지 내 베트남어 실력의 팔 할은 기사들과의 스무고개 덕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기사 아저씨가 나와의 대화보다 운전에 집중해서 아주 귀하게 찾아온 나의 밤 약속에 늦지 않기만을 바랬다.


굳게 마음을 다잡고 입을 꾹 다문 나를 태우고 오토바이가 출발했으나 아저씨는 하노이에서 정말 보기 드물게 ‘안전 운전을 하는 사람’이었다. 줄줄이 자동차로 꽉 막힌 일방통행 도로에서도 모든 오토바이가 사이사이 틈을 찾아 빠져나가는 동안 아저씨는 꿋꿋하게 차 뒤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냥 내가 운전해서 갈걸 그랬나’하는 후회와 함께 핸들을 찾는 내 두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겨우 막히지 않는 도로까지 빠져나왔지만 왜인지 오토바이의 속도는 그대로였다. 이 넓은 도로에서 모두가 우리 옆을 쌩쌩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아저씨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자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플을 켜서 지금 나를 태우고 있는 이 오토바이의 번호판 번호를 확인했다. 아뿔싸, 하노이가 아닌 지방 번호였다. 하노이 지리가 어두운 아저씨가 지름길을 코 앞에 두고 멀리 막히는 길로 돌아가려는 찰나, 무거웠던 내 입이 터지고 말았다.


“아저씨, 안 돼요!! 저리로 가야 해요!!”


갑자기 들리는 베트남어 외침에 아저씨는 놀라서 뒤를 쳐다봤다. 오토바이가 지름길로 들어선 대신 스무고개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아저씨는 운전 중간중간 곁눈질로 뒤를 쳐다보며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나는 재촉 반, 대답 반을 하며 아저씨의 운전 속도를 독려했다. 어느새 초가을의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아저씨가 뒷바퀴를 한번 쳐다보더니 가로등 없는 어두운 갓길에 갑자기 오토바이를 세웠다.


“바퀴가 펑크 났어요. 잠깐만요.”


아저씨는 오토바이 안장을 들더니 그 아래서 타이어와 연장 등의 여러 장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많은 것들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에 한번 놀랬고, 직접 타이어를 교체하려는 신기한 광경에 다시 한번 더 놀랬다. 아저씨 뒤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직 절반도 안 왔는데 모임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그랍 바이크를 잡으려고 아저씨에게 운행 정지를 요청했으나 아저씨는 취소가 안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취소가 가능한지 아닌지는 모르는 채, 나는 그랍이 아닌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휴대폰 용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필요 없는 데이터까지 지워가며 간신히 새로운 어플을 깔았는데, 다리 밑 엄한 곳이라 근처에 올 수 있는 오토바이가 없었다. 역시 등록된 기사 수가 많은 그랍이 대세였다. 화가 치밀어 오르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아저씨에게 물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바쁘게 척척 바퀴를 고쳐가던 아저씨는 ‘거의 다 되었다’는 뻔한 대답을 했다. 나는 그냥 수리되는 오토바이에 다시 타는 걸로 마음을 고쳐먹고 아저씨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뒀다. ‘오는 길에 오토바이 바퀴가 터져서 교체하느라 늦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여분이 걸려 혼자서 수리를 마친 아저씨가 오토바이 앞자리의 고리에 매달린 2L짜리 생수통을 기울이며 기름때 묻은 손을 비볐다. 하루 종일 마시고 다녔을 귀한 물이었다. 자세히 보니 도시락이 담긴 봉지도 고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오토바이 하나 믿고 도시에 올라온 어느 가장의 하루가 눈에 그려졌다. 너무도 귀한 나의 저녁 외출이 망가지고 있었지만 아저씨에게 마냥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베트남에서는 내가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이런 날들이 있는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 여전히 손에 검은 기름때가 지워지지 않은 아저씨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늦었어요. 이제 빨리 가요!”

“그래 늦었네요. 이제 집에 가서 씻고 자면 되겠네요.”

“네? 무슨 소리예요? 지금 집에 가는 게 아니라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는 길이라고요!”


순간 세상 놀란 토끼 눈이 된 아저씨는 갑자기 숨겨뒀던 라이딩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달리는 걸 모르는 줄로만 알았던 안전제일 오토바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요리조리 틈새를 빠져나가 순식간에 한국학교까지 도착했다. 나는 당당하게 지각을 했다.





7년간 못다 한 한을 담아 신나게 장단을 두드리고 나니 밤 9시가 넘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랍 바이크를 부르자 이번에는 저 멀리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아주 어려 보이는 청년이 나타났다. 이미 그랍 기사에게도 승객의 이름이 공유되었을 터, 태워야 할 손님이 외국인임을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한 그는 세상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청년 역시 지리가 서툰 듯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뒷자리에 타서 헬멧을 쓰는 동안 그는 오토바이 앞 거치대 위에 걸쳐진 휴대폰 화면을 켜서 능숙하게 구글 맵에 목적지를 입력하고는 가야 할 길을 미리 살피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줌 아웃을 해가며 지도를 이리저리 살며 보는 그의 뒷모습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출발하기도 전에 미리 꼼꼼히 지도를 확인해 보는 일,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길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티 내는 일은 베트남에선 정말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길을 알고 있으니 그냥 출발해도 좋다고 말했다. 청년은 내 베트남어에 놀란 듯 뒤를 돌아보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한참을 달리던 청년의 오토바이가 큰 사거리의 빨간 불 신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왕복 3차선 도로의 꽤나 큰길이었다. 저 멀리 길가에 대학생 적십자 봉사단체에서 길거리 모금을 하는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봉사자 청년은 신호등 아래 정차가 심한 곳에서 아주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이나 노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다가와서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빼곡히 많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모금 단체 이름이 적힌 모금함을 들고 반듯하게 서 있는 그 청년에게 시선을 주는 이도 없었다. 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아이가 잠이 들었는지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때 내 앞의 기사 청년이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며 봉사자 청년을 바라봤다.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자 눈이 마주친 반대편의 청년이 모금함을 든 채 오토바이 사이사이를 지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앞의 청년 기사는 그 모금함에 조심스레 돈을 넣었다. 그리고 둘은 오토바이가 가득한 길 한가운데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다. 바로 뒤에서 그 둘을 바라보는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봉사자 청년은 신호가 바뀌자 출발하는 우리 오토바이를 보고는 다시 90도로 천천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 앞의 기사 청년도 운전대를 잡은 채 꾸벅 비스듬한 인사를 했다.


나를 태우고 10km를 달려 이 청년이 받을 수 있는 돈은 그랍 회사에 내는 수수료를 제외하고 나면 3만 동(약 1,500원) 쯤 될 것이다. 그럼 오늘 길에서 낸 '만동(500원)의 기부금’은 이 청년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남들이 하루를 마감하고 집에서 쉬는 시간에 일하고 있는 오토바이 기사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돈이었을 텐데... 돈의 가치를 넘어서 오토바이 핸들에서 두 손을 떼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저 멀리 모금함에 전해야 하는 그 수고로움을 알기에 나는 이 청년의 따듯한 마음과 실천하는 용기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에게 스무고개 질문을 시작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고 그랍 바이크 기사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작은 체구의 청년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질문 공세를 퍼붓던 여느 기사 아저씨들과는 다르게 앞만 보며 내 질문에 하나씩 답을 했다.


"찌(chị, 손위 여성을 부르는 베트남어)가 베트남어를 잘해서 너무 다행이에요. 외국인 손님이라 말이 안 통할까 봐 걱정했거든요."


차분한 목소리의 대답, 너무도 공손한 말투, 뒷사람을 배려하는 운전과 행동들, 그리고 예쁜 마음씨까지…… 마침 아까 아저씨의 오토바이 바퀴가 퍼졌던 그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 때문인지, 신나게 흥을 쏟아붓고 난 여운이 남아서인지, 앞에 앉은 청년 때문인지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20분이나 오도 가도 못했던 내 상황에 대해서 그랍 회사에 클레임을 걸까’ 했던 쪼잔한 마음을 쏙 집어넣고, 이 사랑스러운 청년 기사에게 최고 별 점과 함께 팁을 더 보내기로 했다. 덕분에 오늘 밤마실이 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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