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행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1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연례행사다. 특히 만두가 베트남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후부터 늘 아이의 여름방학 기간에 맞춰진 행사가 되었다. 하노이에 유독 무서운 더위가 찾아왔던 어느 6월, 2학년 과정을 모두 끝내고 한국보다 이른 방학을 맞은 만두와 함께 캐리어에 선물을 한가득 채웠다. 공항에 배웅해 준 아빠 앞에서 만두는 '먼저 가 있을게. 빨리 와!' 라며 눈물을 그렁그렁 내보였다. 그러나 역시 연례행사로 아내도 아들도 없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아빠는 그런 아들을 꼭 안아주며 몰래 함박미소를 지었다. 공항 안에서 이동을 할 때마다 만두는 엄마 뒤에서 덜렁대는 엄마가 흘리고 간 물건이 없는지를 연신 확인했다. 이제 제법 든든한 여행 파트너가 되고 있는 만두와의 이번 한국행이 더 참 궁금해졌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 선물이 가득 든 큰 캐리어 두 개를 이고 지고 아이와 함께 공항철도를 타러 갔다. 한국 유심이 없어 무용지물인 휴대폰, 작년에 쓰고 남은 한국 돈 만이천 원과 남편 명의로 된 한국 신용카드 한 장이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텅 빈 열차가 출발을 하자 이내 보이는 차창밖의 풍광에 하노이 촌놈이 연신 '우와, 우와!'를 외쳤다. 안내판의 지하철노선표에서 남은 정거장 수를 확인한 뒤 나는 반복되는 안정적인 흔들거림에 스르륵 눈꺼풀이 내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얼굴에 느껴지는 손길에 눈을 떴다. 엄마의 턱을 잡아서 헤드뱅잉을 멈추게 하려던 만두의 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입은 헤벌쭉 벌어져 있었고, 눈앞에는 서울로 출근하는 깨끗한 셔츠차림의 사람들이 열차칸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제야 꼬질꼬질한 만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을 보느라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창피함이 느껴지는 걸 보니 우리가 정말 서울에 오긴 왔나 보다.
아이와 같은 반 베트남 엄마들이 하나둘씩 여행을 다녀왔다고 사진을 보여주던 그 크고 깨끗하고 화려한 도시 '서울'에 도착했다. 엄마 집에 짐을 풀고, 만두에게 난생처음으로 서울/수도권 어린이 교통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뚜벅이 여행자가 되어 지하철로, 버스로 서울의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평일의 한 낮, 서울의 지하철에 아이라고는 만두가 유일했다. 두발 기증을 위해 뚜껑 머리는 기른 채, 베트남 호이안의 한 미용실에서 아랫 머리만 3mm의 길이로 싸악 밀고 온 독특한 만두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멋지다고 한 마디씩 해 주는 사람들은 모두 노약자 석에 앉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었다. 일반석에 앉은 대부분의 승객들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쳐다봤다. 당연히 앞사람이나 앞 풍경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휴대폰에 깊게 빠지는 건지, 휴대폰만 보다가 틈새에 발이 끼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건지 지하철 곳곳에는 ‘발 빠짐 주의’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만두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을 헤 벌쭉 벌린 채 반대편 승객 머리 위 화면에 보이는 ‘발 빠짐 주의 안내 영상’에 푹 빠져버렸다. 이제 우리가 내릴 차례, 출입문이 열리자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큰 보폭으로 열차에서 내린 만두와 나는 서로의 허리에 한 팔씩을 두른 채, 그 경쾌한 음률을 따라 부르며 깡충깡충 발맞춰 뛰었다. 만두와 내가 서울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던 그 노래다.
서울 지하철 어디서든 자주 만날 수 있는 '발 빠짐 주의'
저녁 뉴스에서 기상캐스터가 내일 서울이 29도의 폭염이 될 거라며 호들갑스럽게 날씨를 전했다. 옆에서 뉴스를 보던 만두가 외쳤다. ‘엄마! 29도가 폭염이래! 우리는 사십몇 도였는데?’ 한낮의 기온 40도, 습도 90프로였던 하노이에 있다가 온 우리였다. 특히 올해는 베트남 국가 전력난으로 몇 달간 가로등 운영 시간도 줄이고, 동네마다 돌아가며 시간제 강제 정전을 실시하는 중이었다. 지난달에는 우리 집 전기세 자동이체에 오류가 생겨 미납이 되었다며 칼같이 전기가 끊겼던 날도 있었고, 일하는 공장 지역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 날이라 출근을 안 한다는 이웃집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며칠 전이었다. 불과 다섯 시간의 비행 만에 우리는 전기가 끊길까 전전긍긍하던 40도의 하노이에서 어디든 에어컨이 펑펑 틀어진 '29도 폭염'의 서울로 날아오게 된 것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만두에게는 천국이었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겐 반갑지 않은 변화였다. 엄마 집 근처의 한 대형 쇼핑몰에서 만두가 물었다.
“엄마, 이렇게 덥다면서 사람들은 왜 긴 팔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거야?’
“글쎄… 실내가 추워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럼 왜 이렇게 에어컨을 세게 트는 거야?”
“음… 그러게나 말이다. 누가 누가 더 춥게 하나 시합하는 거 같네.”
민 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채 오들오들 떨며 대답을 하던 나는 내일부턴 꼭 ‘긴 팔 외투를 챙겨 나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하노이를 떠날 즈음 하노이를 방문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2016년 '원전 백지화'를 외쳤던 베트남과 ‘원전 수출’에 다시 힘을 쏟으려는 한국이 원자력 협력 MOU를 체결했다는 내용이었다. ‘한여름의 외투’만큼이나 앞 뒤가 안 맞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쇼핑몰의 화장실 밖에서 아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잘 먹고 잘 싸는 아이를 둔 엄마로서 깨끗하고, 쾌적하고, 심지어 무료이기까지 한 화장실이 어디든 널려 있는 한국의 시스템에 감탄을 하던 중 건너편의 빵집 쇼윈도에 눈길이 멈춰졌다. 뭐? 머핀 하나가 6,300원이라고? 한 세트가 아니고 한 개에? 혹시 ‘멀리서 숫자를 잘 못 본 걸까’ 안경을 닦고 다시 유심히 봤지만 설마 했던 숫자는 정말이었다. 전 세계 밀가루 가격이 올라서 그렇다는데, 왜 베트남에서는 빵 가격이 그대로일까? 문득 하노이의 마트에서 파는 만두의 다리통만 한 500원짜리 바게트가 그리워졌다. 원래도 뭐든 잘 먹는데 한국에 와서 비싼 군것질에까지 식욕이 터져버릴까 조마조마해진 나는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의 시선을 서둘러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물가는 십여 년 전에 멈춰져 있으니, 나는 마치 그 옛날 20대였던 시절 스위스에서 30,000원짜리 샐러드를 두고 덜덜 떨어야만 했던 것처럼 서울의 모든 물가에 놀라고 있었다.
엄마 집에 있을 동안 먹을거리를 사려고 집 앞 슈퍼에 들렀다. 지난주에 하노이에서 약 1,500원을 주고 자두 한 봉지를 가득 샀는데, 여긴 아주 크고 예쁜 자두 몇 알을 플라스틱 팩에 예쁘게 포장해 두고선 6,000원이라 적어놨다. 아이고, 그것도 세일 가격이라네. 하노이에선 주렁주렁 매달린 짧고 통통한 시골 바나나 한 송이를 1,000원이면 샀는데, 여긴 얇은 수입 바나나 달랑 다섯 개 달려 있는 한 묶음이 3,500원 이란다. 아이고, 이것도 세일 가격이라네. 단물이 많고 길쭉한 모양의 베트남 수박은 5,000원이면 한 통을 사는데, 그 두 배 크기의 동그랗고 단단한 한국 수박은 2~30,000원은 족히 했다. 역시나 세일 가격이란다. ‘올여름 수박 한 통을 감히 못 사 먹었다’는 엄마의 말에 한통을 사 들고 갔는데, 만두가 하루 만에 반을 해치웠다. '만두야, 넌 베트남 가서 많이 먹어도 되지 않니?' '왠지 한국 수박이 맛있어.' 홀딱 벗고 식탁 앞에 앉아있는 만두의 가슴팍에 수박 국물이 흐른다. 한국에선 과일을 쉽게 사 먹는다는 것이 모두에게 고루 주어진 혜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에 아이가 있는 친구들과 함께 만나 시간을 보내니 십만 원이 훌쩍 사라졌다. 한국에선 나처럼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적었고, 터치 한 번에 손쉽게 주문이 되고 결제가 되니 내 주머니에서 무언가 얼마나 빠져나갔다는 느낌도 없었다. 덩달아 소비에 대한 죄책감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퍼(Phở)를 좋아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서울 골목마다 있는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쌀국수는 미국의 베트남 이민자들이 만드는 베트남 식당 쌀국수’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데, 우리도 호기심에 한국식 한국식 쌀국수를 먹으러 가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한국 돈으로 1,500원~3,000원이면 먹는 쌀국수를 만원 가까이에 팔고 있는 걸 보니 왠지 손해 보는 마음이 들어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번듯한 식당에 가서 세 명이 밥 한 끼를 먹었더니 오만 원 가까이 나왔다. 어느 순간 ‘이 정도 식사에 오만 원이면 괜찮네.’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아이고! 내가 서울살이 며칠 만에 소비에 무감각해졌구나. 정신 차리자 정신! 코 베일라, 정신 차리자!
모든 것이 빠르게 휙휙 변해가는 서울이 젊은 나도 이렇게 어렵고 버거운데 나이 든 엄마 아빠는 어쩌나 싶어 짠한 마음이 올라오려는 찰나, 부엌에서 엄마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야야야. 이리 와서 이거 먹어봐라, 세상에 이런 김치 없다.’ ‘지금? 엄마 나 배불러.’ ‘그래도 먹어봐, 이거 딱 하나 남은 거야.’ ‘밥도 없이 어떻게 먹어. 이따 밥이랑 먹을게.’ ‘아니야, 이건 하나-도 안 짜! 그냥 먹어도 되는 거야.’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리지만 역시나 맨입의 김치는 짰다. 그러나 잔소리만 더 길어질까, 나는 '맛있지?'라고 묻는 엄마의 말에 작은 호응을 하고는 뒤돌아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무서운 서울보다 더 무서운 건 1년 치 묶은 엄마의 잔소리였다. 왜인지 나이가 들수록 파워가 점점 더 세져만 가는 엄마의 잔소리는 내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다음 것으로 이어졌다. 아, 처음부터 내 대답을 들을 목적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능력이다. 엄마는 마치 나에게 뽐내기 위해 1년 동안 기술을 갈고닦은 것만 같았다. ‘엄마 집에서 지내는 딱 3주만 입 닫은 채 효도하자!’ 했던 결심은 단 며칠 만에 무너졌다. 수비도 해보고 받아치기 공격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엄마 집에서는 정말이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후퇴'를 택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시간, 엄마 집을 나와 홀로 동네를 산책했다. 내가 결혼을 한 뒤 오빠를 따라 아빠 엄마가 이사 온 서울 한복판의 이 낯선 동네에는 오르막 내리막 길이 가득했다. 그 언덕 곳곳에 줄 맞춰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들은 저마다의 이름을 휘날리며 뽐내는 듯 보였다. 그 건물들 사이사이로 어느 하나도 모나지 않은 채 가지런히 잘 정돈된 나무와 풀들이 보였다. 나는 문득 내 집이 있는 하노이가 떠올랐다. 원래부터 살고 있던 나무들을 비켜서 뒤죽박죽 자리 잡은 집과 도로가 가득한 곳. 무럭무럭 자라나는 가로수가 간판을 가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나무뿌리가 보도블록을 깨고 올라오는 게 당연한, 지붕에 구멍을 내서라도 고목을 지키려는 하노이 사람들이 떠올랐다. 딱히 갈 데도 없던 나는 서울의 평범한 그 골목들을 걷고 또 걸었다. 서울의 저녁은 참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길거리 가게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어느 부동산 앞에 멈췄다. 나는 유리 벽에 가득 붙어 있는 A4용지들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 이 동네 집 값이 생각보다 안 비싸네? 이렇게나 가격이 내렸나? 하노이에 있는 우리 집을 잘만 정리하면 서울 땅에 내 집 마련도 할 수 있겠는데? 그래, 서울에 내 집이 있다면 이렇게 저녁에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는데? 이런 상상을 하던 차에, 가만 보자…. 아이고! 그러면 그렇지. 내가 ‘0’ 하나를 빼고 봤구나! 역시 죽을 때까지 서울에 내 집 마련은 어렵겠구나!
에이, 나는 그냥 하노이에서 살아야겠다. 터덜터덜, 다시 서울의 엄마 집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장마철이라 걱정하던 6월 말과 7월 초엔 서울엔 비가 조금만 내렸고, 우리는 그 비를 즐기며 여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