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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Feb 22. 2023

울렁울렁, 들깨 수제비와 김치 두 포기

광활한 하노이, 좁은 한인 사회

하노이는 아주 넓다. 베트남의 수도이자 정치 중심지인 하노이는 2008년도에 뉴욕 런던 파리 같은 광역도시가 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꾸며 땅의 경계를 확장했다. 그 결과 334,470의 면적으로 종전보다 3.6배나 커지면서 하노이는 전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인구도 2.5배 이상 증가했다. 950만 명이 거주 중인 서울과 비슷한 인구수를 가졌으나 면적은 서울보다 다섯 배나 커졌다. 하노이 중심에서 두 시간 거리의 시골에 살던 농부는 하루아침에 하노이 도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노이는 갑자기 하노이 사람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막연하게 큰 도시였다.


하노이는 아주 좁기도 하다. 하노이에 사는 한국인은 이방인인 동시에 소수자였다. 코로나 이후로 그 수가 반 토막쯤 난 것 같지만, 많을 적에는 6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하노이에 거주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범위가 한정적이고 눈에 띄기 때문에 너무 뻔할 정도로 서로가 보였다. 직장 상사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경우가 허다했고, 싸웠던 학교 친구네와도 매일 오가며 얼굴을 붉혀야 했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어디서 어떤 사건 사고가 났다 더라’ 하는 소식들은 불과 며칠 만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한 가십거리'가 되었다. 누군가 하노이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를 SNS에 올리기라도 하면 몇 주간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국인들로 가득했다. 이 좁은 세상에선 새로운 정보도, 누군가에 대한 욕도 이 입과 저 입을 지나 빠르게 확산되고 변질되었다.


베트남 남부의 경제 도시 ‘호찌민’은 한인 사회의 규모가 하노이의 두 배 가까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도가 적었다. 바로 옆 나라인 라오스의 한인 사회는 많은 수가 관광업 종사자로 코로나 이전만 하더라도 3천 명 정도였으나 지금은 반 이상 줄었다.  규모가 작으니 서로를 인지하고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 두세 명만 건너면 아는 사이가 될 수 있는 이 애매한 규모의 하노이 한인 사회에서는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조심스럽고 무서웠다. 동시에 정들만하면 떠나는 정류장 같은 이곳에서 나와 맞는 인연을 만난다는 건 정말 귀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성당에 가면 할머니들이 앞에 많이 앉아 있지. 자기네 신부님 지킨다고.”

“왜요? 누구한테 뭘 지켜요?”

“왜 옷 훌러덩 벗고 오는 젊은 여자들이 있거든. 그 여자들이 앞에 앉으면 젊은 신부님 홀린다고 앞에 못 앉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하하하하. 별 걸 다하네요. 신부님도 사람인데 혹시나 나쁜 맘먹으면 나중에 참회하시겠죠.”

“근데 여기 한인 성당에서도 여자들 메리야스 안 입고 오면 위에 속옷 보인다고 나이 드신 분들이 뭐라 하던 때도 있었어.”

“에이.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안 가죠. 근데 예수님도 그렇고 부처님도 그렇고 다들 찌찌도 안 가리고 있지 않아요?”


마지막 나의 한마디에 모두의 웃음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한인타운의 한 식당의 식탁에 둘러앉아 ‘들깨 수제비’를 먹고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여성들이었다. 하노이의 오래된 한인 타운에 살면서 모두 커버린 자식들을 가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생 선배들이었다. 나를 ‘00 씨’라 부르며 늘 존대해 주시고, 내가 벌이는 후원이나 기부 활동도 늘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세월호 추모 행사도 발 벗고 함께 해 주시며, 생각 없는 한인들의 행태나 사회문제도 서슴없이 비판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며칠 전에 우리 아파트에서 한낮에 핑크색 쫄쫄이 입은 젊은 한국 엄마를 봤잖아. 깜짝 놀랐어.”

“어? 나도 봤는데. 지난번에 마트 갔다가 핑크색 쫄쫄이 입은 사람 봤어요. 같은 사람인가?”

“그게 옷 안 입은 거 같은 느낌이래.”

“아니 왜 그러고 다닌대? 그러면서 꼭 쳐다보면 난리 치더라.”

“맞아. 엉덩이를 그렇게 드러내고 쳐다보지 말라면 어쩌라는 거야.”

“요즘 한국에선 쳐다보면 안 되지 않아요?”

“그래도 자기가 그렇게 엉덩이 보이라고 입는데 어째.”


방금 전까지 남의 복장에 왈가왈부하던 ‘성당 할머니’를 욕하고 있었는데, 그 성당할머니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새로운 대화 전개에 너무 놀란 나는 입질을 멈췄다. 속으로 지난 여행에서 내가 며칠 동안이나 레깅스를 입고 다녔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러다 문득 다시 정신을 차렸다. 레깅스를 입어서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나이차이를 깔아 두고 잘난척하며 잘잘못을 가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못 들은 첫 넘어가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러다 고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놔둬요.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시면 안 돼요.’ 뿐이었다. 옹호도 아닌, 부정도 아닌 붕 떠있는 애매한 말이었다. ‘에휴, 다른 데서는 안 하지. 내 자식한테나 하지.’라는 역시나 애매한 답변이 들려왔다. 이야기는 어벌쩡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나는 불편한 마음을 누르며 수제비를 마저 씹었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그들을 마주 보고 있던 한 명이 고개를 들이밀고 조심스레 속삭였다.


“방금 나갔던, 저기 앉아있던 애기 엄마들이 우리가 핑크 쫄쫄이 얘기하고 나서 계속 째려봤어.”

“어머! 핑크 쫄쫄이 입은 사람 앉아 있던 거 아니야?”

“아이고, 나도 말하면서도 순간 목소리가 컸다 싶었네.”


민망함과 자책감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란 누군가의 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니, 근데 내가 보고 싶지 않다는데, 그럼 내 앞에 보이질 말아야지! 그렇지 않아?”


동의를 구하는 말이었으나 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보고 싶지 않으니 보이지 말라’는 그 말이 순식간에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동성애를 혐오하던, 이주민을 배척하던, 장애인을 밀어내던 사람들이 하던 차별의 언어를 내 눈앞에서 들을 줄이야. 나와 신념이나 생각이 잘 맞았기에 늘 의지하며 자주 만나는 몇 안 되는 지인들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나이지만 뚝배기에 수제비를 꽤나 남겨버렸다.


집에 돌아와 이슬아 작가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마저 읽었다. 가녀장인 주인공 이슬아가 방송 토크쇼에 패널로 나갔는데, ‘노브라’라는 이유로 PD에게 불려 가 속옷을 입을 것을 권유받는 부분이었다. 슬아는 바로 옆 남자 패널의 흰색 셔츠에 비치는 유두를 보면서 자신도 ‘노브라’를 고집하지만 PD는 윗분들이 결정할 문제라는 이유로 계속 권고한다. 슬아는 자신의 유두가 누군가에게 컨펌받아야 한다는 대상이라는 데에서 크게 웃어버린다. 나도 글 속의 슬아처럼 크게 웃었다. 20대의 어느 날, 스쿠버 다이빙 100회 기념으로 친구들과 인적 없는 바닷속에 내려가 가슴을 조이던 비키니를 풀어헤치고 조심스레 차가운 바닷물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 곳에서나 눈치 보지 않고 가슴을 드러낸 채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베트남 엄마들도 생각났다. 아 맞다. 최근에 깜빡하고 속옷을 안 입은 채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러 오토바이를 던 기억도 났다. 빳빳한 겉옷을 입었나 신경 쓰며 학교에 아이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 라이딩이 얼마나 시원하고 짜릿한 일인지를 깨달았던 기억. 가슴을 압박해 본 적 없는 이들은 평생 공감하지 못할 선택적 해방이라 생각하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함께 들깨 수제비를 먹던 그녀들이 이 ‘유두 해방’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광대하고도 작은 세상, 이곳 하노이는 늘 떠나는 한국인들로 가득했다. 주재원으로 정해진 몇 년 동안만 살다 가는 사람들, 하던 사업이 잘 안 되어서, 혹은 Covid-19로 인해서, 혹은 아이 교육이나 건강상의 문제로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잠시 여행을 와서 지내다 돌아가는 사람들까지. 매번 떠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이곳에 남아 엉덩이를 붙이고 살아가는 나는 그 하나하나의 이별에 매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뜨거운 것을 잘 먹으면 인복이 많다’는 할머니의 말에 어린 나이부터 입천장 데어가며 뜨거운 국물 먹기를 열심히 수련한 결과일까? 늘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새롭게 찾아왔고, 구멍 난 자리는 금세 다시 채워졌다. 덕분에 나는 하노이에서 만나는 인연에 애써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이거 김치 너무 맛있다. 이모가 준거야?”


아들 만두가 저녁상에서 맛있게 먹고 있는 김치는 바로 수제비를 함께 먹던 인생 선배 중 한 명이 준 것이다. 정성껏 집 밥을 대접하고, 하노이에서 직접 담근 ‘김치 두 포기’를 선뜻 내어주는 그 마음이 결코 작지 않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음 그릇의 크기를 믿고 용기 내어 이야기를 꺼내볼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아니면 다른 이와 나의 취약함을 각각 인정하고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것 또한 이 거대한 하노이에서 맺은 작지만 귀한 관계의 끈을 더 단단히 묶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울렁울렁, 수제비 먹다 요동치던 마음을 김치로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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