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의료 시스템을 마주하며
‘베트남 사회 보험(Bảo hiểm xã hội Việt Nam)’에 따르면 지난 2022년 6월까지 약 8,680만 명의 사람들이 베트남의 ‘국가 의료 보험’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는 베트남 전체 인구의 약 90%가 국가 의료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2009년에는 전체 인구의 57%, 2015년에는 전체 인구의 74,7% 만이 ‘국가 의료 보험’에 가입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수는 아주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베트남 국민들이 가장 가깝게 국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역 보건소는 치료시설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열악하다. 큰 도시에나 있는 대학 연계 병원이나 군 병원들, 그리고 지역마다 있는 국가 운영의 중앙 병원은 2차, 3차 병원의 개념으로 의사 수준은 높지만 환자 수에 비해 시설이나 의료진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늘 환자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거나 더 경력 있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 뒷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시설도 좋고 의사 수준도 높은 사설 병원은 보통의 사람들이 가기에는 쉽지 않다. 개인이나 직장에서 가입해 준 사보험이나 사설 병원이 직접 운영하는 병원 보험에 가입한 중산층 이상이 아니라면 ‘국가 의료 보험’만 가지고 가기에는 분명 부담스러운 비용을 청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큰 병이 아닌 이상 병원에 잘 찾아가지 않는다. 가벼운 질환일 경우 약국에 가서 간단히 증상을 처방받고 약을 사 먹는다. 한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매하기 어려운 약들도 여기서는 슈퍼에서 물건 사듯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그러기에 골목마다 건물마다 흔한 것이 바로 약국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아플 때 의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일명 ‘동네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동네 의사’는 병원 진료시간 외의 시간에 근처에 사는 환자가 의사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진료를 받는 것인데,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로 소아과 의사나 물리치료사 등이 시간 외 재택 진료를 많이 한다.
가끔씩 아파트 주민들의 ‘페이스북 그룹’에는 ‘아이가 이렇게 아파요’라며 도움을 청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그러면 어김없이 ‘어디에 누구 선생님이 산다’며 인근에 거주하는 소아과 의사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가 함께 적힌 댓글들이 차례로 올라왔다. 마침 그 ‘동네 의사’ 중 한 명이 우리와 같은 층에 살고 있었는데, 두 어린 딸의 엄마이자 소아과 의사인 그녀는 퇴근 후에 집으로 찾아오는 어린이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 집 거실 TV장 위에는 청진기와 체온계, 코와 귀와 입 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도구들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어린이 환자들이 보호자와 함께 앉을 수 있는 간이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의 1회 진료비는 10만 동(약 5천 원)이었으나, 같은 층의 어린이 환자들에게는 돈을 더 적게 받기도 했다. 집 한 편의 커튼이 쳐 있는 창고에는 여러 종류의 약이 정리되어 쌓여 있었고, 보호자들은 처방받은 약을 그 집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 층에 사는 동안 나는 만두를 둘러업고 복도 끝까지 뛰어가 그 집의 벨을 누른 적이 세 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입고 있던 실내복 위에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치고는 천천히 만두와 나의 상태를 봐줬다. 진료 끝에 ‘괜찮아요.’ 혹은 ‘괜찮을 거예요.’라는 한마디를 들은 날은 조금은 덜 힘들게 밤을 새우며 아이 곁을 지켰다. 거의 모든 집에 아이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이들이 많은 곳에서 그녀는 진짜 필요한 ‘동네 의사’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만두에게 오랜만에 고열이 찾아왔다. 다행히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가입하고 온 ‘장기 체류 보험’이 있었기에 진료비 걱정 없이 하노이에 있는 한국 병원을 찾았다. Covid-19 바이러스 검사를 하고 한국 의사 선생님이 아이의 목, 코, 귀, 폐를 확인하고, 독감 검사까지 했지만 큰 이상이 없었다. 결국 열 감기 진단을 받고 약을 잔뜩 받아왔다. 어릴 적부터 매달 다양하게 겪어 온 잔병치레에 40도에 가까운 만두의 웬만한 열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해열제가 유독 듣지 않았고 며칠간 고생 끝에 열이 내렸어도 이틀 뒤에 갑자기 다시 고열이 났다. 목이 붓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아파도 식욕은 늘 있던 아이였는데 이번에는 군것질 마저 마다했다. 바닥과 일체가 된 듯 아이는 계속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열과의 사투를 하다가 만두의 얼굴과 목, 등과 가슴에 붉은 반점들이 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점이었던 그것들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팔과 다리까지 번졌다. 아이가 유아기 때 겪었던 열꽃인가 싶었지만, 열이 내리면서 반점이 생기는 열꽃과는 달리 반점이 번지는 중에도 열이 다시 올랐다. 얼굴은 온통 붉게 변했고 엄청난 반점이 전신에 모두 퍼지자 우리는 다른 국제 병원을 찾았다. 가와사키 병이나 다른 바이러스 감염이 의심되어서 피검사도 했지만, 다행히 검사 결과 염증과 백혈구 수치가 정상을 조금 넘은 정도였다. 병원에 있는 몇 시간 동안 발진이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아마 최고치를 찍고 나아지는 중인 듯했다.
늘 그랬듯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오자 만두는 열이 완전히 내렸고, 원인 모를 바이러스와 싸워 이겨낼 즈음 만두의 증상을 들은 베트남 친구가 말했다. ‘뎅기열인 거 같아요!’ 다른 베트남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니 모두가 본인이나 가족들의 뎅기열 경험들을 말해주었다. 한 지인은 지금 부부가 모두 뎅기열에 걸려 몹시 고생 중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이렇게나 흔한 질병이었나? 그러고 보니 모두가 말한 뎅기열의 증상들과 아이의 것이 거의 일치했다. 얼마 전에 만두가 학교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비 온 뒤의 습했던 바비(Ba Vì) 산으로 체험학습을 다녀온 것이 떠올랐다. 뎅기열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심하게 겪는다더니, '차라리 코로나가 덜 힘들었지'라며 모두 고개를 저었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데 이만한 게 어디냐’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에 걸쳐 천천히 사라진 발진과 함께 만두는 기력을 되찾았다.
뎅기열(Sốt xuất huyết, Dengue fever)은 모기에 물렸을 때 걸릴 수 있는 급성 열성 바이러스성 질환이다. 그간 뎅기열 소식을 현지 뉴스에서나 들었을 뿐 사실 이렇게나 흔한 질병일 줄은 몰랐다. 베트남 보건부에 따르면 유독 더웠던 2022년 한 해 동안 베트남의 뎅기열 환자는 36만 1813명, 사망자는 133명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확진자가 5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그동안 뎅기열 환자는 베트남 중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우기인 6월부터 10월 사이에 많이 발생했는데, 점점 하노이가 있는 북부에서도 많아지고 있었다.
뎅기열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중동 지역의 지중해 연안,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 등 아열대 지역의 100여 개 국에서 발병된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뎅기열 위험에 노출된 지역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매년 뎅기열 발병환자를 5,0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1/100인 50만 명은 위험성이 높은 ‘출혈성 뎅기열’에 걸린다고 보고, 약 22,000여 명이 사망에 이른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뎅기열 발병률은 30배나 증가했지만, 사망률을 1% 미만으로 줄이는 방법은 조기 발견과 함께 보존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 외에는 없다.
베트남에선 의료 인력 부족과 의약품 부족이 위중 증상의 뎅기열 환자를 급증시켰다는 기사도 나왔다. 베트남 도심의 병원들은 과부하를 보고한 지 오래고, 병실이 부족해 복도에 침대를 놓은 채 뎅기열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지난달 한 베트남 지인은 새벽에 고열이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하노이 국립 중앙 열대 병원’을 찾았으나 이미 대기 중인 다른 환자들 때문에 다른 병원을 찾느라 몇 시간을 전전긍긍했다고 했다. 최근 베트남 남부 호찌민시 외곽 구찌(Củ Chi) 성의 뎅기열 위 중증 환자 3명은 2시간 거리인 호찌민 시내의 ‘쩌러이 종합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안타깝게 사망했다. 구찌성에서 가장 큰 ‘구찌 종합병원’의 의사 200여 명 중 40%는 방금 의대를 졸업했거나 5년 미만의 뎅기열 치료 경험을 가진 어린 의사들이었다. 경험이 많은 의사들은 업무 과다와 저임금을 이유로 이미 의사직을 그만두거나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Covid-19 발생 이후 베트남에선 엄청 많은 의료진이 국가 병원을 그만뒀다. 현재 베트남 국가 병원 책임자의 기본급은 600만 동(약 35만 원)이며, 간호사 및 약사의 경우 375만 동(약 20만 원)이다. 그 와중에 베트남 뎅기열 치료에 사용하는 의약품은 주문 후 해외에서 베트남에 도착하기까지 5~6개월의 입찰 과정을 거친다. 뎅기열은 분명 치사율이 낮은 질환이지만 의료 시설과 의사가 부족하고 의약품 공급 과정이 더딘 베트남 같은 나라에서는 사망자가 늘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김승섭 박사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질병은 개인이 적극적인 관리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공적 시스템이 부족한 사회의 책임’이라고 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있지 않으니,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더 자주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공적 의료 시스템이 부족한 나라에서 그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만들어 가기 어렵다면, 그건 아직 질병에 노출되지 않았거나 질병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진 국가들까지 모두가 더 적극적으로 그 책임을 함께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닐까?
2021년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서는 지금 같은 온실가스 배출 추세가 앞으로 60년 동안 계속되는 경우 기후 변화로 인해 뎅기열이나 말라리아 같은 ‘모기 매개 질병’의 전파가 크게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 시기 전 세계 추정 인구 94억 명 중에 약 85억 명이 뎅기열의 위험에 처하고, 약 80억 명이 말라리아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도시화가 급속화되고, 여행이나 이주 등 인구 이동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뎅기열과 말라리아는 더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전에는 영향을 받지 않던 지역에서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으니, 뎅기열이나 말라리아는 더 이상 일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데 아침부터 길가에 안내 방송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인민위원회에서 공지하는 뎅기열 주의 방송이다. ‘매주 한 번씩 곳곳의 유충을 10분 이상 소독하여 박멸하고, 고인 물에는 반드시 뚜껑을 덮어두고, 아이들에게는 모기장을 씌워주고, 야외 활동 시에 밝은 색의 긴 옷과 모기 기피제를 준비하고….’ 방송대로라면 세상의 모기 유충을 다 없애버리거나 모기장 안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 같다. 불가능한 일이다. 베트남은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뎅기열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공적 의료 시스템은 아직 미비하다. 바다 건너 어디선가 뎅기열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베트남 동네 보건소에서 뎅기열 예방접종을 하거나, 우리 아파트 1층 약국에서 누구나 쉽게 뎅기열 치료제를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