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일, 하노이 호아로 수용소에서 걸려 온 전화
“호아로 수용소(Nhà tù Hỏa Lò)입니다. 내일 아침에 오실 수 있으시죠?”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비범한 자기소개에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전화를 걸어온 건 하노이에 있는 ‘호아로 수용소 유적지’의 투(Thu) 부소장님이었다. UNESCO가 지정한 '평화 도시 하노이(Thành phố vì Hòa bình)'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수용소에서 준비한 특별사진전 <평화의 일기(Nhật ký Hòa bình)>의 개막식이 바로 내일이었다. 개막식에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을 포함한 사진전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이 초대되었고, 활동 사진이 전시되는 한국 단체 ‘한베평화재단’도 초대된 이들 중 하나였다. 호찌민과 한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작은 규모의 단체에서 하노이까지 직접 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하노이에 사는 재단 회원인 내가 대신 참석하기로 했었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을 했다. 나는 부소장님께 내일 찾아가겠다고 간결하고 정중하게 답을 했다.
개막식 행사 당일 아침, 서둘러 오토바이 택시인 ‘쎄옴’을 탔는데도 출근길인지라 길 위에서 한 시간 가까이를 보냈다. 나는 행사 1분 전이 돼서야 겨우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아로 길에 도착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후 길을 건너 허겁지겁 수용소 입구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나를 저지하는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티켓!”
경비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매표소를 가리켰다. 나는 헬멧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저 초대받았어요. 한국 단체에서 왔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신을까 말까 하던 구두까지 꺼내 신고 나름의 격식을 차려 갔건만 아저씨 눈에는 여전히 내가 관광객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4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전쟁 이야기를 하는 행사에 ‘젊은, 한국인, 여성’이 그것도 오토바이에서 내려 후다닥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그가 맞이했던 다른 귀빈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가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조금 더 연륜이 있어 보였다면 어땠을까? 택시를 타고 올 걸 그랬나? 위아래를 훑어보던 아저씨에게 나는 웃으며 행사 현수막을 가리켜 보았다.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행사 현수막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멋 적게 웃으며 터준 터널 같은 길을 지나 행사장 문 앞에 도착하자 나를 관광객으로 착각한 다른 직원이 한번 더 길을 막았다. 때마침 부소장님이 나를 발견했고 무사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호아로 수용소는 과거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가 만든 감옥이었다. 그 당시에 많은 베트남 독립투사들이 수용되어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그러나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뉘어 싸운 ‘항미 전쟁(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북 베트남이 남쪽의 미군 전쟁 포로들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었다. 미국 상원위원이었던 ‘존 맥케인(John Sidney McCain)’을 포함하여 그 당시 수감되었던 미군 포로들은 이 수용시설을 호텔 같다 비꼬며 ‘하노이 힐튼’이라 불렀다. 전쟁이 끝난 후, 통일된 베트남에선 다시 베트남의 저항 시인 ‘응우옌 찌 티옌(Nguyễn Chí Thiên)’ 등 반체제 인사들이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호아로 수용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자연스레 한국의 ‘서대문 형무소’가 떠올랐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사들이 수용되어 고문을 받았다가, 광복 후에는 친일파 등이 수감되었다가,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는 오히려 독립운동가였던 정치인들이 다시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중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기에는 북한군이 반공, 친미 인사로 추정한 인물들을 투옥했다가, 서울을 다시 수복한 이승만 정부가 또다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가두었던 그곳 말이다. 한국의 서대문 형무소와 베트남의 호아로 수용소는 두 나라의 어두운 근대사가 뒤엉켜있는 곳이었다. 호아로 수용소는 1993년 싱가포르 사업가들이 하노이 타워를 짓는다는 목적으로 대부분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현재는 정문 등 수용소의 남쪽 일부만 남아서 주로 프랑스에 대항했던 ‘독립 전쟁’과 미군에 대항했던 ‘통일 전쟁’을 기억하기 위한 관람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높은 층 고를 받드는 하얀 벽에는 옛 느낌 가득한 짙은 밤색의 원목 창문이 줄지어 있었다. 그 창문으로 건물의 노란 외벽을 비춘 노란빛들이 스며 들어왔다. 지나왔던 어두운 통로와는 다르게 행사장이 마련된 공간은 꽤나 밝은 느낌이었다. 앞쪽에 마련된 간이 무대를 바라보고 놓여있는 의자에는 이미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아오자이를 입은 스텝이 내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무려 앞쪽에서 두 번째 줄의 귀빈석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미 자리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은빛 머리카락으로 가득했다. 정말이지 내 검은 머리가 이렇게나 튈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처럼 그들이 입은 제복, 혹은 양복에 가득 매달린 훈장들도 주렁주렁 빛났다. 나는 그만 튀고 싶은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올려둔 내 가방에서 노란 리본 배지, 4.3 동백꽃 배지, 그리고 아들이 준 우주인 배지가 빛났다. 나는 오늘이 내 생에 손꼽을 만큼 부담스럽고도 특별한 자리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귀빈 소개가 이어졌다. 역시나 앞의 세 줄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00 클럽'으로 불리는 퇴역 군인들이었다. 대부분 할아버지들이었지만 내 뒷줄에는 할머니 한 분도 있었다. 모두 베트남의 통일에 공을 세운 북베트남 측의 군 간부들 일거라 추측되었다. 그리고 현직 군 장교, 공안부 간부, 하노이 호안끼엠 구청장, 저명한 역사학자 등등의 소개가 이어졌다. 나보다 뒷자리에 앉아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초대받은 손님 중에 외국인은 다섯뿐이었다. 미국 대사 부인, 미국의 한 친선협회 단체장, 그리고 호아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미군의 자손들, 그리고 한베평화재단을 대신해서 온 나까지. 한 명씩 소개를 들을 때마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한 때 적국이었던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과연 이들이 나를 반가워할까? 혹시나 인사말이라도 시키면 어쩌지? 베트남어를 못하는 척할 걸 그랬나? 왠지 귀빈석 앞자리에 앉은 이들 중 이 전쟁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은 분명 나 하나인 것만 같았다. 그나마 젊어 보이는 내 근처의 촬영 스텝들을 보며 나는 작은 위안을 느꼈다.
“한국의 한베평화재단에서 온 최유리 님”
호명과 함께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자 나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던 은빛머리 장군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내가 한국 단체를 대표해서 왔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저 젊은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되어서 반가운 건지 큰 박수가 들렸다. 내가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할아버지 한 분도 그제야 옅은 미소를 보였다. 사실 아까부터 할아버지의 굳은 얼굴이 신경 쓰였었는데, 할아버지의 얼굴 근육이 불편한 것이 이제야 보였다. 내 바로 앞자리에 있던 최고 연장자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내게로 몸을 돌려 웃으며 손을 흔드셨다. 당신네들 행사에 와줘서 고맙다는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던 할아버지의 손 인사에 어색함과 긴장감과 불편함이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할아버지 뒷목에 다 닳아버린 린넨 천의 옷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의 무거운 훈장을 떼고 나면 그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 험악했던 전쟁을 다 겪어낸 할아버지는 지금의 세상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귀빈 소개가 끝나고 몇 개의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자유, 독립, 평화를 위해 미국과의 전쟁을 겪었지만 이제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고, 베트남은 점점 더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영상들이 보였다. 후반부에선 베트남 비행기 착륙 시에 어김없이 나오는 ‘팜 꾸인 아인(Phạm Quỳnh Anh)’의 노래 <Hello Viet Nam>을 배경음악으로 한 화려한 영상들이 나왔다. 베트남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발전된 대도시, 아오자이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들,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건강한 아이들……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며 베트남이 외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 뒤로 호아로 수용소의 소장님이 단상에 올라왔다. 소장님은 전쟁이라는 참사 속에서 많은 이들이 당한 고통과 희생을 이야기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도 여러 번이고 울컥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통일 국가 베트남에 살고 있지만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울컥과 울컥 사이,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이질감에 불편해하던 내가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 보려고 애를 썼다. 행사 중에 몇 번 인용되었던 한마디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죽어야만 전쟁이 끝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말하고자 했던 건 어느 쪽의 승리나 어떤 방식의 화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이긴 쪽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노이 외곽에 위치한 베트남 우정의 마을에 있는 고엽제 장애인 센터의 영상이 이어졌다. 일명 ‘에이전트오렌지(Agent Orange)’로 불린 고엽제는 미군이 밀림에 숨어 있던 게릴라들을 없애고 식량 자급을 못하게 할 목적으로 베트남 땅 전역에 뿌린 제초제이자, 다이옥신이라는 맹독성 화학물질을 다량 함유한 비인도적인 살상무기였다. 이 화학전으로 인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은 물론 미군과 동맹군이었던 한국군과 베트남 민간인들까지 고엽제에 노출되었다. 약 48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중독되었고, 그중 3백만 명은 여전히 극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4대에 이르기까지도 유전적 후유증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지금도 고엽제와 관련해 매년 수천 명의 장애나 질환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몇 개의 자선 단체와 베트남 회사의 대표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고엽제 장애인 센터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행사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과 관심이 가득했지만, 아무 죄 없이 사지가 뒤틀리고 얼굴이 일그러져 태어난 저 아이들과 부모들의 고통과 슬픔에 얼마나 가 닿을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땅에서 전투는 모두 끝났지만 전쟁의 여파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리본 커팅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밖으로 나가 야외 사진전을 둘러보도록 하는 안내 멘트가 들렸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은빛 장성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섰다.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 최대의 명절인 ‘뗏(Tết, 구정 설)’을 맞이해 방심하고 있던 남베트남군과 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남부의 약 100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이 ‘뗏 대공세’에 사이공의 ‘주월 미국 대사관’도 잠시나마 베트콩에게 점거당했다. 미국 국민들은 각 가정에 보급되어 있던 TV를 통해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인류 최초의 ‘LIVE TV 전쟁’이었다. 물론 엄격한 반공주의 아래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전투병을 파병했던 한국에서는 그 장면을 볼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언론은 박정희 정권의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에 외신을 인용한 관련 보도조차 안 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만드는데 앞장서는 민주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던 미국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전쟁은 절대 악인 공산주의자들을 막기 위한 반드시 치워야 하는 것’이고, ‘막강한 미군이 이 전쟁을 아주 쉽게 끝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던 미국정부는 순식간에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미국 언론들은 막대한 병력과 무기를 쏟아부어 만든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고, 국가적, 이념적 정체성 보다 세대적 정체성이 더 컸던 미국의 젊은이들이 징집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밀라이(Mỹ Lai) 학살’ 등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드러났고, 네이팜탄이나 고엽제 등의 비윤리적인 민간인 살상무기를 베트남전에 사용한 것도 알려지게 되었다. 반전 운동은 절정에 이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는 냉전 체제에 들어서 있었다. 전후 시대에 태어나 국가적 폭력을 경험한 적 없이 자라던 엘리트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공이나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세계 곳곳의 젊은이들이 사회적 폭력과 정치적 폭력에 반대했고, 나아가서는 국가 폭력인 전쟁에도 반대했다. 후에 ‘68세대’라 불리게 된 젊은이들이었다.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서독을 포함한 전 유럽과 일본 등의 힘 있는 국가들뿐 아니라, 공산권이었던 체코와 유고슬라비아, 폴란드에서까지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각국의 연대된 목소리는 결국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하게끔 만들었다.
수용소 야외 공간에 마련된 사진전에는 베트남에서 있었던 전쟁을 향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반전 운동과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 평화 운동의 사진들이 시간 순으로, 그리고 대륙 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당연히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른 국가이자 동시에 가장 격렬한 반전운동을 했던 미국의 사진들이 가장 중점적이었고 양도 많았다. 유명한 사진들 사이에서 ‘MAKE LOVE NOT WAR!’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하던 미국 청년들의 슬로건이 눈에 띄었다. 여러 손님들과 취재진들 사이에 끼어 안내원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자니 땀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전시된 사진들을 거의 다 둘러봤을 무렵, 짙은 녹색 군복을 입은 베트남 젊은 군인들이 전시를 보러 우르르 몰려왔다. 해맑게 사진을 구경하는 청년들의 머리 위로 하늘에 걸려있는 만국기가 보였다. 나는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는 여러 국기들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태극기를 찾았다. 보통 베트남 행사의 만국기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태극기인데 이상하게도 여러 국가의 국기 중에서 태극기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한번 더 사진전을 관람했다.
각국의 반전 운동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다가 다시 머리 위 만국기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미국의 성조기도, 일본의 일장기도, 북한의 인공기도 있었고, 심지어 쿠바나 베네수엘라 같은 낯선 국기까지 있었지만 베트남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인 한국의 태극기가 저 위에 함께 걸릴 수 없는 이유를. 저 하늘에서 펄럭일 수 있는 국기는 바로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 반전 운동을 했던 나라들의 것이었다. 민망함일까, 아쉬움일까 복잡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전시의 마지막, 한쪽 구석에 있던 한국의 '미안해요 베트남(Xin lỗi Việt Nam)' 활동사진 앞으로 자리를 피했다. 베트남 한국군 민간인 학살 마을을 찾은 한국의 평화기행 참가자들이 피해생존자들에게 사죄의 절을 올리는 사진, 2018년 학살 피해자인 두 명의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 아주머니가 한국을 방문해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는 사진, 두 명의 한국 청년이 ‘미안해요 베트남’이 적힌 깃발을 꽂은 채 자전거로 베트남 종단을 하는 사진이었다. 세 장의 사진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땡볕에 더위를 먹은 걸까? 감당하지 못할 자리에 초대받아서였을까? 반전운동이 없었던 내 나라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와서일까? 베트남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이곳에 계속 살아갈 사람으로서 나는 이 진실을 어떻게 안고 가야 하는 걸까...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시원한 커피 한잔이 너무 그리워졌다. 부소장님과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수용소에서 마주한 뾰족한 평화가 콕콕 내 가슴을 찔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