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보낸 격정의 Covid-19 봉쇄기
하노이 어딘가에서 Covid-19 신규 확진자가 나온 건물 전체를 봉쇄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렸다. 좀비영화에서나 보던 '가두고 갇히는 장면'들이 실제로 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 우리 아파트의 같은 동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는 누군가의 메시지가 떴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집에 남은 쌀과 김치와 라면을 확인하고는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뛰쳐나왔다. '땡!'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 밖을 나서자마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동 현관문 앞으로 하늘색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빨간 가이드라인을 치고 있었고, 그 뒤에는 미처 우리 동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혹은 다른 동의 주민들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그 빨간 선 안과 밖, 둘로 나뉘었다. 마치 저 건물 바깥에 더 무서운 세상이 있는 것처럼 나는 뒷걸음질 쳐서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혹시나 틈이 있을까 마스크를 얼굴에 맞춰 꾹 눌렀다.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 마디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와 무언가 묻었을지도 모르는 내 몸을 벅벅 문질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를 재우려던 남편에게 우리 동의 봉쇄 소식을 알렸다. 잠에 들려던 아이까지 가족 모두가 거실에 모였다. 나는 초초함을 감춘 채, 아파트 주민들이 있는 페이스북 그룹에서 정보들을 계속 확인했다. 아파트 주민 대표로 보이는 누군가로부터 새 소식이 올라왔다. 놀랍게도 신규 확진자는 우리 층의 반대쪽 끝 집의 아저씨였다. 총 11 세대 중에 마침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가 병원에 격리되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았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 우리 집 현관 벨이 울렸다. ‘마스크 쓰고 검사하러 나오세요!’ 우리 층 모든 사람들이 눈치게임을 하듯 나뉘어 복도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겁을 먹은 만두에게 수차례 설명을 해 준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스크 두 겹을 씌웠다. 현관문 외시경으로 문 밖의 상황을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멀찌감치 얼굴을 아는 이웃들이 줄 간격을 두고 서 있었지만 마스크 위로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긴 복도에 적막이 감돌았다. 늘 시끌시끌한 베트남에서는 흔치 않은 적막이었다. 우리 가족의 차례가 되어 한 명씩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았다. 부러 하늘색 방역복을 입은 보건소 직원들에게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콧구멍을 내어주는 장면도 보여주었지만 자기 차례가 된 만두는 결국 큰 울음을 떠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이 집 저 집의 아이들이 따라 울어댔다. 내일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복도에 소독약을 엄청 뿌려댄 탓인지 집안으로 아이 주먹만 한 바퀴벌레가 들어왔다.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만두와 같은 유치원을 다녀서 평소에 왕래가 있던 같은 층 바오푹네 엄마 호앙과 페이스북 메신저로 안부를 물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남편과 함께 하노이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호앙네는 시부모를 모시고,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두 아들과 이제 막 태어난 막내딸, 그리고 시골에서 유학 올라온 고등학생 시조카와 가끔 방문하는 시누이까지 많을 땐 9명이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다. 호앙이 베트남 국민 메신저인 잘로(Zalo)가 있냐고 물었다. 광고나 스팸 메시지가 자주 오는 게 싫어서 12년간 부득부득 가입을 안 하고 버티며 살아왔는데 이젠 때가 된 듯했다. 결국 내 휴대폰에 잘로 어플을 다운로드했고, 호앙의 초대로 긴급하게 만들어진 33층 주민 잘로 방에 들어갔다.
건물 봉쇄 및 자가 격리 2일 차. 베트남 정부는 '적군에 대항한 것처럼 방역하자!', '집에 있는 것이 애국이다!', '증상이 있는 자, 격리를 위반한 자, 가짜뉴스를 유포한 자 즉시 신고하라!'라며 코로나 애국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종군 작가 출신의 유명한 화가는 '바이러스와의 국가적 전쟁'을 위한 선전포스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봉쇄 정책에도 불구하고 하노이에도 곳곳에 확진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베트남 보건국과 하노이시에서 발표하는 각종 시행령도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병원 시설, 군 막사나 대학생 기숙사 등 낙후된 격리시설에 대한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혼란과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저녁 6시 이후 절대 통행금지를 내린 호찌민시에 이어 하노이시도 덩달아 강력한 셧다운을 시작했다. 약국, 병원, 식료품 가게를 제외한 식당이나 일반 상점이 문을 닫은 건 이미 오래, 거리에선 공안이 이동 중인 차량을 모두 확인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동을 금했고, 문을 연 직장에도 찾아와서 최소 인원을 재외 한 나머지의 재택근무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출근을 하던 남편은 퇴근 후 봉쇄가 된 탓에 최소 2주간은 출근을 못 하게 되었다. 아빠와 종일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만두는 그저 신이 났다.
다행히 우리 집엔 어제 잔뜩 장 봐온 것들이 있었고, 냉장고엔 내가 작년부터 관심 갖게 된 저장식품도 꽤 있었으며, 한창 ‘셰프 놀이’에 심취한 남편도 있었다. 처음 해보는 재택근무에 긴장도 잠시, 남편은 일하는 틈틈이 식사와 간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집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온 가족이 운동도 시작했다. 거실 한쪽 벽에 서서 오랜만에 키를 잰 만두는 이전보다 1cm 더 높은 곳에 표식을 그렸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는 모양이었다. 곧 만두의 초등학교 입학식 일정이 있었는데 하노이의 셧다운으로 인해 입학이 2주 연장되었다. 격리 기간에 입학식을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시 입학식에 갈 날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다.
33층 주민 잘로 방에선 종일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수시로 모여서 행사를 열고 교류를 하는 다른 층 사람들에 비하면 나서는 사람이 없어 층 반장 한 명 뽑기도 어려운 얌전한 우리 층 이웃들도 특수 상황에 만들어진 그 채팅창에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어놓고 노래방 기계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 큰 이웃 할머니네도, 층마다 있는 쓰레기 수거실에 쓰레기를 더럽게 내놓아 많은 이들에게 욕을 먹던 새로 이사 온 이웃도, 쑥스러움이 많아 데면 데면 인사도 잘 안 하던 이웃들과도 휴대폰을 통해 마음을 주고받았다. 특별한 지침 없이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이 상황에서 각자 알아본 정보를 공유했고 응원과 위로를 나누었다. 세입자가 아무도 없이 비어있는 집, 청년 혼자 사는 집, 아빠가 출장 가서 없는 집, 노인이 있는 집, 어린아이들이 있는 대부분의 집, 신생아와 산모까지 있는 집, 유일한 외국인이 사는 우리 집까지 10개 가구가 서로의 안부를 서로 주고받으며 평소에 하지 못했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특히 지역 보건소에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수수방관 무능했던 아파트 관리실과 과부하가 걸린 지역 시스템을 함께 욕하며 모두 하나가 되고 있었다.
확진자가 있는 우리 층을 포함해 위층과 아래층까지 총 세 개 층의 90여 명이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아파트 주민대표가 그 세 개 층 모든 세대의 명단을 모아 지역 보건소에 제출했다. 검사도 받지 않은 채 무작정 격리되어 있는 다른 층의 사람들은 이 90여 명의 결과를 기다리며 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같은 동에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 틈틈이 연락이 해서 결과를 물었다. 그러나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도 검사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한국이었으면 이미 모두의 결과가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 '아직도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33층 주민 잘로 방에 누군가 답했다. ‘아마 다 음성일 거예요! 양성이면 진작에 잡아갔을걸요?' 모두가 공감하며 한바탕 웃는다. 뉴스 기사에도 우리 아파트의 사진이 실리고, 보건소에 리스트에 올려져 관리까지 받는 데다가,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번 일이 지나가고 나면 조용했던 우리 층에서도 성대한 파티가 열릴 것 같다. ‘전우애’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가 격리 3일 차. 필요한 물건을 어떻게 공급받을 건지, 각 층마다 있는 쓰레기 통에 쓰레기를 넣지 못하는 대신 쓰레기 봉지를 각자의 현관문 밖에 내놓아도 되는 건지, 그걸 누가 어떻게 치울 건지 등에 대해 여전히 명확한 답이 없었다. 외부에서는 우리 동 주민 전체를 잠재적 확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각 가정에서 아파트 1층에다가 배달시킨 물건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직접 내려와서 가져와야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건물 안에 확진자가 있다면 더 확산될 수도 있는 방식이었다. 냉장고에 늘 및 반찬이 있는 한국 가정과는 달리 보통의 베트남 가정에선 그날 먹을 만큼만의 야채와 고기를 사서 매 끼니 해 먹기 때문에 식재료부터 분유나 기저귀, 약 등이 필요한 집들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물건을 가져와야만 했다. 그러던 중 우리 동 전체 잘로 방에 청년 하나가 나섰다.
"제가 할게요. 어차피 지금 우리 집엔 저 혼자라 확산될 걱정도 없고, 격리 기간 동안 집에서 할 일도 없으니 운동도 할 겸 제가 할게요. 정해진 시간에 3개의 집중 격리 층에 가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1층에 있는 물건을 각 집마다 올려놓을게요."
청년의 말 한마디에 역시 다른 층에 격리 중이던 젊은 남성 둘이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순식간에 3명의 자원봉사자 팀이 꾸려지고 3교대로 시간이 정해졌다. 아직 테스트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우리 층에 올라온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들 덕분에 이제 쓰레기를 매일 버릴 수 있고, 현관 앞에서 바로 생필품을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가 격리 4일 차. 총 3개 층에서 검사한 90여 명 모두가 음성이라는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 그러나 집 안에 남아있던 확진자의 아내는 결국 양성으로 확인되어 남편이 있는 군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 집에 홀로 남아 있는 11살 아이를 위해 1회 접종을 받은 삼촌이 아이를 돌보러 왔다. 33층 사람들은 부부가 같은 병실에 격리된 확진자 부부의 상태를 확인하고 위로하며 다 함께 그 집에 남아있는 아이를 챙겼다.
하노이에 사는 한국인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안부와 위로를 전하던 마지막 당부는 '부당한 일이 생기면 바로 대사관이나 한인회에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2주 전 호찌민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첫 한국인 사망사건과 관련해서 한국 언론은 '어떻게 유가족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화장을 해버렸냐'에만 초점을 맞췄고, 연일 베트남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만을 내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호찌민시 최대의 코로나 치료 시설인 '쩌러이(Chợ Rẫy) 병원'을 포함한 모든 의료진의 가용능력과 시설은 포화 상태였다. 의료진들은 수십 일째 한계를 넘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미처 병상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베트남 확진자들도 수두룩했다. 한국인을 챙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베트남 자국민조차 챙길 여력이 부족했다. 유가족들에겐 너무도 황망한 소식이겠지만, 분명 혼자 거주 중인 한국인들과 양성 확진을 받거나 격리 중인 한국인들에 대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뒤늦은 대처를 한 재베트남 한국 공관의 잘못도 분명 있었다. 이 일 이후에 하노이 한인회와 재베트남 한국 대사관 등에서 뒤늦게 확진자 및 격리자 수를 조사하고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우리 동에 사는 세 가구의 한국인 거주자 정보를 모아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했다. 무려 두 명의 한국인 직원과 번갈아 통화하며 같은 이야기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예산이 없고 절차가 복잡해서 바로 지원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긴급지원비가 없는 행정 예산'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대사관 어린 직원들에게 말해봤자 그들도 힘들지 싶어, 내키지 않지만 소개받은 한인회로 다시 연락을 했다. 처음부터 시큰둥하게 응대를 하던 한인회의 한 직원에게 다시 구구절절 상황 보고를 했으나, 대응책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저희가 어떤 지원을 해드려야 하는데요?"
"네? 여기는 한인타운이 아니라 한국어가 통하는 동네도 아니고요. 저희는 지금 2주간 현관 밖을 못 나가는 상황인데, 그나마 제가 베트남어를 할 수 있어서 관리실이나 지역 보건소의 상황이나 공지는 한국 분들께 전하고 있고요. 생필품은 무엇이든 지원받으면 좋죠. 만약 지원이 안 된다고 하시면 오늘이 금요일이라 출근해 있는 지인들에게 퇴근길에라도 물건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해야 하니 빨리 답변 주시면 좋겠어요."
"그래요?? 음……"
"지금 저는 저희 확진자 층은 문 앞에 쓰레기를 내놔도 되는지 아닌지, 물건을 내려가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언제까지 격리를 할지, 확진자가 더 있는지 등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베트남 이웃들과 함께 관리실과 계속 논쟁을 해오고 있는데요. 근데 만약 다른 동네에 베트남어를 못하는 다른 한국인 격리자가 생기면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나요? 지금 다른 층에 있는 한국인 가족은 아파트에서 지정한 슈퍼로 전화를 해서 아이 우유를 주문했는데 베트남어 소통이 어려우니 아이가 못 먹는 우유를 받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 근데, 슈퍼에 주문이 되는 거면 그냥 주문해서 사 드시면 되잖아요?"
이런!!!! 복지가 아니라 구걸로 느끼게 만드는 그 답변에 나는 화가 났다. ‘괜찮나’는 걱정 한마디, ‘뭔가 해보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위로 섞인 한마디를 기대한 건 정말 내 욕심이었다. 결국 그는 '아, 그니까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니까요!'라며 신경질 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잠시 후 다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우리가 아직 지원 준비 중이고 내부 회의 중인 내용인데 이 내용을 어디서 알았냐’는 것.
"그건 격리 중인 저희에게 지금 필요한 질문이 아닌 거 같은데요. 그건 내부에서 알아보셔야 할 것 같고요. 그래서 지금은 저희에게 지원이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건 그렇죠...... 지금 지원 관련 내용은 논의 중에 있습니다."
"그럼 지금은 지원이 안 된다는 거죠?"
"아니, 지금 지원 준비 중에 있어요."
"그니까 지금은 안 된다는 말씀이신 거죠? 제가 여기 다른 한인 가족들에게도 알려야 해서요."
"아. 네. 지금은."
다행히 통화를 마치고 나서 우리 세 개 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의 격리가 해제되었다. 먼저 풀려난 다른 층의 한국인 가족이 생필품 꾸러미를 보내왔다. 청년 자원봉사단이 1층에 있는 지원 테이블에서 우리 집 현관문 앞까지 꾸러미를 빠르게 가져다주었다. 꾸러미 속 여전히 차가운 맥주와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으로 뜨거워진 속을 달랬다.
자가 격리 6일 차. 이제 우리 동에서 유일하게 격리 중인 외국인 가구로서 실제로 우리가 가장 큰 도움을 받는 곳은 그 어떤 한국의 지원이 아닌 아파트의 주민 자치 조직과 베트남 이웃들이었다. 33층 주민 잘로 방에선 아침마다 새로운 정보를 나누고 이 상황이 끝난 후에 함께 식사를 하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3명의 청년으로 시작된 자원봉사단은 다른 동에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하여 인원이 늘어났다. 3교대 팀으로 계속 운영이 되며 3개 층의 30세대가 넘는 격리 주민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은 마스크 한 박스와 베트남 사람들이 자주 볶아먹는 나물인 ‘모닝 글로리(Rau muống)’ 한 묶음과 달콤한 열대과일 '꽈 나(Quả na, 슈가애플)' 한 봉지가 우리 집 현관 앞에 놓였다. 내일은 팩우유 한 묶음과 ‘반미(Bánh mì, 바게트 빵)’가 배달될 거라고 했다. 갓 만든 빵이라니, 격리 중에 접하기 힘든 귀한 선물이었다. 다른 동의 익명의 주민들, 먼저 격리 해지된 다른 층의 이웃, 확진자가 다녀간 동네 슈퍼 등에서 기증한 것을 격리 가정에 고루 나누는 것이라 들었다. 불필요한 통행을 금지하기 위해 군데군데 도로도 통제된 상황에 주 3회만 주어진 통행증을 내고서야 아파트 밖을 나갈 수 있는 요즘, 부러 마트까지 가서 이웃들을 위해 반미를 잔뜩 사 와서 전하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봉쇄 시기에 베트남 이웃들과 소통이 안되어 오해와 불신으로 고립되어 가는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렸다. 하지만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2주간의 격리 기간 동안 나는 매일 베트남 이웃들의 '정'을 느꼈다. 베트남에서 부족한 시스템을 채워 주는 건 '결국 사람'임을 다시 깨달았다. 아파트 관리실이나 지역 보건소 등의 체계적이지 못한 시스템과 소통 문제, 그리고 한국보다 느린 처리 속도 등에 대한 아쉬움 따위는 싹 다 잊을 만큼의 '정'이다.
‘은혜를 고맙게 여기는 마음(感恩)’을 담아 모두에게 인사를 보낸다. 깜언(Cảm Ơ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