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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화자 May 18. 2019

나의 서울 유랑기 - 강남 편

그렇게 낙성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낙성대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아내와 제가 취업을 해서 ‘어른스러운’ 생활을 시작한 때였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릅니다. 마침 친한 선배 부부가 서울대 교직원 기숙사에 살고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선배 누나의 미국인 남편에게 가끔 영어 튜터링을 받았는데 튜터링은 핑계였고 거의 수업의 끝은 음주였습니다. 어느 날은 두 사람이 너무 맘에 드는 술집이 있다며 몇 번씩 얘기했던 곳을 가게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도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누나네 부부와 우리 커플 네 명은 취할 대로 취해 결국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


 생각해보니 낙성대 곳곳엔 먹고 마실 곳이 정말 많았습니다. 샤로수길이 되려는 움직임이 꼼지락 대던 초입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절초풍 왕순대, 나인온스버거, 장블랑제리, 돼지네, 낙성대의 랜드마크인 장보고 마트까지. 술에 취해, 술에 취한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던 골목의 밤공기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렇게 만족하며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집이 너무 좁아 보이더라구요. 취업을 해서 회사에서 입는 옷들도 늘어났고, 돈을 버니 이런저런 세간살이도 늘어났기 때문이죠. 몇 주 동안 방을 알아보다가 후다닥 바로 옆 봉천역 근처의 더 큰 원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구여친현아내는 야반도주하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이사를 하더랍니다. 나름 매사에 꼼꼼하고, 뭐 하날 사더라도 꼼꼼하게 다 따져보고 사는 사람인데 뭐에 씐 듯 그런 행동을 하면 꼭 무슨 문제가 터지더군요.


 새로 이사한 곳의 방은 훨씬 컸습니다. 나름 베란다도 있고, 부엌은 분리된 구조였죠. 방을 밤에만 보고 결정했던 터라 낮에 본 방과는 느낌이 좀 달랐지만 그래도 더 커진 방이 만족스러웠습니다. 문제는 이사를 마친 날 밤에 일어났습니다. 도로명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네이버에 지번주소를 검색을 했는데 주소 말고 몇 개의 웹페이지가 함께 검색이 되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예전에 이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글이었습니다. 글 내용은 가관이었습니다. 집주인이 세입자의 방에 몰래 들어오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소송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사람의 글이 서너 개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이 봉천동 일대에선 유명한 악독 집주인이었던 겁니다.


 그날 이후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은 이상했던 점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사하던 날 같이 살게 됐으니 인사나 하자며 절 자기 집으로 부른 주인집은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더러웠어요. 살림을 하고 있는 집이 맞나 싶었습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아들, 만취해 절 붙잡고 횡설수설하다가 이제 그만 하라는 아주머니에게 쌍소리를 하며 면박을 주는 아저씨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아주머니의 이상한 간섭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방에서 전기장판을 쓰면 전기세 몇만 원을 더 내야 된다는 둥 전열기를 쓰면 안 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얘기였습니다. 흠 잡히기 싫어서 일부러 아주머니에게 싹싹하게 굴며 친하게 지냈는데, 언젠가는 몇몇 나쁜 세입자들이 있어서 송사가 걸려있다는 말을 저에게 하기도 하더군요. 매우 빈번하게 주인집에서 소리 지르고 뭔가 깨지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위층이 주인집이었는데 아저씨의 술주정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였죠. 3개월쯤 버티다 결국 이사를 결심했습니다. 혹시나 저도 보증금을 떼일까 봐 터키 출장에서 사 온 선물을 내밀며 갑자기 지방 발령을 받게 됐다는 거짓말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사를 하던 날 보증금을 받기 위해 같이 은행에 갔는데 저에게 그러더군요. 이 건물 팔았다고. 이런 씨...


 도망치듯 이사를 온 곳은 목동이었습니다. 목동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목동 아파트? 학원가? 좋은 학군? 예 맞습니다. ‘목동’에 대한 대다수의 인식은 좋은 동네, 잘 사는 동네죠. 이사 오기 직전의 주소는 봉천동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달동네의 아이콘. 사실 주거의 질 자체만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누군가 저에게 사는 곳을 물었을 때 봉천동과 목동 두 곳에 대한 반응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목동’에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줄 필요성은 없었고, 얼마간 그 오해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건물은 연식이 좀 된 다세대 주택이었지만 그래도 방과 주방이 분리되어 있고 베란다까지 있는 집이었습니다. 비슷한 조건의 집 대비 전세가도 쌌고 관리비도 없었기 때문에 쉽게(?) 첫 회사에서 퇴사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집에서 제 직업에 참 많은 변화가 일어났었네요. 첫 회사에서 퇴사, 전업투자, 그리고 두 번째 회사로의 취직까지. 여러모로 참 고마운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를 온 곳이 신혼집인 송파동입니다. 마지막 자취방에서 이사를 하던 게 생각납니다. 10년 전엔 박스 몇 개에 가방 하나 달랑 트렁크에 실어 상경했는데 어느새 짐은 자가증식이라도 이라도 한 것 마냥 1톤 트럭을 한 가득 채울 만큼 늘어나 있었습니다. 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돈을 계약서에 쓰고 전세로 들어온 빌라는 짐을 다 넣고 나니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그래도 뭐 신혼이니 마냥 행복했습니다. 알콩달콩 저녁을 지어먹고, 석촌호수로 올림픽공원으로 나서는 산책은 저희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잠실에 산다고 하면 "좋은데 사네요"라는 부러움은 덤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서울 유랑기, 저의 이주 역사입니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고작 1년의 기간 동안에도 이사를 세 번했으니 제 청춘은 그야말로 이사로 점철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만 그런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망찬 내일을 그리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춘들은 대부분 그러지 않았을까요? 다른 글에도 썼지만 귀향을 결정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주거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반복된 이사에 어느새 질려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나만 유별나게 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의 서울 살이가 이제 반년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15년 후, 저는 서울 살이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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