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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쉬 LUSH




러쉬가 인권·동물보호·환경보전 활동에 앞장선 단체들을 후원하기 위해 판매하는 ‘채러티 팟’ 상품. / 러쉬코리아



꽤 오래전 일이다. 해외에 가는 길에 지인에게서 “‘러쉬(LUSH)’의 화장품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내가 사는 지역엔 러쉬 매장이 없었다. 처음엔 의아했다. ‘굳이 해외에 가야 구할 수 있는 화장품을 고집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러쉬의 매장을 찾았다. 출입구에서부터 형형색색의 거품이 매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직원들은 전시된 욕조 안 거품을 가지고 행인들과 장난을 쳤다. 상품에선 좋은 향기가 감돌았지만 포장 없이 덩어리째 진열돼 있었다. 포장이 불가피한 화장품만 검은색 용기에 담겨 있었다. 삐뚤게 쓰인 상품명은 지저분하고 조잡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반적인 화장품 가게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때마침 직원이 응대하러 곁으로 왔다. 포장 없이 덩어리째 진열하고 있는 이유를 물어봤다. 2007년부터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는 포장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 네이키드(Go Naked)’ 글로벌 환경 캠페인을 실행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포장지와 용기는 모두 자연분해가 가능한 재활용품이라고 했다. 빈 용기 다섯 개를 가져오면 새 제품 한 개로 바꿔준다고도 했다.




포장 없이 덩어리째 진열하는 이유


매장 곳곳에 붙여진 포스터에 대해서도 물었다. 창업 이래 계속해서 활발하게 동물 권리 캠페인과 청원 운동을 벌이면서 화장품 산업에 만연해 있던 동물실험의 폐해를 알린다고 했다. 러쉬는 ‘러쉬 프라이즈(Lush Prize)’라는 이름으로 동물실험을 끝낼 수 있는 혁신적인 해결책을 발굴하기 위해 2년마다 한 번씩 25만 파운드(약 3억7000만원)에 달하는 상금을 걸고 구체적 대안을 찾고 있다.


영국의 프레시 핸드메이드 화장품 브랜드인 러쉬는 1994년 영국 남부의 작은 항구도시인 풀(Poole)에서 설립되었다. 2018년 기준 연간 총매출액은 약 9억 달러(약 1조원)에 달한다. 러쉬코리아의 국내 매출액은 같은 해 기준 848억원으로 최근 3년간 연평균 11.3%씩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성장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러쉬의 공동 창업자인 영국의 모발학자 마크 콘스탄틴과 뷰티 테라피스트 리즈 위어는 직장 동료였다. 1977년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이던 콘스탄틴은 위어를 설득해 ‘콘스탄틴 앤 위어’라는 미용 클리닉을 열었다. 과일과 채소 등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염색약과 로션을 직접 만들어 팔았다. 사업은 1980년대 초 ‘더 바디샵’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더 바디샵에서 가장 판매율이 높았던 페퍼민트 풋로션·코코아 바디버터 등이 이들의 제품이었는데, 이후 다양한 거래처가 늘어남에 따라 더 바디샵과 의견이 엇갈렸다. 1984년 그들은 약 1100만 파운드에 ‘콘스탄틴 앤 위어’를 더 바디샵에 매각했다.


회사를 매각한 뒤 두 창업자는 동료들과 함께 통신판매 형식의 화장품 회사인 ‘코스메틱 투 고’를 새로 창업했다. 제품 카탈로그를 발행하고 우편으로 주문을 받는 한편, 한 달간 판매할 제품 물량을 준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준비한 시즌 상품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완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몰려드는 주문에 대처할 만한 시스템과 물량을 갖추지 못한 채 결국 두 번째 창업도 실패로 끝났다.


두 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그만큼 창업 노하우도 쌓였다. 이들은 1994년 다시 한 번 새로운 화장품 회사를 설립했다. 스코틀랜드의 한 고객이 제안한 의견을 택해 ‘신선하다’는 뜻이 있는 ‘러쉬’를 사명으로 정하고, 그 이듬해인 1995년 4월 정식으로 출범했다. ‘코스메틱 투 고’ 시절 단골 고객의 도움으로 런던의 ‘핫플레이스’인 코벤트가든에 1호점을, 런던 킹스로드에 2호점이자 첫 대형매장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러쉬는 총 50여 개국에서 90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러쉬의 성공비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은 ‘신선한 핸드메이드’라는 이들의 핵심 가치다. 여기에 원료 수확에서부터 제조 및 유통, 포장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고수하는 원칙이 뒤따른다. 처음 창업할 때 모든 제품을 과일이나 채소 같은 식물 원료에서 추출한 친환경 성분으로 만들었던 방법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들은 제품 제조 공장을 ‘키친’이라 부른다. 화장품 원재료를 마치 식자재처럼 관리하고, 요리하듯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일부 매장에서는 시연 공간을 만들어 직접 제조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매장에서 직접 제조 과정 보여주기도


이러한 자신감은 확실히 기존 화장품 브랜드와는 다르다. 대부분의 화장품 브랜드가 화려하고 세련된 그래픽이 가미된 포장 디자인에 미사여구로 일관된 홍보문구를 넣어 소비자를 유혹하지만 러쉬는 정반대다. 심지어 광고조차 하지 않는다. 유명인을 모델로 기용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소비자가 제품을 쉽게 고를 수 있도록 제품마다 사용된 성분 목록을 만들어 제공한다. 여러 소셜미디어(SNS) 채널을 활용해 제조과정과 재료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콘텐츠로 만들어 공유할 뿐이다.


한때 샴푸에 들어가는 계면활성제 성분 중 하나인 라우릴황산나트륨(SLS)이 두피에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다. 러쉬는 즉시 자신들의 샴푸에 포함된 계면활성제 수치를 공유하고 각국의 의사회·산업협회와 함께 자사 제품의 안전성을 검증했다. 한편으로는 인체에 무해한 계면활성제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캠페인 활동도 진행했다. 그밖에도 러쉬는 환경과 인권, 동물권을 보호하는 다양한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전용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기부를 권하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실제로 빛을 발했다. 2013년 3월부터 유럽연합에선 화장품 동물실험 영구금지 법안이 발효됐고,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 완제품은 물론 원료까지도 판매 및 수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마크 콘스탄틴은 러쉬가 기존 화장품 브랜드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유를 메뚜기와 꿀벌에 비유해 설명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돈을 잔뜩 쥔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면 이들은 메뚜기가 되어 탐욕을 일삼으면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훼손하게 된다. 반면 꿀벌처럼 차근차근 회사를 키우고, 돈을 벌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으며 좋은 일을 하면 브랜드가 지닌 윤리적 소명과 가치를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의 식견은 현실에서 그대로 적중했다. 유기농 아이스크림 회사인 벤엔제리는 유니레버에, 더 바디샵은 로레알에 팔리면서 최초의 가치가 사라졌지 않은가.


나는 처음 러쉬 매장을 찾았던 그날 지인의 부탁은 까맣게 잊고 내가 쓸 화장품을 먼저 샀다. 솔직히 비싼 돈을 주고 살 만한 제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글로벌 브랜드 매장임에도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수제 화장품 매장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고 모든 제품을 까다롭고 철저하게 만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를 비롯한 소비자들이 선뜻 브랜드를 선택하고 지갑을 여는 데는 이렇듯 구매와 사용 과정에서 느끼는 작지만 강한 감정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그 브랜드가 멋진 신념을 지켜가고 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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