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 대리 직급으로 한창 바쁘던 무렵, 친구들과 만나면 서로 앞다투어 신세한탄을 했다. 주제는 매번 '위아래 눈치 보다 죽겠다. 때려치우고 싶다'와 '월급쟁이로 살다가는 가난 못 벗어난다'였다. 회사 동기들과 만나도 비슷한 주제였다. 승진은 멀어보였고, 꼰대들은 너무 우리를 힘들게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모두 예전처럼 만나기가 어려웠다. 가정이 생겼고 해야할 일도 많아졌다. 그중엔 팀장이 된 친구도 있었고,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주말에 출근하는 친구도 있었다. 모두들 선배보다 후배가 많은 위치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낀 세대'라고 불렀다.
어느 날, 단체 채팅방에 놀라운 소식이 올라왔다.
"야 봤냐. 이번 네이버 CEO가 81년생이래. 삼성도 30대 임원 많이 뽑았더라."
"그 사람들 다 박사들 아니야? 우리 회사 박사들은 과장으로 입사하던데"
"그래도 30대는 절대 임원 안 시키던데.."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80년생 임원의 상당수는 박사급 인재들이었다. 요즘 부상하고 있는 AI나 IT 전문가가 많았다.보여주기식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사(HR) 관점에서 보면 이는 큰 변화를 의미했다.
@머니투데이
'빨리 임원이 되면 빨리 회사를 나간다'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그래도 임원은 선망받는 직급이다. 80년대생을 경영자로 선정했다는 것은 회사의 인사 방향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두 번 하고 말 행동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회사들은 연공서열 파괴, 성과중심으로 인사제도를 바꾸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이유로 회사는 MZ세대의 등장을 꼽았다.
대한민국의 인사제도를 선도하는 회사는 삼성전자다. '삼전'이 하면 모두 따라한다. 적어도 고려는 해본다. 그래서 대부분 회사는 삼성전자보다 늦게 인사개편을 한다.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고 최종 결정하려는 이유에서다. 굳이 삼성전자와 반대로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삼성전자는올해 인사개편의 이유를 MZ세대(1980~2000년생)에서 찾았다. 주력으로 등장할 MZ세대를 위해 직급을 단순화하고,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능력중심, 성과중심을 앞세워 나이가 어려도 충분히 고위직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게 바로 80년대생 임원의 의미다.
실제로 국내 시가총액 50위 기업 임원 중 80년생 임원은 50명이다. 2020년에 31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이다. 심지어 삼성은 올해 37세(1985년생) 직원을 임원으로 올렸다.
대체 MZ세대가 어떻길래 회사는 이렇게 MZ를 외치는 걸까? 정치인들은 표 때문에 이들을 입에 올린다고 하지만 회사는 무슨 이득이 있어 이러는 걸까? 변화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다. 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고 본다.
첫째, 회사는 원래 젊은 세대를타겟으로 인사제도를 개편한다.
둘째, 인구구조와 사회구조가 변하고 있다. 기업은 인건비를 줄이고 있다.
인사제도는 신입사원 입맛에 맞아야 한다
개편은 다음 세대를 위해 진행한다. 개편의 목적은 단순한 제도 변경이 아니다. 최종 목표는 조직문화의 변화다. 우선, 보고와 결재 방법도 바꾸고, 승진 기준도 바꾸고, 복지 혜택도 바꾼다. 그리고 변화를 사내 방송이나 리더 간담회 등으로 지속 홍보한다. 왜? 새로 들어올 친구들이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회사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멋진 말로 '로열티'라고도 한다.
젊은 세대들을 위해 인사제도를 개편한다는 메시지는 홍보에도 아주 효과적이다. 대기업들의 인재전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회사 홍보에는 엄청난 비용이 투자된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대학과도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한다. 몇 명의 80년생 임원으로 큰 홍보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이는 가성비 좋은 선택이다.
개편은 신입사원뿐만 아니라 예비 경력사원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준다. 더불어 내부 직원들에게는 회사가 진보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기업의 승패는 얼마나 뛰어난 인재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낡고 꼰대같은 이미지의 기업보다 젊고 혁신적인 기업이 인재들의 선택을 받는다. 또한 젊은 인재들의 퇴직율도 줄어든다.
심지어 젊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그럼 젊은 인재들의 총 숫자도 줄어든다. 회사를 유능하고 젊은 인재로 채우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숫자의 인재들을 확보해야 한다. 아니, 선택을 받아야 한다. 제도와 문화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개편은 과장 이상 고직급에게 불편하다.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실제 주요 기업들의 제도 개편을 보자. 과장급 이상, 팀장이나 임원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개편인가 @머니투데이
슬퍼할 일은 아니다. 항상 그래 왔기 때문이다.
X세대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2000년대 회사들은 개성과 자기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X세대에 맞춰 인사제도를 개편했다. 3급-갑/3급-을/4급-갑.. 또는 사원/주임/대리/계장 등등 연차별로 세분화되어있던 직급체계를 축소했고, 고위직을 구조조정했다. 자기가 한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했다. 기존에 있던 과장 이상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X세대는 개인주의야, 회사보다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해. 이해할 수가 없는 세대야. 라때는 말이야"
2010년, 밀레니얼 세대가 입사했을 때는 직무를 중심으로 인사가 개편되었다. 주5일제가 정확히 지켜지고, 자신이 원하는 직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했다. 사람들은 '삼성의 마케팅 부서'에 다니는 게 아니라 삼성에서 일하는 '마케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글로벌 업무 기회나 특진의 기회로 늘어났다. 역시 과장 이상 X세대들은 불편해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개인주의야, 회사보다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해. 이해할 수가 없는 세대야. 라때는 말이야"
MZ세대도 마찬가지다. 요즘 부쩍 친구들 입에서 '요즘 애들'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자기들도 밀레니얼 세대면서 예전에도 없던 책임감을 운운한다. 그때마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상한 말을 건넨다
"너 옛날에 회의실에 휴대폰만 들고 갔잖아. 휴대폰으로 내용 적다가 팀장한테 혼난 거 기억 안 나?"
회사는 단 한 번도 젊은 세대를 등진 적 없다. 변화는 젊은 세대를 위한 것이다. 이미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변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퇴사하지 않는다.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늦게 주는 셈이다. 그러니 변화는 새로운 사람들에게박수받지만 기존 내부 직원들에게는 근심이 된다.
더 이상 승진은 없다
인사제도 개편을 잘 뜯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승진 연한 폐지랑 직급 통합/간소화가 MZ세대랑 무슨 관계인가?
절대평가는 MZ세대를 위한 것인가? 등수 없는 평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근 대기업에서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업무 자동화'를 잠시 이야기해보겠다.
회사에는 손으로 직접 해야만 하는 불편한 일이 있다. 사람들은 이 업무를 '지원 업무'라고 멋지게 부른다. 지원 업무 종사자는 따로 직급체계를 두고 채용한다. 초대졸(2~3년제 대학) 채용이나 고졸 채용으로 들어온 이들이다.
업무 자동화가 된다는 말은 지원 업무를 없앤다는 말이다. 업무 자동화가 완성된다면 지원 업무를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업무 자동화는 업무 효율화가 될 것이다. 구조조정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어찌되었든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 줄어든다. IT기술과 머신러닝, 딥러닝 같은 지식에 왜 모든 대기업들이 관심을 갖겠는가? 잊지 말자. 경영학에 적혀 있는 기업의 목적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다.
회사는 이중언어를 좋아한다 @채널A
승진 연한 폐지, 절대평가 등 성과주의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한다. 더 이상 승진을 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회사가 커지면 자리가 생기고, 자리가 생겨야 사람들이 계속 승진할 수 있다. 저성장기에는 회사 규모가 커지기 어렵다.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신규 채용을 하라고 압박한다면, 기업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비용 절감뿐이다.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 중 하나는 승진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승진 연한이 폐지된다는 말은 남들보다 빨리 승진한다는 게 아니라 연차에 따른 승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직급이 통합된다는 말은 승진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부장까지 5번 승진했던 게 2~3번의 승진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승진 횟수가 줄어드니연봉도 줄어든다.
월급 안 올려주는 승진도 있다 @좋좋소
절대평가가 시행된다는 말은 곰곰이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절대평가를 시행하면 평가자의 권한이 더욱 강해진다. 상대평가는 비율을 정해둔 평가다. 전체 중 20%는 A, 60% B, 20%는 C, 이런 식이다. 때문에 무조건 20%는 A를 받는다.
절대평가에서는 30%가 A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예 A가 없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평가자가 결정한다. 교수님이 학생 모두에게 C를 뿌릴 수 있다면, 교수님은 왕이다.
결국 절대평가는 MZ세대와 별 관계가 없다. 관계가 있는 것은 '비용'이다. 업무 자동화도 승진 연한도 직급도 절대평가도 모두 돈과 관련이 있다.
남아있는 사람에게 주목하자
매번 정치권에서는 대기업에게 정년 연장을 요구한다. 정년 연장 비용을 감당하면서 청년 일자리도 유지할 만큼 곳간이 넉넉한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정년 연장은 보통 회사원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혜택이다. 차라리 퇴직을 앞두고 몇 년 더 다닐 수 있는 단축 근무제(파트타임 근무)가 나을 지경이다. 70%의 회사원들은 정년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기업은 인력비 절감을 가속할 것이다. 빠른 승진과 성과주의가 강조될수록 소수 엘리트 중심 경영, 근속연수 단축도 강화될 것이다. 기업은 점차 많은 기능을 아웃소싱(외주)할 것이고, 프로젝트성 업무는 프리랜서를 통해 해결해나갈 것이다.
전 세계 프리랜서 시장과 긱(Gig) 경제가 커지고 있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프리랜서 워커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제 정말로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다음 세대를 위한 개편이 일어난다. 그날이 오면, MZ세대도 왕좌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줘야 한다. 왕좌에서 물러난 MZ세대는 X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의 '낀 세대'가 될 예정이다. 그들의 모습은 지금의 X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그때 MZ세대가 맞이할 세상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것이 '직장 없는 시대'일지, '대퇴사시대'일지, '자동화 시대'일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한다. 지금보다 회사원이 유리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