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회사원이라면 아마도 작고 귀여운 월급통장이 생각날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월급날은 21일이었다. 항상 월급은 9시 이전에 입금된다. 기분 좋게 출근하라는 회사님 지시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침 7시경 입금되었다는 문자를 보면서 "설마 은행원이 새벽 출근해서 보내주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매번 입금되는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월급날이면 회사 1층의 커피숍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린다. 선배들도 '오늘 월급날이잖아'하면서 괜히 커피 한 잔을 사주곤 했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디저트를 고르라고 부추기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온 것처럼 회사원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그래.. 우리도 알고 있다. 이게 바로 끊을 수 없는 진통제라는 것을.
진통제는 괴로운 회사생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지워준다. 진통제는 월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원들에게는 종합 진통제 3종 세트(월급, 인센티브, 복지 포인트)와 더불어 다양한 것들이 제공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10년을 훨씬 지난 대학교 수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나는 학점이 잘 나오는 수업을 찾아서 들었다. 하지만 모든 수업을 그렇게 채울 수는 없었다. 학점이 잘 나오지 않기로 유명한 조직심리학 수업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슬펐다. 학점은 포기했지만 수업은 재미있었다. 수업 내용 대부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학자는 잊을 수 없다. 바로 허즈버그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의 이론은 어디서든 종종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훗날 현업에서는 더욱 자주 등장했다.
4년 내내 고민했다. 나의 글짓기 실력..
허즈버그 교수님은 Howdoyoumotivateemployees? <어떻게 직원을 동기부여시키나?>라는 논문을 책으로 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경영학의 대부다. 이분의 유명한 이론은 <위생-동기 2요인> 이론이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요인은 2가지가 있는데, 서로 역할이 다르다. 하나는 부족하면 불만이 생기는 '위생 요인'이고, 하나는 만족을 위해 채워줘야 하는 '동기 요인'이다. 두 개는 완벽히 다르다. 불만을 없애는 요인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만족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회사 정책과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꾸 회사가 싫어지고 화가 나지만 정책과 방침이 좋다고 해서 회사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성취감 있는 일을 많이 할수록 회사 다니는 게 만족스럽겠지만 그런 일이 없다고 해서 불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 이론은 평가와 보상, 교육 등에 널리 널리 적용된다.
성장부터 위로는 동기 요인, 아래는 위생 요인이다
위생-동기 이론은 회사에 너무 잘 들어맞아서 고통스러운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매번 회사정책, 관리감독, 상사 문제, 작업 조건, 급여, 개인생활 없음 등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인사팀은 열심히 이러한 부분들을 보완해나갔다. 어느 정도 위생(불만) 요인들이 정리되면 다시 동기(만족) 요인이 문제가 되었다. 성취감 있는 일, 인정하는 분위기, 책임감 있는 일, 승진 기회, 성장을 위한 지원 등이 부족하면 사람들 눈에서 영혼이 사라졌다. 불만도 없고 만족도 없는 사람들이 대거 생겨났다.
영혼 없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 조직에 문제가 생긴다. 놀라울 정도로 업무 속도가 느려지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무사안일주의가 생긴다. 이런 분위기가 한 번 생기면 없애기가 매우 어렵다. 차라리 만족도 높고 불만도 많은 편이 낫다.
이럴 때 가장 급하게 쓸 수 있는 처방약은 조직 개편이다. 조직을 쪼개고 합치면 좀 나아진다. 하지만 조직을 개편하면 다시 정책, 관리감독, 상사/동료 문제가 생겨난다.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위생(불만족) 요인을 건들지 않으면서 동기(만족) 요인을 채우는 방법은 없을까? 세상에 완벽한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쓰고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일을 빡시게(?) 시키는 것이다.
의미 없는 일은 오랫동안 반복한다는 말이 아니다.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많은 일과 책임감을 주는 것이다. 일의 담당자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쉴 틈 없이 일하게 된다. '이 일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내가 담당자라 내 책임이야', '이게 나의 경력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에게는 몰입의 즐거움, 책임감, 성취감이 생긴다. 프로젝트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성장하는 기분도 든다. 허즈버그 박사님의 만족(동기) 요인이 충만해지는 순간이다.
여기에 성과를 인정하는 문화까지 더하면 화룡점정이다.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 Award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작고 귀여운 상금을 주고 사내 방송에 홍보한다. 어떤 회사원이 훌륭한 회사원인지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또한 사내방송으로 다양한 동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걱정 마세요. 비슷하게 사는 비슷한 동료들이 여기에 많답니다.
남들과 같이 살고 있다는 안정감. 내 옆에 있는 동료도 나랑 비슷하다는 편안함. 거기에 내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소유욕과 책임감. 정기적으로 느끼는 성취감과 인정, 이 모든 것은 '일'에서 나온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많은 진통제를 맞는 셈이다. 만족이 높아지면 불만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회사원은 항상 바쁘다. 그럼 대체 왜 바쁜가? 일이 많아서다.
왜 일이 많은가? 회사가 어렵고 많은 일을 주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을 주는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상한가?
일이 적고 바쁘지 않다면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며 기뻐할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다. 성취감과 보람이 부족하면 만족도가 떨어진다. 만족도가 떨어지는데 불만까지 생기면 사람들이 회사를 떠난다. 어서 진통제를 줘야 한다. 불만의 진통제 월급! 만족의 진통제 일! 월급! 일! 월급! 일!
이제 "아.. 제가 좀 바빠서요"를 입에 달고 살게 된다. 그리고 바쁜 나 자신이 그리 나쁘지 않다.
그래도 너무 바쁘면 킹받는다
내가 '일'로 진통제를 맞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없으면 회사도 손해'라는 생각이 드는지 확인해보자. 이게 바로 '나 없이 회사가 굴러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내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퇴사를 하면 회사가 아주 조금은 안 돌아갈 줄 알았다. 동기에게 물어보니 아니더라. 추가열의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동기(만족) 요인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동기(만족) 요인을 많이 채우고, 위생(불만족) 요인을 없앤 회사가 있다면 매우 훌륭한 회사다. 나 역시 그런 회사에서 일하고 싶고, 모든 회사를 그런 회사가 되기를 목표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요인이 있는가와 상관없이 20년으로 정해져 있는 우리의 회사원 인생에서 현실의식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진통제를 많이 맞으면 현실감각이 날아간다.
현실감각이란 회사를 만족하며 다니는 것과 경제적 자립을 준비하는 것 사이의 균형이다. 인정과 안정감에 빠져서 미래를 소홀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월급날 통장을 보며 '남들처럼 살고 있다는 안정감'에 너무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다. 지금의 행복은 이대로 즐기면서 동시에 미래도 준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현실의식일 것이다.
"요즘 바쁘시죠."가 칭찬이 된 시대에 몸은 바빠도 마음이 바빠서는 안된다. '나 없이 안 돌아가는 회사'가 곧 '나 없이 돌아갈 것'임을 잊지 말자. 회사와 우리의 관계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어도 언젠가 쿨하게 헤어져야 하는 사이다. 우리에겐 환승연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