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씨가 업무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없겠지만, 우리와 같은 거리의 노동자는 날씨에 따라 근무 사항이 달라진다.
출근 전에 비가 오면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단체 알림방에 뜬다.
‘금일 우천으로 인하여 근무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치는 날이다. 일을 안 하니 임금이 없다. 일당제로 급여를 받는 기간제 근로자의 슬픔이다. 그러나 출근하여 일하는 도중에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을 잠시 멈추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처마 밑이나 공원의 정자에서 비 내리는 세상 구경을 한다. 다채로운 세상사가 빗속에서 펼쳐진다.
1.
“아이 이 양반아, 그렇게 급하게 끼어들면 어쩌자는 거야!”
“깜빡이 켰으면 좀 비켜줘야 할 거 아냐!”
비를 쫄딱 맞고 두 사내가 도로 한복판에서 옥신각신이다.
‘요즘은 사고 나면 보험사에서 알아서 다 처리하던데 왜 저렇게 당사자끼리 잘잘못을 다투고 있지?’하는 생각에 간만에 보는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비는 오는데 차선 하나를 막고 투닥거리고 있으니 도로는 소화불량 걸린 내장처럼 꽉 막힌 채 차들은 뒤죽박죽 엉켜 가뜩이나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엉킨 차들 사이에 낀 장의차 하나가 비상등만 켠 채 쩔쩔매고 있다. 어디선가 저승길 인도하는 상엿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와홍 어와홍 어와넘자 어와홍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북망산천 찾아가자 어와넘자 어와홍”
저승길을 막고 있는 이승 사람들의 다툼. 이 광경 보고 있자니 그로테스크하다 할까, 아니면 희극적이라 할까 하여튼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저승길 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
허망한 인생사인데 왜 저리 다투고 있나, 하는 생각.
상여 안에 누워있는 망자는 이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투지 말라 사람들아,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래, 마음껏 싸워라, 한 줌의 후회도 남지 않게 마음껏 싸워라. 이승의 한은 이승에서 풀어야지 저승까지 가져가면 안 되느니라.
망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억울한 사정이 있길래 망자의 저승길도 막고, 세상 사람들의 이승살이도 지체시키고 있는지...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빗속의 다툼이 처량해 보였다.
도로 위의 싸움은 멈출 줄을 모르고 장의차는 저승길을 찾아 이리저리 차 사이를 헤치고 겨우겨우 갈 길을 찾아간다. 정자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장송곡 같기도 하고 행진곡 같기도 하다.
멀리서 경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달려온다.
2.
공원에서 작업을 하다 비를 만났다. 우리는 파고라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곧이어 손에 검정 휴지 봉투와 쓰레기 집게를 쥔 노인들이 파고라로 몰려들었다. 우리는 자리를 좁혀 그들이 앉을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노인들은 복지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환경정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비를 피해 잠시 작업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였다.
우리는 파고라 아래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무료했던지 한 노인이 말을 꺼냈다.
"올해는 꽃샘추위 탓인지 꽃이 늦게 피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말문은 말꼬리를 잡고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이러다가 꽃잔치는 없는 거 아냐?"
"그리고 말이야, 저기 저 나무는 가지치기를 저렇게 하면 어떡해! 너무 자른 거 아냐?"
"공원 관리하는 놈들이 신경 써서 하겠어? 돈이나 받으면 그뿐이지 제 일처럼 신경 쓰는 놈들이 없어."
"공무원 놈들도 마찬가지지. 사무실에 앉아서 연필이나 돌리지 현장에서 나와보는 놈들도 없을 거야."
수목관리에서 공원관리로 그리고 공무원으로, 그들은 입에 담는 대로 하나씩 안주삼아 토막토막 자르고 지나갔다.
급기야는 나랏님 탓에 봄에 이렇게 비가 자주 내리니 결국 흉년이 들 거라는 말까지 한다. 나랏님이 대화 테이블에 올랐으니 정치 이야기가 안 나올 리 있겠는가?
"xx당 놈들 말이야, 그놈들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어."
한 노인이 열변을 토하자 옆에 앉은 노인이 반론을 펼친다.
"그런 말 말어. oo당이 잘한 게 뭐 있어? 싸움질이나 할 줄 알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목소리로 공무원들을 욕하던 노인들이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돌변하여 각자의 말을 칼날 삼아 상대방을 찌르려 한다.
이럴 때는 대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다. 한 노인이 더 이상 논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자리를 피한다. 남아 있는 노인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현 정세 및 미래의 정치 상황에 대해 장광설을 펼친다.
칠십을 넘게 살았으니 예지자가 되었나 보다.
누구를 향한 연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인의 장광설은 한참 지속되었다. 백색 소음으로 취급했지만 귀를 자극하는 쉰 목소리에 조금 피곤했다.
나는 그 노인들에 비해 한참을 못 미친다. 예지자는커녕 세상사의 가부 판정도 제대로 못하는 청맹과니다. 달리 말해 주관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아직 제 관점하나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내가 딱하다.
그러나 장점 하나는 있다. 말수가 적다는 편이다.
이것도 장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말수가 적다는 것은 할 말마저 못 하고 사는 바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간혹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껏 이렇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쨌든 나이가 들수록 많이 듣고, 말은 되도록 적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살아간다.
3.
“어때, 파전에다 막걸리 한잔?”
“막걸리? 좋지.”
노 씨의 말에 황 씨가 맞장구를 친다.
비는 파전을 부르고 파전은 막걸리를 부른다. 동료들은 퇴근 후의 술자리를 모의한다. 비 오는 날 일의 일과는 대동소이하다. 근무 시간 중의 술자리 모의와 퇴근 후의 술자리. 그리고 2차, 3차.
"오늘은 조금만 마시자. 저번에 너무 많이 마셔 다음날 고생했어."
"황 형, 오늘은 7080 가자고 설레발치지 마! 7080 한 번 가면 돈이 너무 많이 깨져. 복구하는데 힘들어."
"내가 7080 가자고 선수치지는 않아. 7080이야 김이 좋아하잖아."
"괜스레 조용히 있는 나를 끌어들이고 그래요!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건 형님 아니요!"
황 씨의 말에 김 씨가 버럭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술 먹은 뒤 인간이 개가 되고, 떡이 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대개 “술 한 잔 할까?”로 시작하지만 한 잔으로 끝나는 술자리는 내가 아는 한 없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다섯 잔은 열 잔이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급기야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일찍이 옛사람들은 술 마시는 사람들의 행태를 10자(字)로 정리했다. 취객십경(醉客十景)이다.
낙(樂), 설(說), 소(笑), 조(調), 창(唱). 즐기고 얘기하고 웃고 어울리고 노래하는 것이 사람이 술을 마시는 모습이라면 노(怒), 매(罵), 타(打), 곡(哭), 토(吐)는 술이 술을 마시거나 술이 사람을 마시는 모습이다. 화내고 욕하고 때리고 울고 먹은 걸 토해내니 추태가 따로 없다.
술자리의 사람들은 정겨운 목소리의 만담가로 시작하지만 술병이 쌓일수록 날카로운 비평가가 되고 급기야는 전쟁터의 전사로 변한다.
술은 비와 같다. 고운 비는 마른땅을 적시고 꽃을 피우듯이 한 잔의 술은 사람들의 얼굴을 꽃으로 만들고 그 공간은 꽃밭이 된다. 비가 계속 내리고 빗줄기가 굵어지면 땅은 파헤쳐지고 꽃은 떠내려간다. 꽃밭은 진흙탕이 되고 만다.
피아노 리듬처럼 조용히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마치 표창처럼 땅에 박힌다. 갈색의 선혈이 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