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이 피었습니다.

by 마정열

아침 반찬으로 숙주나물이 나왔다. 아내는 밥상이 빈약해 보이면 숙주나물을 순식간에 무쳐 반찬으로 내놓는다. 그래서 우리집 밥상에서 숙주나물은 익숙한 반찬이다.

나는 콩나물도 좋아하지만 아내는 콩나물보다 숙주나물을 더 좋아하여 밥상에는 주로 숙주나물이 다양하게 변신하여 올라온다. 여기에 대해 불만이 없다. 나도 숙주나물의 아삭한 식감을 좋아한다.

mung-beans-1351061_1280.jpg 숙주나물

녹두의 싹을 녹두나물이라 하지 않고 왜 숙주나물이라 했을까?

이 물음의 답은 대부분의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면 알고 있을 것이다.


녹두나물이 쉽게 상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단종복위운동 때 단종에 대한 충성을 지킨 사육신들과 달리 신숙주는 배신하여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찬탈에 가담했기 때문에 신숙주를 미워한 백성들이 녹두나물에 '숙주'라는 이름을 붙여서 신숙주를 비하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나물의 이름이 신숙주에게서 유래한 게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 숙주나물과 신숙주를 연관 지은 최초의 한글 기록은 1924년 이용기(李用基)가 편찬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 나타나는데, 원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숙주라 하는 것은 세조 임금 때 신숙주가 여섯 신하를 반역으로 고발하여 죽였기 때문에 이를 미워하여 나물 이름을 숙주라고 한 것이다. 만두소를 만들 때 이 나물을 짓이겨 넣으며 신숙주를 나물 이기듯 하자 하여 숙주라 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찌 사람을 죽이고 영화를 구할 수 있겠는가. 성인군자라면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어역]

이용기 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


신숙주는 억울한 면이 있기는 하다. 사육신을 고발한 인물은 신숙주가 아니라 김질이었다. 지조의 측면에서는 사육신과 비교되어 비난받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능력과 업적만 놓고 보면 그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의 많은 재상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물다.


신숙주는 한자음 정리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을 여러 번 찾아갔으며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에도 조예가 있었다. 외교적 수완과 감각도 탁월하여 쓰시마 섬에 가서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고, 대여진 외교도 담당하여 여진족과 반목이 있을 때 조선의 대표로 이를 조정하고 여진 추장들을 회합하는 역할도 했다. 이처럼 풍부한 국제적 경험 덕분인지 조선 역사상 외교를 관장하는 예조판서 직을 제일 자주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간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조선 후기까지도 조선의 일본 이해에 기본적인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국조보감》, 《동국통감》의 편찬에도 참여했고 농업 작물 기술을 적은 《농산축목서》를 저술했다. 군사전략가의 능력도 갖추어서 세조 6년(1460) 군사 8천을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귀환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북정 기록인 《북정록》을 저술하였다.


이처럼 신숙주는 행정, 군사, 외교, 정치적 감각까지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당대의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민중들은 이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민중의 눈에 사육신은 지조와 절개를 지킨 충절의 인물이었고, 신숙주는 개인의 영화를 위해 지조를 버린 변절자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지조를 지키다 죽어간 사육신이 애처롭고 안타까울수록 그 대척점에 선 신숙주가 미울 뿐이었다. 수많은 변절자가 우리 민족을 도탄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일제시대가 이런 점을 더 부각시켰을 것이다.


같은 녹두에서 나왔지만 숙주나물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닌 녹두꽃이 있다. 숙주나물은 변절자에 대한 비난을 드러낸 민중의 마음이라면 녹두꽃은 해방을 향한 민중의 꿈이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중들은 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불렀다. 전봉준은 어린 시절 키가 녹두콩만큼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동학군의 대장이 됐을 때도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노래에 나오는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파랑새'는 농민군의 적인 외국 군대, '청포 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 민중들을 가리킨다.


전봉준(1854~1895)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宮洞面 陽橋里: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유난히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대략, 155cm의 신장)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흔히 녹두라 불렸다.


1894년 1월 전봉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에 맞서 민란을 일으켰다. 만석보 축조와 각종 세금 징수 등으로 농민들을 괴롭히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한 것이다. 같은 해 3월 20일, 전봉준은 무장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을 기치로 봉기했다.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4월 27일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다. 전봉준은 관과 민이 화합하는 '관민상화(官民相和)'를 바탕으로 지역의 정치경제적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이 6월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자, 전봉준은 10월 12일 '척왜(斥倭)'를 기치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에서 농민군은 북상을 시도했으나, 10월 말과 11월 초 두 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에서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패배했다. 특히 12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일본군에 궤멸당했다.

패전 후 전남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도피하던 전봉준은 12월 28일 순창 피노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고발로 체포됐다.

1895년 2월 27일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이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약 한 달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1895년 3월 29일(음력) 전봉준에 대한 선고재판이 열렸다. 전봉준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다음날(4월 24일/음력 3월 30일) 새벽 2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때 전봉준의 나이 41살이었다.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했으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나.(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爲國丹心誰有知)

<전봉준, 운명(殞命)>


전봉준의 청동 좌상(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26-1번지). 전봉준이 처형되었던 장소인 전옥서가 있던 자리라 한다.


1895년 4월 24일, 그날 비가 내렸다. 녹두꽃이 떨어졌다. 녹두꽃이 피고 녹두가 열리면 그것으로 청포묵을 만들어 민중들과 함께 나누려던 청포 장수들은 눈물을 흘렸다. 스러진 녹두장군이 안쓰러워, 허망하게 사라진 꿈이 안타까워 한없이 눈물을 흘렀다. 하늘도 같이 울었다.


그러나 계속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녹두꽃은 떨어졌지만 녹두장군의 꿈은 지켜야 했다. 그것은 민중의 꿈이었기에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청포 장수는 눈물을 훔치고 다시 일어섰다. 호남 의병으로 일어났다. 일제의 잔혹한 토벌로 다시 쓰러졌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 독립군으로, 3.1운동으로, 국내외에서 가열차게 싸웠다. 독립투쟁의 전선에 피를 뿌리고 수많은 녹두꽃이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해방은 쟁취했지만 녹두는 채 영글지 못했다.

4.19, 5.18, 6월 항쟁, 촛불혁명으로 민중들은 공동체의 이상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2025년 4월, 형형색색의 응원봉으로 녹두꽃이 피었습니다.

민중의 꿈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음을 역사는 또 한 번 증명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녹두장군의 꿈이었고, 청포 장수가 피로써 지키고자 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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