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손톱 끝에 물든 그리움

by 마정열

1.

먼 옛날, 한 여자가 선녀로부터 봉황 한 마리를 받는 꿈을 꾸었다.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산달이 되어 딸을 낳았다. 여자는 딸의 이름을 봉선이라 지었다.

봉선은 곱게 자랐고 천부적인 거문고 연주 솜씨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녀의 거문고 연주가 하늘을 울린다는 소문은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봉선을 궁궐로 불려 가 임금님 앞에서 연주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봉선의 거문고 연주는 임금님을 비롯한 궁궐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봉선은 임금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봉선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봉선의 병은 날로 깊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의 행차가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봉선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하여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임금님은 이 거문고 소리가 봉선의 거문고 연주 소리임을 단박에 알아채렸다. 임금님은 소리가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봉선은 거문고 연주를 하느라고 손가락에 붉은 피가 맺혀 뚝뚝 떨어졌다. 이것을 본 임금님은 가슴이 아팠다. 임금님은 봉선의 손을 무명천에 백반을 싸서 동여매주고 길을 떠났다.

그 뒤 봉선은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 무덤에서 빨간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빨간 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봉선의 넋이 화한 꽃이라고 봉선화라 하였다.


2.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이다. 그는 충렬왕과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세자로 책봉되었던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였다.

충렬왕 24년(1298년), 세자는 왕위를 물려받아 임금이 되었다. 충선왕은 나랏일을 잘 돌보고 개혁 정치를 했다. 안향 등 문신들을 등용하고 관제를 개편했다.

개혁 정치에 대해 충렬왕의 측근들을 비롯한 집권 세력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개혁 정치를 공격하고 충선왕의 부부 문제를 들추어냈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에 조인규의 딸 조비와 먼저 혼인했다. 그 뒤에 원나라의 강요로 조비를 후궁으로 내리고 쿠빌라이의 손녀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하지만 충선왕은 조비만을 사랑하고 계국대장공주에게는 정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질투심에 눈이 먼 계국대장공주는 조비가 자신을 저주하고 비방했다는 거짓 편지를 원나라 황실로 보냈다.

충선왕은 이 사건을 빌미로 반원적인 개혁을 했다는 문책을 받아 일곱 달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원나라로 끌려갔고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앉았다.

충선왕은 원나라의 연경에서 10년간 머물렀다. 어느 날 밤 그는 한 소녀가 자신을 위해 가야금을 타는 꿈을 꾸었다. 소녀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떨어졌다. 충선왕은 놀라 잠이 깼다.

충선왕은 궁궐 안에 있는 궁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궁녀 가운데 한 사람의 손이 이상했다. 열 손가락에 흰 천을 친친 감고 있었다.

“어찌하여 손가락을 흰 천으로 동여맸느냐?”

충선왕이 묻자 궁녀가 대답했다.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는 중입니다. 저는 고려를 떠나온 공녀인데 고향이 그리워서요.”

궁녀의 아버지는 충선왕의 개혁 정책을 실행하던 신하였다. 충선왕이 왕위에서 쫓겨난 뒤 그도 벼슬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딸이 공녀로 끌려와 원나라에서 궁녀가 되었던 거였다.

궁녀는 충선왕에게 준비한 가야금 가락을 들려주겠다고 하였다. 그 가락은 왕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노래였다.

왕은 크게 감명하였다.

‘어린 소녀도 고국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봉선화 물을 들이며 향수를 달래지 않는가. 나도 고려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하루하루 보람되게 보내야겠다.’

그 뒤 충선왕은 원나라 정치에 참여해 가까이 지내던 황족인 카이산(무종)과 그의 동생 아유르바리바드(인종)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문득 원나라에서 만났던 소녀가 생각났다. 왕이 소녀를 찾았으나 소녀는 이미 죽은 후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하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충선왕은 소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궁궐 정원에 봉선화를 심게 했다. 그 뒤로 궁녀들은 봉선화꽃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3.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으려나?”

엄마는 봉숭아를 짓이겨 내 손톱에 올려놓으며 한숨처럼 말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한 여름이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서 첫눈이 올 때까지 또는 12월 크리스마스까지 손톱에 꽃물이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나 남자 없어.”

목소리가 유독 쓸쓸했다. 엄마도 느꼈을까?

“다 때가 있어.”

서른이 넘은 딸 손을 어루만지며 엄마가 말했다.

“네 손은 참 작다.”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손도 가늘었다.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렸다. 겨울인데도 손에서 땀이 났다.

남자는 봄꽃이 지자 사는 데 자신이 없다는 엉성한 변명을 남기고 여자의 곁을 떠났다. 여자는 남자를 잡지 않았다.

아버지는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남자가 떠나고 얼마 안 된 봄날이었다.

위암 수술 후 삶의 활력을 조금씩 찾아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서럽게 울었다. 여자는 너무도 억울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왜 내 손에 봉숭아 꽃물을 들어줬을까? 엄마의 손에 들이고 싶어서였을까? 당신의 손에 물을 들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아서였을까?

그해 봉숭아 꽃물은 첫눈이 오기 전에 사라졌다.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봉선화.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봉선화과의 한해살이풀. 봉숭아라고도 한다.

햇볕 잘 드는 곳이면 좋고 아니라도 그늘진 곳 습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매년 씨를 뿌리지 않아도. 또 좋은 곳,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는 식물이다.


60cm 전후 높이의 줄기에 붉은색, 분홍색, 흰색 등 여러 색의 꽃들이 아래로 쳐지면서 매달린다. 꽃 뒤쪽에 며느리발톱으로 불리는 꿀주머니, 거(距)가 달려있다. 그 사이사이 오동통하고 복슬복슬한 타원형의 씨앗 주머니들이 달려 익어가고 있다. 터질 때 보면 씨앗이 까만색의 들깨 씨앗 같다.

봉선화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씨주머니를 건드리면 씨가 사방으로 튀어나오는 데서 유래된 꽃말이다.


꽃의 형상이 봉황새(鳳)를 닮았다고 해서 봉선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7세기 명나라 식물 사전 격인 ‘군방보(群芳譜)’에는 ‘줄기와 가지 사이에 꽃이 피어 머리와 날개, 꼬리와 발이 모두 우뚝하게 일어선 것이 봉황새의 형상을 닮아서 봉선화란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선화로 손톱에 물을 들인다고 해서 규중 여인들의 벗이라는 의미로 규중화(閨中花)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봉선화와 봉숭아 둘 다 표준말이다.


봉선화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손톱에 물들이는 이미지이다. 염지갑화(染指甲花), 즉 손톱에 물들이는 꽃이라는 풍습은 조선 초기 문신 소세양의 양곡집(暘谷集)에 처음 등장하지만 고려 충선왕의 이야기 속에 손톱에 물들인 궁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훨씬 오래전부터 이 풍습이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숭아의 짓이긴 꽃잎을 소금이나 백반과 섞은 혼합물을 손톱 위에 올리고 손톱을 비닐 등으로 싸서 실로 동여맨 뒤, 하룻밤 기다리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든다. 첫눈이 올 때까지 물든 것이 지워지지 않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봉숭아((정태춘 곡, 박은옥 사)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 가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다가면 질터인데

손가락 끝에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밝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났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가락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봉숭아에 대한 노래는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홍난파 곡, 김형준 시의 '봉선화'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박은옥은 청아한 목소리로 손가락 끝에 봉숭아가 지기 전에 그리운 님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 님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모든 이에게 그리던 님이 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위의 글 1, 2는 봉숭아와 관련된 전설이다. 특히 글 2는 고려 대몽항쟁이 끝나고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의 전설이어서 더욱 가슴 아픈 이야기다.


고려는 몽골과의 30년 전쟁에서 패한 뒤 몽골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원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많은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원나라로 데려갈 여자들을 내놓으라고 했다. 고려는 속국의 처지여서 원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다. 이리하여 많은 여자가 원나라로 보내졌다. 이렇게 공물처럼 중국으로 끌려간 여성을 ‘공녀’라고 불렀다.


30년 가까이 계속된 몽골의 침략에 백성들의 삶은 이미 심하게 피폐해졌을 텐데 그 뒤를 이은 원 간섭기 약 100년 동안 여섯 명의 왕이 열 번이나 왕 자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정국이 엉망진창이었다. 그 와중에 제일 고통을 받는 것은 민중이다. 이래저래 그 고운 봉숭아꽃은 처량하게 살아온 우리 조상을 상징하는 서글픈 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글 3은 봉숭아 꽃물과 관련하여 지어낸 짧은 글이다.


공원에 앉아 있다가 손녀와 함께 산책하는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들어 있었다. 고왔다. 할머니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손톱 끝의 색은 첫눈이 오기 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찍힌 붉은 그리움은 아주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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